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의 인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격이 작동하는 이명(異名)의 문장들을
유독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와 같은 작가가 특히 그렇다. 읽어 보면 왜 그러한지 알 것 같기도 하다. 페르난두 페소아를 읽는 작가 자신이 쓰려는 작품에 페르난두 페소아가 직접 개입하지는 않지만, 페르난두 페소아를 읽는 작가 자신에게는 아주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 바로 페르난두 페소아의 문장들일 수 있겠다 싶다. 그러니 이 책 《불안의 책》 같은 것을 읽으면, 작가들은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1888년 포르투갈 리스본 태생의 작가이다. 그리고 1935년에 죽었으니 고작 사십대에 생을 마감했다. 또한 작품들은 살아 있는 동안이 아니라 사후에 대부분 발표되었는데, 이 《불안의 책》또한 1982년 자신투 두 프라두 코엘류에 의해 편집되어 만들어졌다. 또한 페르난두 페소아는 많은 이명(異名)으로 유명한데, 무려 70개가 넘는 이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판의 역자인 안토니오 타부키는 소아레스의 책을 “이중적인 소설(romanzo doppio)”이라고 말한다. 페소아가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라는 인물을 창조했기 때문이고, 그에게 일기를 쓰라는 임무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자서전은 페소아가 남긴 유일한 산문작품이다. 이 일기는 페소아가 대략 20년 동안 쓴 일기이고, 오랫동안 출간되지 않다가 나중에(1982) 출판되었다.』 (p.240, 역자후기 중)
그러한 이유로 이 책 또한 일기를 포함한 자전적인 글임에도 등장하는 인물은 베르나르두 소아레스, 라는 이명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책 속의 모든 이야기들은 페르난두 페소아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페르난두 페소아가 만들어낸 베르나르두 소아레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득 오래전 글쓰기를 공부할 때 일기를 3인칭으로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이 떠오른다. 실제로는 실천에 옮기지 않았고 설령 실천에 옮겼다고 하더라도 페르난두 페소아의 그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오래 전에 읽기 시작하였지만 아껴 가며 오래오래 읽고 싶었다. 그래서 더 읽고 싶은 걸 참고 하루에 십여 페이지 이상 읽지 않도록 조절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불안의 책》이 사실은 이탈리아판과 영어판의 발췌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완역판이라고 할 수 있는 《불안의 서》가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아껴 읽기를 그만 둘 수 있었다. (발췌본을 빨리 읽고, 완역본을 다시 읽어야지, 하면서 좋아했다.)
문장들을 곱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느끼고 싶다면, 내가 이 책을 읽는 장면을 누군가가 촬영하면 될 것이다. 나는 책장 사이사이에 빼곡하게 포스트잇을 붙여 놓고 틈틈이 그것들을 음미한다. 《불안의 서》를 다시 읽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천천히 읽어야지...) 다시 한 번 리뷰를 쓰게 될 것이지만, 그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때도 지금처럼 책에서 뽑은 문장들을 내 손으로 다시 옮겨 적으며 그저 묵묵히 묵묵히...
“아, 그렇다! 바스케스 씨는 인생이다. 단조롭고, 피할 수 없으며, 법을 따르는, 미지의 인생. 이 평범한 사내는 인생의 평범함을 의미한다. 그는 바깥에서 보면 나에게 전부이다. 내게 인생은 모두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도라도레스 거리의 사무실이 내게 인생을 의미한다면, 같은 도라도레스 거리에서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 3층은 예술을 의미한다. 그래, 인생과 동일한 길이지만, 다른 곳에 머무는 예술. 살아가기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해방된 예술. 인생만큼 단조롭지만 단지 다른 곳에 있는 예술. 그렇다, 이 도라도레스 거리는 나를 위해서 사물의 완전한 의미를, 수수께끼가 있다면 모든 수수께끼의 답을 보듬고 있다. 답을 가질 수 없는 수수께끼를 제외하고 말이다.” <p.17, 6(155)>
“단조로움, 지루하게 비슷한 똑같은 일상, 차이가 없는 오늘과 어제. 그것이 늘 내게 남는다. 나의 정신은 깨어나서 나를 미혹하고 내 앞에서 되는 대로 날아다니는 모기를 보고 즐거워한다. 거리에서 어쩌다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답답한 사무실에서 느끼는 커다란 해방감에, 휴일에 취하는 끝없는 휴식에 나의 정신은 깨어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이라도 되었다면, 나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회계사 보조는 로마의 황제가 되는 꿈을 꿀 수 있다. 영국의 왕은 그럴 수 없다. 영국의 왕은 이미 왕이기 때문에 그 외에 다른 것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p.39, 19(115)>
“나는 안개와 더불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깨어나는 도시의 아침이 시골에서 하루가 밝을 때보다 훨씬 더 감동스럽다... 시골에서 새벽을 맞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허나 도시에서의 새벽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더 마음이 편안하다. 그렇다. 왜냐하면 내게 일어나는 가장 큰 행복은 다른 모든 행복처럼 현실이 아닌, 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골의 아침은 존재한다. 그러나 도시의 아침은 약속한다. 전자는 살게 하고, 후자는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사는 것보다는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고 나는 마치 저주받은 위인들처럼 느낄 것이다.” <p.56, 32(151) 1931.9.10-11>
“꿈에 속하는 감각이 있다. 이 감각은 마친 안개처럼 영혼의 온 공간을 점령하여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고, 행동을 할 수 없게 하고,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게 한다. 우리가 잠에 빠진 것처럼 꿈속의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남아 있게 되고, 굼뜬 태양은 감각의 움직이지 않는 표면을 뜨겁게 데운다. 그것은 그저 몽롱한 상태일 뿐이다. 의지는 뜰을 지나가다가 게으르게 발로 툭 건드려 쓰러뜨리는 물통과 마찬가지이다.” <p.60 35(159) 1930.4.21.>
“... 나는 슬프다. 그러나 명확하게 슬픈 것은 아니고, 더구나 애매하게 슬픈 것도 아니다. 나의 슬픔은 저기 바깥에, 상자를 쌓아둔 거리에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도 내가 느끼는 것을 정확히 전달하지는 못한다. 누군가의 느낌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알리고자 한다. 한데 뒤섞인 다양한 종류의 나와 바깥의 거리를 말이다. 바깥의 거리 역시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에 분석할 수 없는 은밀한 방식으로 내게 속하며, 나의 일부가 된다.” <p.77 44(167) 1933.11.2.>
“산다는 것은 타인이 되는 일이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 느낀다면 느끼는 것도 불가능하다. 요컨대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느낀다면 그것은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제 느낀 것을 오늘 기억하는 것이며, 어제 잃어버린 인생을 오늘 사는 송장이나 마찬가지이다.” <p.81 46(101) 1930.5.18.>
“옷을 입는 인종들만이 벗은 몸의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장애물의 가치가 에너지를 통해서 나타나듯이 소박함의 최고의 가치는 관능성을 통해서 나타난다. 인위적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을 맛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내가 이 넓은 들판을 보고 느낀 것은, 내가 그곳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느낀 것이다. 억압을 받고 살았던 사람만 자유를 이해한다. 문명은 자연을 교육하는 것이다. 인위적인 것은 자연스러운 것에 접근하기 위한 길인 셈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것을 자연스러운 것과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월등한 인간 영혼의 자연성은 자연스러운 것과 인위적인 것 사이의 조화에 있다.” <pp.87~88 50(105)>
“... 나는 습관이라는 나의 나뭇가지 위에서 날마다 나의 의식적인 무의식을 천천히 산책시킨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걸어가는 나의 운명과, 나는 전진하지 않는데 전진하는 나의 시간을 산책시킨다.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에 관해서 이렇게 짤막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나의 독방의 쇠창살 뒤에 유리창이 있는 것으로도 나는 족하다. 그리하여 나는 유리창 위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먼지 위에 나의 이름을 대문자로 쓰고, 죽음과 체결한 계약서에 날마다 서명을 한다... 우리의 인생이 식물성이듯이 우리의 진실도 식물성이다. 우리는 유리창 안과 밖에 낀 먼지이며, 운명의 손자들이고, 우리의 친부인 혼돈이 죽자 과부로 남은 영원한 밤과 결혼한 하느님의 의붓자식들이다.” <pp.143~144 88(146)>
“나의 조용한 산책은 지속적인 대화나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과 주택과 돌과 포스터와 하늘은, 모두 운명의 거대한 행진 속에서 말[言]로 헤치며 나아가는 거대하고 친밀한 군중이나 마찬가지이다.” <p.171 108(182)>
“생각을 해보면, 모든 것이 불합리한 듯하다. 감각을 느끼면, 모든 것이 이상한 것 같다. 내가 원하면, 원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무엇이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내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꿈을 꾸면, 누군가 나를 글로 쓰고 있는 것 같다. 감각이 일어나면, 누군가 나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뭔가를 원하면 나는 운반할 상품처럼 짐마차에 실린 것 같고, 나의 것인 듯한 움직임을 통해서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가고 싶지 않았던 곳을 향해 가는 것 같다.” <pp.174~175 110(200) 1931.12.20.>
“시간이 거대한 고통처럼 느껴진다. 모든 사물을 두고 떠날 때마다 나는 항상 과장된 감동을 느낀다. 몇 달간 살았던 초라한 월세방, 엿새 동안 묵었던 시골 여관의 탁자, 심지어는 기차를 기다리느라 2시간 동안 머물렀던 기차역의 서글픈 대합실까지 그러하다. 그러나 인생의 좋은 물건을 두고 떠나면서 대개 바로 그 정확한 순간에 내가 그것을 앞으로 볼 수도 결코 가질 수도 없을 것이라고 나의 신경의 모든 감수성을 동원하여 생각할 때, 그것들은 형이상학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준다...” <p.180 118(219)>
“내게 모든 애정은 표면적으로 발생하지만, 진실하게 그러하다. 나는 언제나 배우였지만, 진정한 배우였다. 사랑을 할 때마다 나는 오직 사랑에 빠진 척만 했으며, 나 자신에게도 그러했다.” <p.199 133(275)>
“지루해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나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때때로 글을 쓴다.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여담을 피할 수 없고 그것에 몰두하지만, 나는 산문으로 꿈을 꿀 수 있으므로 글을 쓰면서 그런 여담에 몰두한다. 그리고 상당히 진지한 감정과 매우 정당한 감동은 내가 감각하고 있지 않을 때 나온다.” <p.210 139(293) 1931.3.10.>
“... 예술에서든 인생에서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가 하려고 생각했던 것의 불완전한 복사판일 뿐이다. 그저 외적인 완벽함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완벽함이 부족한 것이다. 부족한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규칙뿐만 아니라 우리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규칙이기도 하다. 우리는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비어 있으며, 미래와 약속에 얽매인 천박한 사람들이다.” <p.223 146(321)>
“나는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해서 이미지를 계단처럼 밟아가면서 내 꿈이 만든 길을 따라간다. 안에 숨어 있는 큰 그림을 보기 위해서 우연한 메타포들을 마치 부채처럼 펼치면서 말이다. 나는 나로부터 인생을 벗겨내어 너무 꼭 끼는 옷인 양 삐딱하게 놓는다. 나는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숨는다. 나는 길을 잃는다. 그리하여 덧없이 흘러가는 시기에 나는 간신히 인생의 맛을 잊을 수 있다. 떠들썩한 소음과 빛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번민에 빠진 폐허로 변한 제국처럼 감각을 따라가면서 불합리하게, 의식적으로 끝을 낼 수가 있다. 그리하여 승리의 북소리가 울려퍼지고 만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마지막 거대 도시 안으로 끝내 입성할 수가 있다. 그곳에서 나는 그 무엇을 위해서도 울지 않을 것이고, 그 무엇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며, 내 자신에게도 존재하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p.233 152(363) 묵시록적인 감상>
페르난두 페소아 / 김효정 역 / 불안의 책 (Livro do Desassossego) / 까치 / 248쪽 / 2012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