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 물러 섰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1장 추억의 창고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무더위 속 여름나기 ──

어린 시절, 무더운 여름에 시골에서의 생활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전기가 없어서 선풍기나 에어컨을 사용할 수 없어 더욱 크게 무더위를 느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시골 사람들은 창의적인 방법으로 더위를 이겨내고 더위를 식히기 위한 여러 방법을 구상하고 개발했던 것 같다. 그중 하나가 농사용으로 쓰고 남은 비료 부대를 활용해서 만든 부채는 자원의 한정성과 창의력을 발휘한 기발한 재활용품이었다. 사람들은 농사용으로 비료를 담아 사용하고 남은 빈 비닐봉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부채를 만들어서 그것을 부치면서 더위를 이겨냈다. 5일장이 서던 강경읍내에 가면 당연히 부채를 살 수 있었지만 대부분 농가에서 비료 부대 비닐로 부채를 많이 만들어 사용했던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등목하고 냇가에서 물놀이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또한, 저녁이 되면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 대부분이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마을 초입에 있는 다리에 모여 더위를 식혔다. 이렇게 함께 모여 더위를 식히면서 무더운 여름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을 사람들과의 결속이 돈독해지고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었다.


시골에서의 무더운 여름나기는 매우 힘들었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 가며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소통하며 생활했던 것 같다. 이 같은 행위를 통해 사회적인 결속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견디기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에는 어렵고 힘들었던 것들도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가끔씩 소환해 보는 즐거움을 안겨 주고 있다.

마을에 전깃불 켜지던 날 ──

소년이 살던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라는 것이 들어왔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온통 기쁨과 즐거움에 장구, 꽹과리, 북과 징을 치면서 환호했다. 등잔불에 의지하던 시골에서 갑자기 전깃불이 켜진다는 것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문명과 현대화의 산물인 전깃불이 켜지는 걸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닐까 싶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마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각 가정에서는 지하수를 뚫고 펌프를 설치함으로써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나르던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환하게 전등불을 밝힐 수 있어서 밤에도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어두운 밤 활동이 원활해지고, 공부나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가전제품이 등장하면서 생활이 더욱 편리해졌고 가정의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전기를 이용해 점차 선풍기, 세탁기, 냉장고 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시골은 나날이 편리함이 증대되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자 농업과 생산 분야에서도 큰 변화가 생겼다. 전기를 이용하여 농작업이나 공장 생산이 원활해지면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기계를 동력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작업 시간과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경제적인 발전과 일자리 창출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시골 마을에 처음으로 전깃불이 켜졌을 때, 마을 사람들의 신나고 기쁨에 차 있는 모습을 봤던 기억이 새롭다. 어떤 것이든 새로운 문명은 사람들을 설레게 하고 또 그것을 활용해서 생산성을 높이는 등 삶의 질이 많이 개선되지 않을까 싶다. 요즘에는 드론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만일 100년 전 우리 마을에 사셨던 조상이 잠에서 깨어나신다면 지금의 발전된 광경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자못 궁금해진다.


‘서리’의 짜릿함 ──

수박 등 과일을 주인 몰래 훔치는 서리는 어린 시절의 짜릿한 모험과 긴장감을 떠올리게 하는 낭만적인 경험이었다. 지금은 물론 당연히 금지된 놀이지만, 먹거리가 부족했던 당시에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쯤이라 여기고 서리를 암묵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러했던 어린 시절의 ‘서리’ 경험은 매우 스릴 있는 모험이었고 지금까지도 즐거운 기억으로 떠오른다.


어린 시절에는 규칙과 규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금지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쾌감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중 하나가 여름철이면 항상 약방의 감초 같은 참외 서리, 수박 서리 등이 아니었나 싶다. 형들을 따라 먼 거리에 있는 복숭아 농장에 침입해서 복숭아 서리를 시도하기도 했다. 컴컴한 밤, 과수원 주인이 원두막에서 과일을 지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몰래몰래 훔쳤던 재미는 금지된 행위라는 경계를 넘어 자유로움마저 느끼게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간혹 수박 농사를 짓는 집 아들이 자기네 밭 수박을 서리하는 것을 아버지 몰래 돕기도 했는데, 그것은 서리가 도둑질이라는 개념보다는 하나의 유희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수박 서리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활동으로, 함께 계획을 세우고 모험을 감행하는 것에서 협력과 도전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였다. 친구들과 함께 주인을 피해 낮은 포복으로 숨죽이면서 수박을 훔치는 과정은 반드시 서로의 신뢰와 협동이 필요하며, 이러한 경험은 친구들과의 결속을 강화하고 우정을 굳게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수박 서리는 주인한테 들키지 않게 조용하고 은밀하게 행동해야 했으므로 긴장감을 주고 짜릿한 스릴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긴장감은 어린 시절의 모험심과 흥분을 자극하고, 서리에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과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수박 서리는 간혹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야밤에 출장을 가기도 하는데, 이때는 대열에 끼고 싶어 대장 형한테 아부하기도 한다.


소년이 체험했던 수박(참외) 서리 요령 중 하나는 이러하였다. 힘이 약한 아이들이 수박을 여러 개를 훔쳐서 도망가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농사용으로 개설해 놓은 농수로를 흐르는 개울물에 서리한 수박과 참외를 던져 놓으면 개울 하류에 있던 친구들이 그것을 건져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훔친 과일을 흐르는 물에 던져 놓고 하류 쪽 아이들에게 언제쯤 도착할지를 계산하는 것도 서리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쏠쏠한 재미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다른 서리 중 하나인 ‘보리 서리’가 있었는데, 아직 덜 여문 남의 밭 보리를 낫으로 베어 모닥불에 구운 다음 손으로 비벼 껍질을 까먹는 것이었다. 모닥불에 구운 보리를 손으로 비벼서 까먹고 나면 손바닥은 물론이고 온 얼굴이 숯검댕이를 바른 것처럼 온통 시꺼멓게 되었다. 친구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대다가 근처 냇가로 달려가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물놀이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처럼 서리의 낭만은 어린 시절의 용기와 자유로움, 금지된 경계를 넘어선 모험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나 싶다. 이 경험은 추억 속에서 지금도 특별하고 감회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소중한 순간으로 남아있다.

겨울밤의 사색 ──

한적한 시골의 겨울밤, 가을 추수가 끝난 들판 위에 환한 보름달이 비치는 정경은 처량하면서도 아름다운 조명이 되어 어린 소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소년은 야심한 밤에 혼자 들판을 걷고 사색하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겨울밤 시골의 들녘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추수를 끝낸 뒤의 고요하고 서정적인 풍경으로, 무더위 속에서 수고로운 노동 끝에 얻어진 보상을 상징한다. 소년은 이런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의 미래를 꿈꾸며 설계하였다. 밝은 달과 총총한 별들을 머리에 이고 고즈넉한 밤 들판을 걸으면서 머릿속에 미래의 꿈과 목표를 그려보는 것이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환한 달빛 아래 아무도 없는 휑한 시골 들판 길을 혼자 걸으며 사색하던 어린 시절 시골 소년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당시 소년의 모습은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없이 어둠이 내려온 들판을 걸으며 고요한 자연 속에서 자신의 가치와 역량을 찾으면서, 미래를 향한 염원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주변의 조용한 소리와 풍경에 집중하면서, 내면의 소리와 소망에 귀 기울이고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이러한 고요한 순간들이 소년에게 자기 발견과 자아 성찰을 가능하게 하고, 내면의 목표와 비전을 명확히 하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환한 보름달 아래서 들판을 산책하는 소년은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상징하기도 한다. 소년은 그러한 사색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꿈과 목표를 더욱 명확히 그리고 계획할 수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열망과 열정에 따라 새로운 길을 찾아가고, 또 어둠 속에서 빛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어린 시골 소년이 겨울 들판을 사색하면서 세상을 전부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꿈과 희망 그리고 열정을 만들어 가지 않았나 회상된다.


이런 청순한 소년의 모습이 꿈을 안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에게 열망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버지와의 추억 ──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은 많은 사람에게 매우 특별하고 소중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는 가족 구성원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자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존재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한 순간들은 우리 삶에서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로 오래 기억될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자녀의 성장과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한 순간들은 놀이, 가족 여행, 학교 행사, 가정에서의 활동 등 다양한 경험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버지와의 게임이나 놀이는 자녀에게 즐거움과 행복감을 주며, 함께 하는 가족 활동은 서로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촉매제이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는 자녀에게 지식과 가치관을 전달하고, 긍정적인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자녀의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자녀에게 안정감과 자신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힘이 되어주고, 어려운 순간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며,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은 자녀에게 자신감과 안정감을 심어준다. 아버지는 자녀를 지지하고 돌봐주는 보호자이며, 아버지와의 그러한 관계 경험은 자녀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평생 그리움과 사랑으로 기억되게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은 자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도약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아버지의 가르침과 격려는 자녀에게 자신감과 성공을 키워주며, 함께 보내는 시간은 가족과의 연결과 애정을 강화한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성장과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고, 자녀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기도 한다.


소년이 성장하던 당시 시골 형편은 지금과는 달리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고 자식을 많이 낳아 먹고 사는 것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의 교육열 또한 높지 않았고, 대부분 농사를 짓다 보니 일손이 부족하여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귀가하기가 무섭게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를 도와 논밭에서 일하는 게 일상화되었다.


학교에서도 4학년만 되면 중학교에 진학할 학생과 하지 않을 학생을 구분하여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을 학생들은 부모님 일손을 돕도록 오전 수업만 하고 귀가할 수 있도록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년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중학교 시험을 준비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농촌은 새벽 시간이 무척 바쁜 것 같다. 어둠이 가시기 전에 농부들은 벼가 잘 자라는지 자신의 논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소년의 아버지께서 논을 둘러보고 대문에 들어서는 시간은 대략 오전 5시쯤으로 기억된다. 아버지께서 대문에 들어서면서 내는 헛기침 소리는 소년한테는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억지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야 하는 그 시간이 당시에는 죽도록 고통스러웠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철이 없이 아버지가 안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을까?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서 오전 5시면 어김없이 기상하는 게 습관이 되었고, 아버지로 인해 들인 억지 습관이 부지런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어서 지금은 감사하다는 마음이 든다.

소년의 중학 입학시험 합격자 발표 날, 아버지께서 나보다 먼저 학교에 도착해서 아들의 수험번호를 확인하고 무척 기뻐하셨다. 친구들과 늦게 학교에 도착해서 내가 수험번호를 확인도 하기 전에 먼저 달려오셔서 합격 소식을 전해주시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특히 480명 합격자 중 우수 합격생 명단에 별도로 기재되어 있는 아들 이름을 보면서 기쁨이 더하셨을 것 같다. 그런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나이 어린 자식이 부모에게 해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해드린 거 같아서 마음이 뿌듯하였다.

아버지와의 이런저런 좋은 추억은 자녀에게 평생 소중하게 간직된다. 그 추억은 자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소중한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그때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떠올리는 것은 자녀로서의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호기심 많던 중학생 ──

소년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수학 시간이 되었다. 수학 선생님이 입학시험에서 수학 100점을 맞은 학생이라면서 소년을 호명하셨다. 그러면서 앞으로 이 반 수학은 소년이 가르치면 되겠다는 농담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실제로 소년이 우리 반 수학 수업 시간에 간혹 선생님 대역을 하게 되면서 소년은 시내 학원에서 2학년 수학 선행 공부를 하게 된다. 2학년 선배들로부터 부러움의 눈길을 받으면서 학원을 꽤 오랫동안 다녔다.

선생님은 소년에게 학업이 부진한 학생들을 방과 후 별도로 남겨 소년으로 하여금 지도하라고 하셨다. 소년에게 수학 과외를 받았던 동급생들이 선생님한테 빵을 가져다드린다고 해놓고 간혹 소년에게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친구들이 별 스스럼없이 소년한테서 수학 과외를 받은 걸 보면 무척 천진난만했던 것 같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들이 당시에는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 한편으로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 선생님 대신 친구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원에서 선행 학습을 하면서 소년은 개인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년은 중학교에 다닐 때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무척 개구쟁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쩌면 중학 시절은 말썽꾸러기의 시기 같다고 본다. 오죽하면 북한의 김정일이 가장 무서운 게 대한민국의 군인이 아니라 중2(중학교 2학년)라고 하겠는가 싶다. 이때 학생들은 사고의 천방지축으로 마치 럭비공 같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당시 미술 선생님 얼굴색이 하얀 도화지 같아서 삶은 돼지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다가 친구들과 교무실에 잡혀가서 무릎 꿇고 반성했던 기억이 있다. 별생각 없이 장난치다가 혼 나는 일들이 중학교 때는 다반사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다가 학년이 높아지면서 점차 철들고 성장하지 않을까 싶다.


태권도를 배우다 ──

소년은 집에서 중학교까지 6km 정도 거리를 걸어 다녔다. 소년을 비롯한 학생들은 매일 아침 일찍 집에서 출발해서 1시간 넘게 걸어야 했다. 등교 시간이 되면 마을에서 학교까지 이어진 제방길은 마치 학생들이 행진하는 듯했다. 그리고 당시 중고등학생들은 스님들 삭발하듯이 까까머리를 하고 다녔다. 매일 아침 교문에서 규율부원들이 복장 점검을 했는데 특히 머리 길이가 길면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머리는 항상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3월 중순쯤 친구와 같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배라고 칭하는 사람(2명)한테 단지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한참을 폭행한 후 그 선배라는 사람들은“내일 오전 2학년 우리 교실로 찾아와라”라고 말한 후 풀어주었다. 친구와 나는 맞아서 아픈 것보다 다음 날 학교에 불려갈 일이 더 걱정되었다. 집에 도착해서 어머니로부터 걱정과 간호를 받았으며, 다음날 2학년 교실에 찾아갔으나 그 사람들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에 다니지 않는, 그냥 동네 깡패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이유 없이 폭행당한 일이 억울하여 반드시 복수하고 싶었다. 어머니께 사정을 해서 모진 각오로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상당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마침 학교에서 태권도부가 신설되어 소년은 태권도부장에 임명되었다. 소년은 특별활동 시간에 태권도반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날 친구들과 같이 하교하던 길에 중학교 1학년 때 우리를 구타했던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런 때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지 흥분으로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였다. 주변 친구들은 이미 소년으로부터 폭행 사건에 대해 여러 번 얘기를 들은 바가 있어서 금방 상황을 눈치챘다.


소년은 친구들한테 책가방을 맡기고 그 깡패들한테 갑자기 달려들었다. 무작정 주먹질과 발길질로 태권도 유단자의 실력을 맘껏 발휘해서 흠뻑 두들겨 팬 후 줄행랑을 쳤다. 한참 후, 친구들과 다시 합류한 우리는 한바탕 웃으면서 지난날에 대한 복수의 희열을 맛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당시에는 영웅심으로 자부심마저 있었는데 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철없는 행동 아니었나 반추해 본다.


초등학교 동창회 ──

초등학교 동창회는 졸업한 학교의 동기들이 모여서 추억을 회상하고 소통하는 특별한 자리로 언제나 즐겁지 않을까 싶다. 동창회는 과거에 함께 보낸 소중한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며, 오랜 친구들과의 재회를 의미한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은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며, 그때의 추억들은 삶에서 가장 순수하고 소중한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된다. 그래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회보다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초등학교 시절은 처음으로 동료들과 함께 배움과 놀이를 나눌 수 있는 보람찬 시기였다. 함께 수업을 듣고 공부하며 두근거리는 첫사랑이 시작되기도 하고, 또 친구들과의 유대감과 우정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한때 소년이 초등학교 시절, 이웃 동네에 살고 있던 어떤 소녀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어서 그 동네 주변을 얼쩡거렸던 기억이 있다. 괜히 그 동네 사는 친구를 찾아가고 그 소녀 집 앞을 서성대면서 마음 설렜던 추억이 새롭다. 이렇게 초등학교 시절은 우리가 사회적인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언급했듯이 동창회는 초등학교 시절의 동기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만나는 행사이다. 이는 그동안 멀어져 있었던 동기들이 다시 만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고, 서로의 소식을 나누며 현재의 삶을 공유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동창회에서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감동적인 재회와 이야기, 공동체 의식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 졸업한 학교와 그곳에서의 추억에 대한 애정과 연결고리를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동창회는 이전의 연결고리를 다시 강화하고,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공유함으로써 친구들과의 연결을 이어가는 역할을 하게도 해준다. 동창회는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해주기도 하며, 삶의 다양한 경험을 나누고 소중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초등학교 동창회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소중한 연결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들과의 귀중한 시간을 통해 자신의 인생 경로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과거의 기억을 재활용하고 공유함으로써 자아 정체성을 강화하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삶의 지속적인 의미를 찾는 과정에 크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기억나는 재미있는 추억 하나를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내 본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우리가 공부했던 초등학교 교실에서 친구들과 처음으로 하는 동창회에 참석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일찍이 장사를 시작한 친구, 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 중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공장에 갓 취업한 친구,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구 등 우리는 이미 다양한 형태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우리는 근처 포도 농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에 만나 수다 삼매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간을 보내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하려는 데 친구 중 한 명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소위 동네 깡패한테 얻어맞고 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친구들 여러 명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대항하였다. 깡패가 우리 친구 중 한 명을 꽉 끼어 안고 있는 바람에 친구랑 같이 많이 맞았던 것 같다. 그러다 깡패 중 한 명이 도망가는 바람에 생각보다 쉽게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각자 집을 향해 가고 있는데 뒤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깡패 한 명이 초죽음 상태가 되어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었다. 우리는 경찰 호송차에 탑승해 근처 지서(요즘 파출소)에 가서 심문을 받았다.


당시 동창회에 참석했던 친구들이 남자 15명, 여자 16명으로 기억되는데 우리는 아직 어린 학생들이고 단체로 깡패와 싸움했다고 하면 처벌이 가벼울 것 같으니 그렇게 하자고 소년이 제안해서 친구들 전원이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 그런데, 친구 하나가 자기는 전혀 싸움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자, 경찰이 싸움에 가담한 자와 아닌 자를 구분해서 아닌 자는 훈방 조치하고 가담한 자는 지서에 남아 날이 밝으면 본서(경찰서)에서 다시 조사받는 것으로 결정했다. 저녁밥을 굶은 상태라 우리는 몹시 배고픈 상태로 아침을 맞이했는데, 근처에 거주하시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라면을 끓여서 커다란 양동이에 담아 오셨다.


태어나 세상에서 처음으로 가장 맛있었던 라면으로 지금도 기억된다. 양이 많아서 꿀꿀이 죽 같았지만,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용어 아닐까? 당시 호의를 베풀어주신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훈방된 친구들이 각자 마을로 돌아가서 우리가 경찰서에 잡혀 있다고 하는 바람에 소년의 아버지 등 많은 어른이 이른 새벽에 지서로 찾아와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 마련을 하신 것 같았다. 소년의 친척이 당시 검찰청 고위 검사로 재직하고 계셔서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면 어린 학생들이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다음 날 우리를 훈방 조치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됐다. 동네에 돌아오니 소년이 깡패들과 싸워서 감방에 갔다 왔다는 소문이 한동안 마을에 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래저래 초등학교 동창회는 환갑이 넘은 지금도 항상 설레고 기다려지지 않나 싶다.

암자에서 살아보기 ──

명산이라 불리는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846.5m), 연천봉(739m), 삼불봉(775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 볏을 쓴 용의 모양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동학사와 갑사, 그리고 신원사를 품고 있다.


동학사에서 갑사를 향해 길을 재촉하다 보면 중간 지점인 삼불봉 바로 밑에 남매탑을 만나게 된다. 남매탑은 한 스님이 도를 닦다가 호랑이 목에 걸린 비녀를 빼 주자 호랑이가 보답으로 웬 처녀를 산 채로 물어다 주었다. 그런데 스님이 자기는 혼인을 할 수 없다고 하자 처녀가 스님과 남매의 연을 맺어 평생을 함께 살면서 도를 닦았다고 하는 슬픈 전설을 담고 있다. 계룡산은 예전에 “무속인들이 가장 많이 찾던 장소 중 하나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계곡 곳곳에 무속인들이 굿했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지금은 마명암을 비롯해서 많은 암자를 흔적조차 볼 수 없게 되어 씁쓸하다.


마명암은 계룡산 천황봉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만 암자로 대한불교 조계종 신원사 말사였다. 암자 주인은 대처승으로 집과 암자(700m)를 오가면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딸 2명과 아들 1명을 두고 있었다. 한번 오르기도 힘든 암자를 거의 매일 -그것도 짐을 잔뜩 지게에 짊어지고- 오르내린다고 하니 정말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강인한 한국의 아버지였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소년은 친구와 둘이서 고등학교 입시 대비 특별반 시험을 준비하려고 배낭에 책과 쌀(당시에는 사찰에 숙식 비용은 쌀로 지급)을 무겁게 짊어지고 마명암을 향해 출발했다. 난생처음으로 강경이라는 지역을 떠나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공주 ‘하마루’라는 마을 정류장에 내렸다. 거기서 다시 무려 2시간 동안이나 걸어서 신원사 근처 암자 사택에서 주인을 만나 당일에 셋이서 마명암까지 등산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마명암은 동행한 친구가 잘 아는 곳이어서 소년은 그냥 따라가기만 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명암에서 촛불을 켜놓고 매일 18시간(수면 4시간, 휴식 2시간) 동안 공부하는 강행군을 했다. 책상도 없이 절간에서 제공해주는 조그만 밥상 앞에 쭈그려 앉아서 매일 18시간 동안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자정과 새벽 4시에 들려오는 스님의 예불 소리에 맞춰 매일 규칙적으로 잠자고 기상하면서 생활했었다. 암자에서 내려다보이는 산 아래 경치는 정말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공부에 전력 질주하느라 풍경을 즐길 여유가 없었던 게 많이 아쉬운 기억이다. 딱 한번 암자 주인을 따라 주인집 아들과 친구와 함께 ‘신도안’이라는 읍내를 산 굽이굽이 지나서 다녀왔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 외출 아니었나 싶다.


정말 신기한 것은 한 달여간 강행군하듯 공부를 엄청 많이 한 것 같은데, 하산하면서 드는 생각은 그동안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던 것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괜히 공부한 것 아닌가? 후회도 하면서 투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고생 많았다고 하시면서 몸보신해 준다고 닭을 잡아서 밥상을 차리셨는데, 소년은 아직도 머리가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그런데 특별반 시험(국·영·수)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암자에서 공부했던 내용들이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됐다가 자동으로 출력되는 듯하여 극치의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시험에서 전 과목 만점을 얻었다.

고등학교 입시를 마치고 겨울방학이 되자, 한 번 더 공부해볼 욕심으로 눈길에 미끄러져 가며 혼자서 힘겹게 다시 마명암을 찾았다. 그런데 긴장의 끈을 놓아서인지 여름방학 때 와는 책을 대하는 자세가 천양지차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절간에서 틈만 나면 놀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걸 느끼면서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놓지 않으면 노력을 게을리하게 된다는 것을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어떤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설정한 목표를 향해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준비해 가는 사람과,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세워놓은 목표를 미리 설명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둘 다 나름의 특성이 있다고 본다. 전자의 경우 표출하기 싫어하는 성향으로 만일 실패했을 때 주변에서 알지 못하므로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 하지만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칫 느슨해지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 사전에 자신의 목표를 선전했기 때문에 실패했을 때 심리적으로 크게 부담을 느끼게 된다는 걸 안다. 이들은 실패에 대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자신을 더 강하게 채찍질함으로써 목표를 달성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어떤 방식이든 자신의 성향에 맞게 선택해서 활용하면 어떨까 싶다.

나와의 약속 ──

소년은 미래의 자신을 생각하면서 자신과 약속을 하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단계를 나누어 활용했던 적이 있다. 혹시 도움 되지 않을까 싶어 소개해본다.


첫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먼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한다. 명확한 목표를 세우면 더 쉽게 그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실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둘째, 큰 목표를 작은 단계로 나누어 진행한다. 이렇게 하면 더 쉽게 달성 가능한 부분 목표를 설정하고, 단계적으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셋째, 단계별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한다. 계획은 어떤 일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명시하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우면 목표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넷째,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우선순위를 잘 관리해야 한다. 주요한 작업에 집중하고, 일정을 잘 조절하여 목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표를 성취했을 때 어떤 보상을 받을지 생각하고, 주변의 지지와 격려를 받는 것도 좋다. 자기 동기부여 방법은 개인에 따라 다르므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실천하면 된다.

여섯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여 계획에 따라 행동하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목표에 대한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다.

일곱째, 약속을 실천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실패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실패는 배움의 기회이며, 반복적인 실패를 통해 자신의 방법과 전략을 개선할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로부터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단계들을 따르면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꾸준한 노력과 자기 동기부여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필자는 매년 학기 초 첫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향해 10년 후 자신의 목표를 세워 보라고 권유하곤 한다. 그리고 중간 지점인 5년, 5년의 중간 지점인 2.5년 … 이런 식으로 계획을 세우면 지금 내가 곧바로 실행해야 할 일이 도출된다. 그러면서 목표 달성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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