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곧 길이다

오늘, 다시 붙는 '양명학'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 문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본래 하나라는 선언, 이것이 양명학의 출발점이다.


16세기 명나라 사상과 '왕양명'이 제창한 이 사상은, 책 속의 도덕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을 바꾸려는 실천 철학이었다.


1, 지식은 행동으로 완성된다(지행합일)


양명학은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지행합일"이다. 우리는 흔히 "선이 무엇을 아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을 분리한다.


하지만 양명학은 말한다. 정말로 안다면,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모르는 상태다.


이 관점은 일상의 자기 합리화를 무너뜨린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나중에 여건이 되면"이라는 말은, 사실상 앎의 책임을 미루는 변명일 수 있다.


양명학에서 앎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과 몸 전체의 자각이다. 그러니 행동은 선택지가 아니라 필연이 된다.


2. 선은 밖에 있지 않다(심즉리)


양명학은 또 하나의 급진적인 명제를 던진다. "심즉리"


마음이 곧 이치라는 말이다. 도덕과 진리는 외부의 규범이나 경전 속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이미 깃들여 있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자칫 주관주의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양명학이 말하는 '마음'은 변덕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공유하는 보편적 도덕감각, 즉 '양지'다.


거짓을 불편해하고, 약자의 고통에 마음의 움직이며, 부당함 앞에서 꺼림칙함을 느끼는 그 감각 -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외면하기 때문이다.


3. 공부란 무엇인가? - 앉아서 외우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것


양명학에서 공부는 시험 준비가 아니다. 공부란 자기 마음을 비추는 일이며, 일상의 선택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양명학의 수양은 특별한 수행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인간관계의 갈등 속에서 바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불의한 이익 앞에서 망설이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가 공부다. 침묵할지, 말할지의 선택에서 마음이 흔들릴 때 - 그 갈림길에서 양지에 기울이는 것, 그것이 곧 수양이다.


4. 왜 지금, 양명학인가?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무엇이 옳은지는 대체로 안다. 건강해야 한다는 것, 정직해야 한다는 것, 관계에서 존중이 중요하다는 것 -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삶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양명학은 이 간극을 정확히 겨냥한다.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실천의 회피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정말로 알고 있는가?" 이 질문은 불편하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각성의 시작이다.


5. 양명학의 위험과 가능성


물론 양명학에는 위험도 있다. "마음이 곧 기준"이라는 말이 자기 합리화로 타락할 가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양명학은 끊임없는 성찰과 검증을 요구한다.


나의 마음이 과연 사사로운 욕망이 아닌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 스스로를 엄격하게 묻지 않으면, 양명학은 방종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양명학은 우리를 타율의 윤리에서 자율의 윤리로 이끌기 때문이다.


명령받아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옳음을 선택하는 인간으로 세운다.


6. 철학은 삶을 바꾸기 위해 존재한다.


양명학은 화려한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단순해서 무섭다.


- 알면 행하라.

- 행하지 않는다면 아직 모르는 것이다.


이 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세상 탓만 할 수 없다. 삶의 방향키는 언제나 내 마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양명학은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오늘, 당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살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는 그 순간, 양명학은 이미 현재진행형의 철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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