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통증은 느껴지는 것이고,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다."
한 의사의 말에서 시작된 이 문장은 우리 삶에서 '아픔'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복합적인지를 되묻게 한다.
통증과 고통은 모두 아픔을 의미하지만, 그 본질은 사뭇 다르다. 우리는 종종 이 둘을 혼용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감각과 존재, 신체와 정신, 측정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라는 간극이 존재한다.
첫째, 통증은 수치화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은 아니다.
의학적으로 통증(pain)은 "조직의 손상 혹은 그 가능성에 대한 불쾌한 감각과 정서적 경험"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비교적 명확한 생리적 반응이다.
실제 병원에서는 통증을 수치로 표현하게 한다. "0에서 10까지 얼마나 아프십니까?"라는 질문은 통증을 가늠하고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다.
진통제나 시술, 물리치료 등은 이런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과학적 접근이다. 반면 고통(suffering)은 통증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다.
고통은 단순히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삶의 의미가 흔들릴 때 발생한다. 질병을 진단받았을 때, 이별을 겪었을 때, 혹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살아갈 때 사람들은 고통을 느낀다.
이 고통은 몸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경험된다. 즉, 고통은 신체적 정상 이상의 것이며, 정신적• 사회적• 철학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작동하는 절댓값이다.
둘째, 고통의 절댓값, 비교 불가능한 감정의 무게
수학에서 절댓값은 "그 수의 크기"를 의미한다. 방향과 무관하게 어떤 수의 본질적 크기를 말하는 개념이다. 고통도 그렇다.
겉보기 상황이나 원인의 경중과 무관하게, 고통은 "그 사람에게 절대적인 감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감히 판단할 수 없다.
예컨대, 누군가의 실직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의 이별은 생의 이유를 상실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고통도 사소하지 않다.
우리가 종종 내뱉는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일이야"라는 말은 고통의 절댓값을 간과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고통에는 '정답'도 '단계'도 없다. 오직 경험만 존재할 뿐이다.
셋째, 사회가 만들어내는 고통의 층위
우리는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 구조 속에서 형성되는 고통도 주목해야 한다. 빈곤, 차별, 혐오, 고립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고통의 조건이다.
예를 들어,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 이민 1세대로 차별을 겪는 노동자, 입시 실패로 자기 가치를 의심하는 청소년은 모두 외롭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들의 고통은 시스템의 문제로 가려지기 일쑤다. 통계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분명히 "아프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단지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윤리적 감수성과 성숙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넷째,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참아라", "견뎌라"는 서사를 미덕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고통을 침묵시키는 문화는 결국 병든 사회를 만든다.
진짜 성숙한 공동체는 고통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들어주는 귀"를 갖춘 사회다. 누구나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있고, 그 말이 조롱받지 않으며,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다.
최근 정신건강, 심리상담, 트라우마 치유 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고통을 드러내는 것을 '약함'이나 '불편함'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우리는 이제 "괜찮아?"라는 질문을 일상적으로 던지는 시대를 넘어, "말해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나눌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그 존재만으로도 치유를 시작할 수 있다.
다섯째, 고통을 감싸 안는 사회를 위하여
고통은 인간다움의 증거다. 느끼는 존재, 기억하는 존재, 의미를 찾는 존재로서 인간은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은 인간을 성장시키기도 한다.
이 고통을 고립된 채 경험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공감 속에서 함께 이겨낼 수 있는가가 바로 사회의 품격을 결정한다.
통증은 진통제로 가라앉힐 수 있지만, 고통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 공감의 시선, 안전한 공간에서 비로소 사라진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고통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부터 공존은 시작된다.
이제 묻지 말자. "그 정도로 힘들었어?" 대신, 이렇게 말하자. "그랬구나, 많이 아팠겠구나"
통증은 상대적이지만 고통은 절대적이다. 의학계나 철학계에서 수없이 반복된 이 말은 인간의 경험이 얼마나 주관적인지, 또 그 주관성 속에서도 어떤 고통은 결코 비교나 측량이 불가능한 절댓값으로 다가온다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는 점을 참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