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엄마를 만난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혈족인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언니, 누나, 오빠 순을 거치며 점차 외곽으로 만남의 폭을 넓혀가게 된다.
하지만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을 전제한다. 단지 시간차가 있을 뿐 어떤 만남이건 헤어짐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어짐의 안타까움을 상쇄하는 의미로 '회자정리' 용어가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선현들은 일찍이 만남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해가 되는 만남. 스쳐 지나는 일상적 만남, 운명적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는 "해가 되는 만남"인데, 이것은 욕심 때문에 정도를 벗어난 만남을 의미한다. 이 만남은 가급적이면 빨리 정리해야 해를 덜 입는다. 오죽하면 '과유불급'이란 격언이 생겼을까 싶다.
두 번째는 "스쳐 지나는 일상적 만남"인데, 이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좋은 만남으로 바뀔 수 있는 만남이다. 하지만 별생각 없이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면 기회비용만 유발하게 되는 만남이다.
셋째는 "운명적 만남"인데, 내가 선택하지 않은 필연적 만남이다. 대표적으로 부모, 자식이 운명적 만남이다. 혹자는 배우자를 운명적 만남 범주에 넣기도 하는데 조금 헷갈린다.
부모와 자식이 운명적 만남이라는 데 별 이견이 없지만 배우자는 나의 선택이 포함되기에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배우자는 분명 내게 '던져진' 만남이지만, 이것을 긍정하고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운명적 만남 범주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성숙한 만남을 위해 노력할 때 성숙한 인격이 형성되고, 그런 사람이 신의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또한 만남에는 사람 만남만 있는 게 아니다. 자연 만남, 지식 만남 등이 있다.
명리학에서는 만남을 악연과 선연으로 구분해 설명하면서 불같은 사랑을 악연으로 구분 짓고,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러면서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선연으로 구분하는 것 같은 데 정말 그럴까? 공부 부족 때문인지 아직은 조금 낯설다.
만남이 우연 또는 필연이건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을 꼽는다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요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부딪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네 탓하기 앞서 내 탓 먼저,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는 배려의 마음을 실행한다면 단지 스치는 인연조차 선연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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