닉 드르나소 《사브리나》

기술의 발달과 쌍생인 인간 퇴행에 대한 강력하고 독특한 방식의 증언...

by 우주에부는바람

《사브리나》는 그래픽 노블로는 최초로 맨부커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그래픽 노블은 우리가 흔히 만화라고 부르는 코믹북과 구별하기 위한 개념으로 코믹북과는 달리 완결된 서사의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예술성을 강조한다는 특성을 갖는다. 히어로물 일색인 미국의 코믹북과 궤를 달리 하며 주로 유럽에서 발간되는 예술 만화를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브리나》는 사브리나라는 한 여인의 실종 그리고 밝혀지는 살인 사건의 전모를 가운데에 두고, 그녀의 애인이었던 테디와 실의와 증오로 범벅된 테디를 자신의 집으로 받아들인 캘빈, 사브리나의 여동생인 산드라 등의 인물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들 인물들 간에 발생한 갈등들이 있지만,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이 사건을 대하는 미디어들의 양태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은 경찰이 내세운 그 공식적인 이야기, 아무 힘도 없는 전형적인 외톨이 남성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생판 모르는 낯선 여자를 자신의 작은 아파트로 납치해서 잔인하게 죽였다는 그 이야기를 믿겠지만, 여러분의 눈을 조금 더 철저하게 가리시기 바랍니다. 그 사건의 배후에는 뭔가 좀 더 복잡한 음모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p.108)


사브리나의 애인이었던 테디나 사브리나의 동생이었던 산드라는 자신의 애인이나 언니의 죽음으로도 힘겹지만, 시카고 살인 사건으로 불리우는 살해 동영상이 유출되면서, 그리고 이 살인 사건을 향한 음모론적 시각의 범람으로 인해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살인이 없던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일련의 조작에 의한 자작극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한다. 친족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편안히 애도할 수조차 없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준 혜택은 그것이 드리우게 된 그늘진 면모들에 의해 충분히 퇴색되고 있다. 기존 레거시 언론의 대항마로 부상되었던 1인 뉴스 시장은 가짜 뉴스의 범람으로 혼탁해진 지 오래이고, 이제 우리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음모론에 시달리거나 믿고자 하는 것만 믿는 확증 편향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우리가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취사 선택의 힘은 어쩌면 조만간 인공지능에게로 바통이 넘어갈 지도 모른다.


“여기는 원래 스푼에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전형적인 미국 그러다 작년에 위생 검사관이 와서 문 닫을 뻔했어. 주방에서 쓰는 조리 도구들을 다 새로 바꾸고, 벽에 달라붙은 기름기를 닦아내고, 환기 시스템도 싹 다 갈아야 했지. 그런데 왜 그런지 그렇게 바꾸고 나니까 음식 맛이 예전 같지 않은 거야. 옛날 맛을 내려고 여기 사람들은 정말 힘들게 노력했지만 그게 영 안 되더라고. 내 친구 코너는 이곳을 발전의 피해자라고 불러, 하···.” (p.105)


얼마 전 우연히 다큐인사이드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모바일 IT 전략가로 소개된 강사는 기계가 진화하여 인간을 추월하는 시점을 뜻하는 ‘싱귤래리티(Singularity)’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는 이러한 싱귤래리티가 5년 내지 10년 안에 현실화될 것이라 예언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진짜 문제는 ‘리버스 생귤래리티(Reverse Singularity)라고 우려했다. 기계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의 단순성을 닮아 퇴화‘함으로써 벌어지는 역전의 상황, 그러니까 인간성의 후퇴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책에서 보여지는 극단의 상황이 아니어도 우리는 일상의 곳곳에서 이러한 후퇴의 경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엄청난 효율이 있었지만 최근 몇 십년만 놓고 본다면 그것이 노동의 강도나 시간을 그만큼 획기적으로 줄여주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반면 그로 인한 퇴행의 그림자는 짙고도 커서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사브리나》는 그것에 대한 강력하고 독특한 방식의 증언이다.



닉 드르나소 Nick Drnaso / 박산호 역 / 사브리나 (Sabrina) / 아르테 / 203쪽 / 20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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