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코에 피어싱을 하고 등장해도 될 법한 포스트 김영하를 위하여...
“비관적 현실주의는 인상을 쓰고 침울하게 살아가자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의 의미,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관적 현실주의에는 개인주의가 필수적입니다. 집단은 어딘가로 쏠리게 마련입니다...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려면 남과 다르게 사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pp.24~28)
공중파의 한 프로그램에서 작가가 강연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다음 날 문학에 뜻을 두고 있는 동료 직원에게 그 프로그램을 찾아서 보라고 권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강연의 내용을 오래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다. 잊고 있었다. 책에는 그 날 SBS의 힐링 캠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작가가 진행하였던 강연이 <비관적 현실주의와 감성 근육>라는 제목을 달고 수록되어 있다.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자기만의 감각과 경험으로 충만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그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요즘과 같은 저성장의 시대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 한길로 나아가는 것보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개인들이 나름대로 최대한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것, 그런 개인들이 작은 네트워크를 많이 건설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35)
《보다》라는 제목으로 2014년 가을에 산문집을 낸 작가가 이번 2015년 봄에는 《말하다》라는 제목을 붙여 책을 냈다. (일련이 시리즈물로 낼 것이라고 하였는데 보다, 말하다 다음에는 읽다, 였던가...) 그러니까 책에는 작가가 방송 프로그램에서 혹은 축제나 학교에서 행한 강연의 내용과 각종 대담이나 좌담을 비롯한 인터뷰의 내용이 다수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부제에서 드러나 있듯 삶과 문학과 글쓰기로 요약될 수 있겠다.
“통찰은 모든 직업인이 다 한다고 생각해요. 구두를 닦는 사람은 구두만 봐도 껄 신는 사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렇듯 통찰은 작가도 하고 시장 아줌마도 하고 버스 운전사도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작가의 존재로서 대접받아왔던 것은 그 통찰을 글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작가는 어떤 면에서 통찰력을 독점했다기보다는 표현력을 독점했다는 게 맞는 말 같아요.” (pp.88~89)
작가가 등단하던 시기부터 (그러니까 내 기억에 김영하는 <리뷰 REVIEW>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태의 문학 계간지를 통해 등단하였고, 당시에는 <리뷰>나 <상상>과 같은 문학고 비문학이 혼용된 계간지들이 듬성듬성 출현하던 시기였으며, 나는 이 두 계간지의 창간호에서 마지막까지를 함께 하였다, 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거의 빼먹지 않고 그의 소설과 산문집을 읽었다. 그렇지만 그의 강연이나 인터뷰 내용까지 읽지는 못했으니 이 책을 읽는 일은 그렇게 빠진 퍼즐을 채우는 작업과 비슷하기도 하다.
“...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 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p.121)
물론 빠진 퍼즐을 채웠다고 해서 완성도가 있는 만족감을 느끼게 되지는 않았다. 왠지 김영하라는 작가는 여전히 진행형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확고해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확고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어느새 탈피를 하고 마음껏 변형하는 재주를 보이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대중을 피하는 듯도 하고 대중을 즐기는 듯도 한, 아니 은폐와 노출의 이율배반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인상이 짙다.
“... 매너리즘의 문제는 ‘잘하지만, 큰 매력은 없다’는 거예요. 어쩌면 한국소설들은 그 단계에 와 있을지도 몰라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쏟아져나오고 소재들도 다양해지고 있지만, 어떤 혁명적인 변화의 단계로 넘어가지 않은 거죠. 90년대 작가들이 등장했을 때 충격을 줬던 것은, 이전 소설과 완전히 달라서였어요. 거칠었고, 세련됨 같은 것도 많이 떨어졌어요. 저는 그 시대에 작가가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요.” (pp.213~214)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도 같다. 김영하라는 작가 하면 귀걸이가 먼저 떠오르는데 (마치 유시민이 국회 등원 때 정장 대신 콤비를 고집했던 것처럼) 그는 어쩌면 최초로 귀걸이를 한 작가였을 수 있다. 그렇게 그는 파격적으로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귀를 뚫은 작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었다) 등장했지만 지금은 중견의(?)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아래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화를 생각해보건대 (농담인 듯 말해보자면) 코에 피어싱을 한 채로도 문단의 선배들 앞에서 꼿꼿할 수 있는 괜찮은 작가 하나쯤 등장할 때가 되었다.
“... 한국소설의 세계화와 관련해서도 ‘한국 소설은 뛰어난데 번역 때문에 알려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시는 분이 많은데, 물론 뛰어난 소설들이 있겠지만 ‘잘 썼다, 잘 번역했다’고 해서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소설은 여러 문화이 혼종을 통해 빚어진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돌연변이의 산물이기 때문에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돌연변이의 산물이기 때문에 미리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고, 기획하여 생산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게 만약 실현된다면, 그 주인공은 아마도 한국의 정서를 잘 살린 문학이 아니라 이상한 것, 어지럽게 뒤섞인 것, 도저히 우리가 한국문학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정말로 한류를 지속시키기를 원한다면 더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이상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p.237)
김영하 / 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 문학동네 / 249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