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종다양의 비굴을 강요하는 이 완벽한 불균형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2015년 4월 2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가끔 아내는 내게 묻는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지 얼마나 됐지? 우리는 손을 꼽아보다가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함께 절망한다. 뭐지? 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은... 거꾸로 매달려도 흘러는 간다는 국방부의 시계만큼이나 느리다. 이 저속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 또한 우리를 절망스럽게 만든다. 정권과 정부와 국가를 두리뭉실하게 하나의 고리에 엮어 놓은 변태적인 이데올로기가 횡행하니 함부로 소리 높여 무언가를 외칠 수도 없다. 이래저래 족쇄를 찬 채 이 느린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박노자는 어쩌면 이러한 대한민국에서 별다른 정서적 구애받음 없이 발언할 수 있는 소수자라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이유로 등한시하였던 박노자의 책을 처음 집어 든 것은 어쩌면 가파르게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별다른 뒷감당을 할 필요 없는 그의 발언의 현재가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현재는 귀하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노르웨이에서 학생을 가르친다는 상황 그러니까, 추상적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 그리고 북유럽의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를 고루 겪었다는 경험치 또한 그의 발언 내용을 궁금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작년의 통진당 해산 사태를 바라보며 이명박 이래로 이어져온 보수 기득권 세력의 치밀한 전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 시기에 뉴라이트와 일베를 현실 세계의 일원으로 당당히 포섭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균형추를 오른쪽으로 한껏 끌어다 놓았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통진당 해산을 통해 균형추 왼쪽의 끄트머리를 뚝 잘라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제 우리는 일베라는 오른쪽 끄트머리, 새누리당이라는 중도, 새정치연합이라는 왼쪽 끄트머리를 가진 매우 기형적인 사회에 살게 되었다. 다른 나라라면 몽땅 오른쪽에 위치시켜야 할 세력들을 가지고 사이좋게 좌와 우를 나누는 이 한국 사회의 완벽한 불균형이라니...
그리고 이러한 사회의 불균형은 정권과 정부와 국가를 혼합시킨 한국형 이데올로기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일련의 그룹에 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진영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발언자들의 자기 검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치열함이 사라진 채 연성화 된 글들 혹은 매우 우회적이고 우화적인 발언에 만족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박노자의 글들에 무작정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과격해 보이는 (세상에 이런 글들을 과격하다 생각해야 하다니, 이명박과 박근헤의 균형추 이동 전략은 백이십프로 성공한 셈이다) 아니 그 과격성이 갖는 희소성 때문에 오히려 몇몇 발언들은 가치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워서 침 뱉기를 하는 일에 서툰 우리들을 대신하여 한결 수월하게 우리들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발언들을 들여다보는 일 또한 유의마하다. 그렇게 그의 시야에 포착된 우리 사회의 몇몇 단면들은 아래와 같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지배자가 더럽지 않은 시절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가 되자 피지배자마저도 그런 지배자의 의식과 행태를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신자유주의는 서유럽과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까운 동유럽권을 먼저 강타했다. 이어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일본에서 대중적 우경화, 전례 없는 비정규직 양산, 자살 붐을 일으키더니 1997~1998년 이후로는 한국마저 덮쳐버렸다. 이제 거의 20년 가까이 된 지금,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반사회적 조직 원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통념이 되었고, 각자의 소신과 처세술이 되었다. 사회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모두 신자유주의화되었다는 것이다.” (pp.6~7)
“... 대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만인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 이해를 추구한다고 전제하고 역사를 분석한다. 이 전제는 거시적으로는 맞지만, 어떤 구체적 국면을 미시적으로 살펴보면 그와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피지배자들이 매일같이 그들의 실익을 스스로 배반하여 지배자들에게 수동적으로나마 동의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배자라 하더라도 어떤 행동은 이해 계산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그 신념의 정체를 추적하다보면 일종의 정신병인 편집증이 가장 많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합리적인 동물이다. 전자는 박근혜를 찍은 수많은 한국 서민의 정치 행동에서 볼 수 있고, 후자는 통진당 해산 청구 등을 추진하는 박근혜 정권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p.32)
“... 인류의 현 수준에서 완전한 탈경쟁화는 힘들다. 그러나 경쟁이 지금으로서는 완전히 치유하기 힘든 인류의 질병이라 해도 그것을 고치기 위해 한걸음씩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경쟁적 선발의 원칙을 유지한다 해도 그 선발의 관문에 들어가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안전하고 인간적 존엄성이 보장되는 삶을 제공해야 하는 것은 사회의 의무가 아닐까? ...” (p.57)
“선거의 결과만으로 한 사회의 성격이나 지향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지난 18대 대선의 투표율이 75퍼센트였다면 우리 사회 유권자들의 4분의 1이 투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성향을 투표행위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근혜 공주께 한 표를 봉헌한 모든 사람은 과연 공주님과 부왕의 은덕을 무조건 사모했기 때문일까? 그러한 근왕파도 없지 않겠지만, 상당수는 그냥 엇비슷한 수준의 거짓말인 민생 공약을 내세운 박근혜와 문재인 두 사람 사이에서 좀더 확실한 국가주의자인 듯한 전자를 택했을 뿐이다. 자유주의적 신자유주의 10년, 우파적 신자유주의 5년 끝에 피곤해져 그저 초강력한 국가가 책임지는 성장과 고용, 그리고 부동산 값 붕괴 방지를 원했을 것이다. 이렇게 투표한 이들은 무슨 특별한 극우파라기보다는 그저 남한 사회가 으레 요구하는 표준적인 경제 동물적 근성과 국가주의적 보수성을 지녔을 뿐이다.” (p.63)
“... 고급 언어 구사력은 적어도 70~80퍼센트는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출신 성분의 문제일 뿐이다. 강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수나 재벌 임원, 고급 공무원인 부모와 함께 미국을 드나들고, 거기에서 일찍부터 살아보고 공부한 사람에게는 어쩌면 한글 논문보다 영어 논문이 더 쉬울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는 능력보다 계급의 문제인데, 한국인 다수의 머리를 아직도 지배하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자본주의적, 적자생존적 실력주의 이데올로기다. ‘하면 된다’, ‘가난은 죄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못하면 자신의 무능력부터 탓하라’는 말이나, 출세 못한 모든 이를 무능력자로 규정하는 것은 이 이데올로기의 골자다. 무능력자라면 마음대로 짓밟고 착취하고 차별해도 되니, 정말 한국형 정글 자본주의에 이 이데올로기는 안성맞춤이다.” (p.112)
“정보 범람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장기적으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 체제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인간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정보는 매체 소비자에게 잘 들어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강고한 비결 중 하나다. 북한처럼 바깥에 대한 정보를 엄격히 통제하면 그 정보가 알려졌을 때 대중의 엄청난 분노와 맞닥뜨려야 한다. 하지만 남한처럼 체제에 비판적인 세력에 대한 정보를 자꾸 주변화하면 소비자를 체제의 능동적 공범으로 만들기가 훨씬 쉽다. 흔히 북한을 무서운 사회라고 하지만, 개인에 대한 흡입력 등을 볼 때 남한이 더 무섭다.” (p.267)
“착취, 강탈, 지배 이외에도 자본주의 세계를 특징짓는 중요한 축은 ‘주변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령 더는 시장에 내놓을 노동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착취할 만한 가치도 없는 노인들은 폐기물처럼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다... 자본주의 세계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탈인간화’다. 이 사회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구성원들을 항시적으로 비정상적인 상태로 몰아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군대는 선구적인 탈인간화 실험장이지만, 스포츠계나 연예계도 뒤지지 않는다. 구타를 당하거나 술 시중과 성 상납을 강요받는 종사자들은 몸을 망가뜨리더라도 경쟁자를 물리쳐 몸값을올려야 한다... 그런데 이런 곳보다 더 철저하고 악질적인 탈인간화 현장은 바로 학교다... 부모를 아직 우주 전체로 아는 나이에 아이들은 바로 그 붐의 강요로 영어를 외우고, 친구들을 경쟁자로 생각해야 한다... 적자생존의 원리를 은연중에 체득하고, 맞는 아이가 아닌 때리는 아이로 자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낙오자나 주변 분자의 삶을 감수하거나, 이민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무간지옥이 따로 없다.” (pp.334~335)
박노자 / 비굴의 시대 / 한겨레출판 / 375쪽 / 20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