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 물러 섰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2장 삶과 종교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내가 경험한 죽음 ──

소년은 시골에 살면서 아랫집에 살던 친구 아버지 시신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친구와 마당에서 놀고 있다가, 방에서 친구 아버지 시신의 발목을 어떤 끈으로 꽁꽁 묶고 삼베 같은 것으로 온몸을 싸는 것을 먼발치에서 구경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정도로 기억되는 어린 나이임에도 전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무서움보다는 호기심이 많았기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상여가 나가는 날에는 호기심에 상여 뒤를 따라 다녔다.


친구는 소년보다 한 살 어린 나이였는데 자기 아버지의 죽음이 크게 와닿을 나이가 아니어서였는지 슬퍼하기보다 여러 친구와 같이 친구네 집 마당에서 장난치고 숨바꼭질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어른들도 특별하게 제지하는 어떤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 것 같다.


소년이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여름, 육군 소위로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형의 부고 전보를 갑작스럽게 받게 되었다. 청소년기에 형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극도로 힘들고 충격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고통을 이겨내고 일상으로 다시 복귀한다는 게 어린 소년에게는 너무 힘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고통은 반드시 이겨내야만 하는 것이기에 소년뿐만 아니라 누구든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나름의 방법들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첫 번째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녹여내는 것이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 분노, 혼란 등 다양한 감정들이 들끓을 수 있다. 이러한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억압하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슬픔을 울음이나 표현을 통해 해소하고, 분노를 건강한 방식으로 관리하는 등 감정을 적절히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지원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다. 죽음은 혼자서 이겨내기 힘든 상황이다. 따라서 가족, 친구, 선생님, 상담사, 종교 공동체 등에 대한 지원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며, 그들의 지원과 위로를 받는 것은 회복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세 번째는 스스로 돌보기이다. 스스로에 대한 돌봄과 자기관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충격과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힘들어질 수 있다. 충분한 휴식, 영양, 운동 등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자기관리에 신경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자신의 감정과 필요에 따라 스스로한테 허락과 이해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네 번째는 시간과 공간 주기이다. 회복하는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려면 그에 맞는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을 받아들이고, 추억을 추모하며, 슬픔에 대한 정서적인 정리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회복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 상황이 심각하거나 지속적인 고통을 경험하는 경우,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사나 심리치료사 등과의 상담을 통해 더 깊은 치유와 회복을 이룰 수 있다.

주변의 지원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충격과 고통을 이겨내고 점진적인 회복을 이루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년이 고등학교 때 소위에 임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천이라는 군부대지역에서 날아온 큰 형의 갑작스러운 사망 전보를 받고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상당 기간 많은 방황과 번민 속에서 지냈던 경험이 있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는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일찍 체험했던 것 같다.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다. 아울러,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건 모든 생명체의 아픈 현실이자 진리 아닌가 싶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한 우리는 사실 모두 시한부 인생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지인의 딸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부고를 접했다. 이제 22세인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의 상주 역할을 해야 하는 망인의 부모를 보니 세상이 한없이 원망스러워졌다. 눈물을 눌러 참으면서 우리 문상객을 맞이하는 부모의 고통을 어찌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딸아이 담은 관이 뜨거운 화구에 들어갈 때 통곡하면서 실신하였을 것 같은 부모의 고통이 심하게 와닿는다. 아무리 ‘세월은 약’이라고 하면서 위로해 준다고 한들 그런 말들이 부모 귀에 들어오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석가와 예수의 대화”라는 책을 읽다 보면 죽음과 기적에 관한 대화가 나온다. 여기서 자식이 죽은 어머니가 예수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을 행한 것을 거론하면서 석가를 향해 예수가 기적을 행하였던 것처럼“당신도 죽은 내 자식을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여 달라”라고 부르짖으면서 석가한테 매달린다. 그러자 석가는 “나도 그런 기적을 충분히 행할 수 있다. 이 동네 어느 집에 가서든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있으면 거기서 겨자 한 됫박만 얻어오면 내가 당신의 죽은 자식을 살려내 주겠다”라고 말씀하신다. 뛸 듯이 기쁜 어머니가 동네 집마다 다니면서 깨달은 것은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라는 것이다. 그러자 석가는 그것이 바로‘진리’라고 말씀하신다. 소년은 이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소년의 부친은 러시아의 시인이자 작가인 알랙산드라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노트에 적어서 큰소리로 읽으면서 고통을 견뎌내셨다고 들었다. 오죽했으면 끊었던 술과 담배를 다시 하시면서 고통스러워하셨을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항상 건강과 안전에 각별하게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로 인해서 내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운명, 정해지는가 ──

운명에 대한 개념은 오랫동안 다양하게 이해되고 논의되어왔다. 일부 사람들은 운명을 믿으면서 자신의 삶을 거기에 맞게 흘러가도록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자유의지에 의해 삶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철학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가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본다. 아울러 운명의 존재 여부는 개인의 믿음과 신념에 따라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일 운명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리고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발생하는 상황과 결과를 운명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게 대응할 수 있다. 이는 상황을 수용하고 적응하며,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명이 예측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예견된 상황에 대비하여 준비할 수도 있다. 또한, 운명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인생의 변화와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교훈과 성장을 끌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운명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조절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의 목표와 가치를 설정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결정을 내려야 한다. 즉 삶의 주도권을 갖고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 또한 져야 한다.

어떠한 입장을 가지든 즉 운명을 믿건 또는 자유의지를 강조하건, 우리는 삶의 여러 상황에 대처하고 선택을 내리는 데 자유롭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내적인 만족과 성장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운명이나 선택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가지며 상호작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삶을 존중하고 책임지면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향해 관심과 이해를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다 보면 간혹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난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극복해 내기보다는‘사주팔자’ 운운하면서 운명론의 늪에 빠져서 헤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젊은 연인이 불행을 전제로 상대방을 만나는 경우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좋았던 감정이 불만으로 변질되어 티격태격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처음에 안 보이던 단점이 대들보처럼 크게 다가오기 때문 아닐까 싶다.


우리 어머니들이 흔히 내뱉는 “아이고 내 팔자야~”이런 푸념은 상대적 약자, 즉 수동적 위치에 있을 때 하는 하소연이지 요즘 같이 남녀평등 시대에는 사라져야 할 불필요한 문화 아닐까 싶다. 아울러, 남자 혼자 일해서 가족을 부양할 때 사용하던 ‘가장’이라는 단어 또한 맞벌이가 당연시되는 요즘에도 합당한 것인지 한번 따져볼 일이다. 특히 가부장 중심의 문화들이 빠른 속도로 움츠러드는 등 모든 게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경찰서에 갇혀 있는 자식의 석방을 위한 어머니의 지성스러운 기도 덕분에 자식이 풀려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기의 기도가 성취됐다고 무척 기뻐했는데 그만 그 자식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낙담하면서 "참, 하느님도 무심하시다”라면서 푸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운명인 걸까?

언급했듯이 어떤 일을 하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헤쳐 나가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기보다 사주팔자를 앞세우면서 운명론에 빠지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게 과연 옳은 걸까? 생각해 볼 일이다. “어려운 것이니까 내게 기회가 온 거다. 모처럼 찾아온 좋은 기회를 변화의 지렛대로 활용해 보자”라고 하면서 도전하는 배짱이 필요하다고 본다. 고전에 등장하는 아무리 좋은 글귀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 없다고 본다. 특히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운명론 따위에 시간을 허비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다.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라고 주먹 불끈 쥐고 포효하면서 당당하게 운명을 헤쳐나가는 젊은이가 되면 좋겠다. 산마루를 쳐다보면서 달리다 보면 마치 산 정상이 가깝게 있는 것처럼 보이듯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풀려가는 것 아닐까 싶다.

우리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고를 갖고 세상을 대하느냐이다”라고 하면서 자신감을 강조하셨던 법정 스님의 말씀이 새삼 와닿는다. 따라서 마음의 근력을 단련하고 강하게 키워야 한다. 그래야 자신감 있게 거친 세상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종교라고 하는 것 ──

‘종교’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신성과 영적인 차원에 관련된 신앙 체계, 신앙 실천, 의식, 윤리, 도덕적 가르침 등으로 구성된 체계적인 신앙 시스템을 가리키는데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아울러 종교는 인간의 신념 체계, 영적인 경험, 신앙생활, 집단적인 종교 활동, 사회적 교류 등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 예수를 잘 믿는데 또 열심히 사는데 시험만 보면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굉장히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십일조 열심히 했더니 이렇게 부자가 됐어! 그런 말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말 십일조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는데 가난한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또 예수 잘 믿어서 나는 건강합니다!! 이런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잘 믿는데 병든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성경에 보면 바울도 병이 있었듯이 믿음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를 잘 믿기 때문에 돈 잘 벌면서 편안하게 살고 높은 자리 올라가고 하는 등식은 이 세상에서 절대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어느 목사께서 열변을 토하면서 강조하신다.


우리는 종교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으며, 사람들은 흔히 종교와 신의 존재를 연결하려고 한다. 종교는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와 관련된 신앙 체계를 포함하며, 영적인 차원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종교를 통해 신의 존재를 믿고 찾고자 하는 신앙의 실천과 경험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울러 종교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종교는 존재 이유, 삶의 의미, 도덕적 가치, 사회적 규범 등에 대한 지침과 가르침을 제공하여 사람들의 삶을 지도하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신성한 경험과 영적인 성장을 강조한다. 종교적인 의식, 기도, 명상, 예배, 수행 등을 통해 신성한 순간을 경험하고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신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깊은 내면적인 경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집단의 결속력과 사회적인 연결을 하며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여 집단의 정체성과 연대감을 강화하고,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을 수행한다. 또 종교는 사회적인 가치, 도덕적인 원칙, 공동체의 이익 등을 강조하여 사회적인 변화와 공공의 이익을 위한 활동에도 공여할 수 있다. 이처럼 종교에 대한 생각은 개인의 신념, 문화적 배경, 교육 수준, 개인적인 경험 등에 따라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은 종교가 다양성과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울러, 종교와 신화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간혹 혼동하기도 한다. 이 둘은 문화와 인간의 신념 체계와 관련이 있지만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종교는 인간의 정체성, 존재의 목적, 도덕적 가치, 삶의 의미 등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려는 신념 체계이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하나 이상의 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믿음, 신성한 존재나 개념에 대한 예배나 섬김, 도덕적 가르침 등을 포함하고 종종 신앙의 실천과 의식적인 요소를 포함하며, 신자들 간의 공동체와 종교적인 교리와 규칙에 따르는 사회적 조직도 포함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신화는 특정 종교나 문화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나 전설로서, 종종 초자연적인 존재나 현상, 인간의 기원, 세계의 탄생 등을 다루고 있다. 신화는 종교적인 텍스트나 구약 성서와 같은 종교적인 문서 형태로 전달될 수도 있지만, 말씀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신화는 종종 비현실적인 요소나 상상력을 포함하며, 종교적인 믿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을 수 있다. 신화는 종교적인 신념 체계의 일부로 작용할 수도 있으며, 종교의 기원과 역사, 종교의 중요 인물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 종교적인 가르침을 전달하기도 한다.


요약하자면, 종교는 인간의 신념 체계와 의식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며, 신들이나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믿음, 예배, 도덕적 가르침 등을 포함한다. 반면에 신화는 종교나 문화에서 전달되는 이야기나 전설로서, 종교적인 믿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종교와 신화는 종종 관련이 있지만, 신화는 종교의 한 부분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종교적인 신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성서학자 간에 “예수가 신화적인 인물인가?”를 놓고 토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신라 시대 고승인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이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나선 어머니가 한 달간을 소요산 아래서 기다렸는데, 원효가 내려와서 기껏 한다는 말이 “나는 소요산 산신령이 됐다”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가혹하게 내치는 걸 보고 대체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해 심한 홍역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불교에 귀의하려 했으나, 자신의 가족조차 외면하는 아버지의 냉정한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보던 책들을 전부 태워 버리고 자신은 불교를 멀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두’ 문자를 후세들이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설총의 주장처럼 “종교, 대체 무엇일까”하고 생각해 본다. 어쨌든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인간의 믿음 엔진 때문에 종교가 절대로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사주에 기대는 심리 ──


관상과 사주는 전통적인 예술 같은 분야로 얼굴의 형태, 특징, 주름, 주근깨 등을 통해 개인의 성격, 운명, 미래를 유추하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관상은 얼굴의 형태, 특징, 선들을 통해 개인의 성격, 운명, 미래를 유추하는 예술이다. 얼굴의 각 부분이나 선들의 형태, 위치, 크기, 색상 등을 분석하여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개인의 성격이나 운명을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관상은 주관적이고 해석의 폭이 넓어서 정확도를 보장하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반면에 사주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사용되는 운명론적인 요소로, 생년월일, 시간 등을 기반으로 개인의 운명과 미래를 해석한다. 사주는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천간(연도), 지지(월), 간지(일), 성별(시간)을 파악하여 각각의 천지 간지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조합해서 개인의 운명과 성격을 분석한다. 사주 역시 주관적인 해석과 믿음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확도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라는 걸 전제하고 싶다.


사람들이 사주에 기대는 심리를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게 많다. 젊은 연인이 탑골 공원을 거닐다가 또는 거리를 배회하다 사주, 관상 등 문구가 적혀있는 천막을 발견하면 재미 삼아 들어가곤 한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자신과 친구의 미래를 재미로 점친다고 이야기해 놓고 정작 점을 치기 시작하면 긴장하면서 어떤 점괘가 나올지 몹시 궁금해한다. 이것은 개인의 운명과 성향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느낌을 얻기 위해 사주와 관상 보는 집을 찾는 것 같다. 사주를 보면서 자신의 성격이나 행운, 미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아의식과 정체성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어려움이나 어떤 난관에 직면했을 때, 긍정적인 사주 결과나 좋은 관상 해석은 희망을 주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사주와 관상은 선택과 결정을 돕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자신의 사주나 관상을 통해 인생의 방향성을 찾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주와 관상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데, 요즈음 인터넷을 이용한 사주카페가 성행하고 있음이 증거 아닐까 싶다. 이처럼 사주와 관상이 개인의 운명과 행운에 대한 호기심과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과학적으로 입증되거나 정확성을 가진 방법론은 아니며, 개인의 주관적인 해석과 믿음에 의존하는 측면도 있다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어렸을 때 시골에 흔히 있던 서낭당 옆을 지나면서 돌무더기에 돌을 던졌던 적이 있다. 그냥 지나쳐도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데 다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자기도 그냥 따라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어떤 신앙적 개념으로 해석할 것인지는 별개 문제 아닐까 싶다. 어쩌면 별생각 없이 그냥 전해오는 풍습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행한 행위라고 본다. 그런데 마을 길이 포장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서낭당 돌무더기가 사라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아무 상관하지 않고 그 길을 지금도 그냥 지나가고 있다. 이렇듯 사주도 내가 어떤 사고를 갖고 생활하는가에 따라 여러 관점으로 생각되게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어떤 요행을 바라는 기대심리로 사주를 본다면 그것은 별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 것 같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젊은 시절에 거주하던 빌라 아랫집에 점을 치던 할머니 한 분이 살았다. 그분은 자신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등 경제인과 유명 정치인들의 사주(점)를 봐 준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이 수시로 자기를 찾아온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은 둔갑술이라는 걸 활용해서 점을 치는데 조상이 그렇게 하라며 점지해 주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년에게는 호랑이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고 하신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호랑이 사주에 대해 재미 삼아 적어 보기로 한다.


호랑이 사주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무당 문화와 사주 점술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호랑이는 동물 중에서도 특히 강하고 빠르며 위력 있는 존재로 간주 된다. 따라서 호랑이 사주는 일반적으로 강인하고 자신감이 있으며, 도전적인 성향을 나타낸다고 본다. 호랑이 사주를 가진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는 성향이 짙다.


첫 번째는 강한 의지와 리더십을 갖고 있다. 호랑이는 동물의 왕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 호랑이 사주를 가진 사람도 이에 비유되어 자신의 의지력과 리더십이 강조된다.

두 번째는 독립성과 자유로움이다. 호랑이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동물로 알려져 있다. 호랑이 사주를 가진 사람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고와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는 모험과 도전 정신이 강하다. 호랑이는 무서우면서도 모험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호랑이 사주를 가진 사람은 도전에 대한 용기와 모험심을 가질 수 있으며, 새로운 경험과 도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특성이 있다.


중요한 점은 사주 점술이 주관적인 해석과 신뢰를 기반으로 하므로 호랑이 사주를 가진 사람마다 각각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사주는 개인의 운명과 성격에 대한 힌트를 일부 제공할 수 있지만, 실제로 사람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제공할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점술과 사주에 대한 믿음은 개인의 신앙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므로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결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점집을 이용할 때에는 항상 비판적인 사고로 판단과 결정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마음의 근력을 건강하게 단련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관상과 사주는 엔터테인먼트, 문화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에게 흥미를 제공하거나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사용되는 도구로 이해되면 어떨까 싶다. 소년이 호랑이 사주를 갖고 태어났다고 이야기를 하시던 소년이 살던 아래층 점집 할머니 말씀이 문득 생각난다.

신, 과연 있을까 ──

신의 존재 여부는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주제였다고 본다. 철학자들은 다양한 주장과 관점을 제시하며 이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토론을 벌여왔다. 신과 관련해서 대표적인 철학적인 입장 몇 가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신은 존재하는 영적인 존재로서 우주와 인간의 존재를 창조하고 지배한다고 여긴다. 이러한 신앙적 신념은 종교적인 경험, 신앙의 깊은 내적 경험, 종교적 교리와 신앙 체계에 근거한다.


둘째, 일부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입장을 갖는다. 이들은 인간의 지성과 경험, 과학적 발전, 비신화된 이론들에 근거하여 신의 존재를 거부한다. 또 이들은 종교적 신념이 실증적인 증거 없이 있다고 주장하며,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셋째, 다른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과 불확실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즉 이들은 신의 존재를 확증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문제로 여긴다. 그러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취한다.


넷째, 일부 철학자들은 신의 개념과 존재에 대한 논의에 집중한다. 이들은 신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하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탐구한다. 이러한 논의는 종종 신의 속성, 특징, 신적인 존재의 가능성 등을 다루며, 개념적인 수준에서 신의 존재를 탐구한다.

이처럼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고 있으며,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중요한 점은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개인의 신념, 철학적인 입장, 종교적인 경험 등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결론은 항상 상대적이며, 개인의 신념과 철학적인 탐구에 따라 형성된다고 본다.


한국 불교계의 어른이라고 하는 향봉 스님이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필요에 의해서 섬겨지는 존재이며, 또 필요하지 않으면 버려진다”라고 말씀하신다. 한 예로 조왕신(부엌), 측간 신(화장실) 등을 만들어 놓았는데, 요즘은 전기밥솥을 이용해 밥을 짓고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므로 그런 신들이 굳이 필요 없게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제 종교는 서서히 소멸해 가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성직자가 자비심으로 출가했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출가해 놓고 부처를 앞세우거나 마치 하나님의 사도 역할을 하기 위한 것처럼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사회의 탈 종교화 현상이 심화 되고 있다고 한다. 20대 청년의 78%는 나는 종교가 없다, 22%만이 종교가 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유럽에서 기독교 시대는 끝나가는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남아도는 교회는 매각하기 바쁘고, 교회 건물은 나이트클럽, 레스토랑, 호텔, 이슬람 사원으로 바쁘게 팔려나가고 있다. 이것이 유럽 교회의 쇠퇴 현상 아니고 뭘까 싶다. 만일 신이 있다는 믿음이 강하다면 과연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궁금해진다.


우리가 이렇게 신의 존재에 대해 논쟁하는 걸 비웃기라도 하듯 요즘에는 Metaverse가 등장하면서 “탈종교시대가 꽤 앞당겨질 것 같다”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과학이 종교를 이겨가는 시대라는 것 다름 아니다. 그래서인지 법륜 스님이 올해부터는 오프라인 강의를 지양하고, 온라인 강의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시대는 이렇게 급하게 바뀌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기업이 Metaverse를 활용한 추모공원 조성, 자신의 아바타를 활용한 예배, 참배 등을 위한 콘텐츠 개발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캐나다 등 선진 외국에서 일요일에 예배 공간을 종교 간에 서로 시간을 나눠서 활용하는 건 이미 오래된 일이다. 이것은 종교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고 있다는 증거 다름 아니다. 거기에 교회에도 나오지 않게 되자 야외로 신자들을 찾아가는 맞춤형 교회가 등장했다는 소식 또한 오래된 일이다. 이런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다 보니 종교학자들이 '탈종교시대'를 걱정하며 적절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고 있지 않나 싶다. 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들을 고려할 때 우리가 전통문화를 전승하고 아끼듯이 한국의 토착 종교라 할 수 있는 무속 신앙을 무조건 배척만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볼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망자의 한을 풀고 극락왕생을 축원하는‘씻김굿'은 단순히 주술적인 의미만 있는 게 아니고, 문화 예술적인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걸 두고 누가 감히 무속이라며 내칠 수 있을까 싶다. 특히 무형문화재로 국가에서 지정했는데 말이다. 부처님께서도 "관상, 사주, 신점을 보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신년이면 또는 어떤 상황에 닥치면 부질없게 신당에 찾아가는 걸까?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증표 다름 아닐까 싶다.

따라서 이제는 신의 존재 여부로 논쟁할 것이 아니라 각자가 편리하게 또 자기 취향에 맞게 신앙생활을 하건 아니면 비신앙인으로 살건 또는 무속인으로 살건 자유로움이 추구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성직자 강의를 보며 ──

성직자들이 요즘 들어 특히 유튜브 등을 통해 일반인이나 신자들을 향해 강의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에게 가끔 놀라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시대적 변화와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발생하고 있지 않나 싶다.


첫 번째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인해 정보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정보를 찾고 공유할 수 있다. 성직자들 또한 이러한 기회를 활용하여 자신의 메시지와 가르침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려고 한다.


두 번째는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점차 종교적인 신념보다 일상적인 문제들에 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감지하고, 일반 상식적인 주제들을 다루면서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성직자와 친근하게 소통하며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을 개선하려고 한다.

세 번째는 성직자들이 개그맨처럼 웃긴 스타일로 강의를 하는 것은 청중의 관심을 끌고 더욱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한 방식 중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머와 웃음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성경이나 신앙적인 가르침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경험을 제공하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전체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성직자들이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을 활용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이다. 더 많은 사람이 성직자들과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자각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모든 성직자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앙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왜곡하거나 가벼운 재미로만 다룬다면 자칫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직자들은 항상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에게 적절한 교리와 지도를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에 일부 성직자의 이해하기 힘든 일탈 행동이 많은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 같아 성직자의 강의에 대한 부정 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한 예로, 대통령이 동남아 순방을 위해 탑승한 "대통령 전용기 추락을 위해 기도했다”라는 뉴스를 접한 많은 국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 같다. 그것도 당사자가 다름 아닌 성직자라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한성공회 김규돈 신부,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 박주환 신부가 바로 그들이다. 김 신부는 “전용기가 추락하길 바란다~~”박 신부는 “윤 전용기 추락 기원”이라는 내용의 기도를 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런데 그들의 저주 기도 약발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인지 윤 대통령은 4박 6일의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기도 효험이 없었음을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보통 사람조차도 입에 담지 말아야 할 섬뜩한 문구를 그것도 성직자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저주하는 기도를 했다는 걸 우리 국민은 어떻게 생각할까? 가관인 것은 탈핵 천주교 연대 공동대표인 박홍표 신부가 “누군가 십자가를 졌어야 한다”면서 “숙청당한 기분이다.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하면서 “교회가 그를 내팽개치고 자기들의 안일과 신자 안전에만 신경 쓰다 보니 참담하다”라고 하면서 씁쓸한 심경을 드러냈다고 한다.


만일 대통령이 자신들의 정치 신념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면 사안에 따라 건전한 방법으로 비판하면 될 텐데 어떻게 저주를 퍼부을 생각을 했는지 안쓰럽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성직자까지 막말하는 상황으로 내몰렸을까? 성직자라는 사람조차도 아주 못된 편 가르기 팬덤 문화의 틀 안에 꽉 갇혀있지 않나 싶어 마음 아프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속해 있는 집단은 과연 정상적일까? 이게 종교의 본질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 대한 징계 조치를 보면 "그들이 맡은 직을 면한다”라고 한 것 같다. 그 말은 여론이 조금 잠잠해지면 슬그머니 다시 직에 복귀시키겠다는 의도 다름 아니다. 그러면서 국민이 이해할 것으로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종교인 양심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런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성공회와 천주교 지도부는 그들을 즉각 파면 조치해야 한다. 아무리 그들이 회개하고 반성하는 기도를 수백 번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네 속담이 이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만일 김수환 추기경께서 이런 광경을 목격한다면 뭐라 하실지 궁금하다. 어쩌다 사람들의 영성 치유를 해준다고 하는 성직자라는 사람들조차 잠자던 소도 깜짝 놀라 일어날 이런 행태를 보이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누구 말마따나 정말 지구의 종말이 가까이 와서 그런 건가? 그래서인지 요즘에는“국민이 종교를 걱정한다”라는 말조차 유행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성직자들이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일반 상식적인 내용으로 강의하고, 가끔은 개그적인 스타일로 접근하는 것은 시대적 변화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현상이라고 본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더 많은 사람과의 소통과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긍정적인 변화일 수 있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성직자들은 항상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성직자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신흥종교에 빠지는 심리 ──


신흥종교는 보통 사회적 변화와 불안정성이 높은 시기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존의 종교적 기준과 제도들에 대해 도전하고 새로운 신앙을 찾는 사람들을 유혹하게 된다. 특히 어떤 사회적 차별과 소외를 경험하는 경우, 새로운 신앙의 문을 두드리면서 기존의 종교적 경계를 무너뜨리게 된다. 신흥종교는 다양한 요인과 과정을 통해 탄생할 수 있다고 보는데, 처음에는 기성 종단에서 이단이라면서 시비를 한다. 하지만 신도 수가 늘어나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언제 그랬냐 싶게 하나의 종단으로 인정하는 걸 볼 수 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좋은 사례 중 하나 아닐까 싶다. 거의 백만 명에 가까운 신도 수를 자랑하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두고 지금도 계속 확장 일로에 있다. “많은 사람이 미치면 종교요. 미친 사람이 적으면 미신이다”라는 일화가 있듯이 종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 않을까 싶다.


신흥종교가 출범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신흥종교는 종종 기존 종교나 철학적인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혼합하고 재해석하는 것 같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신앙 체계를 형성하며, 고유한 메시지와 가치 체계를 제시한다. 종교적 혼합과 재해석은 기존의 종교나 전통적인 신앙 체계와 다른 새로운 모습을 제공함으로써 신흥종교의 독특성을 부각하면서 이목을 끌어들이게 된다.


많은 신흥종교는 시각적, 청각적, 감각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화려한 의식, 예술적인 창작물, 독특한 음악, 명상 기법 등을 통해 참여자들에게 귀속감과 경험을 제공한다. 이러한 에스테틱 요소들은 참여자들에게 높은 흥미와 충성을 유지하게 하며, 종교적 경험의 감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많은 신흥종교는 강력한 리더십과 권위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들 리더는 교주, 선지자, 대표 등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권위를 강조한다. 리더십은 종교적 지침과 해석을 제시하고, 신뢰와 충성을 형성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신흥종교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메시지와 경험을 제공한다. 이들은 사람들의 고통, 불안, 소외감, 의문 등과 같은 문제를 다루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러한 심리적인 욕구 충족은 참여자들에게 희망, 안정감, 안락감을 제공하여 신흥종교의 교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흥종교는 종종 사회적인 연대와 커뮤니티 형성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참여자들은 서로의 지지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종교적인 모임, 그룹 활동, 공동체의 가치 등을 강조하여 사회적인 관계망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신흥종교는 교세 확장을 위해 이처럼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그들 고유의 방법과 전략을 통하여 신흥종교는 자기네 종교의 특성과 리더의 비전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신흥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기법들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며, 다양한 종교적 경험과 이해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신흥종교의 늪에 빠져드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며, 항상 비판적 사고와 상황 판단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많이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왜 신흥종교의 늪에 쉽게 빠져드는지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그 배경이 뭔지도 궁금하다. 그것은 아마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모든 분야의 지식을 폭넓게 갖추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학문적인 지식과 상관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취약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경우에 신흥종교의 주장과 가치 체계가 학문적인 자기 확신과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어 이들을 끌어들이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학문적인 교육은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그러나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항상 합리적으로만 사고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정적인 동기와 욕구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요소들이 학습된 지식보다 때로는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흥종교는 종종 감정적인 요소와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해주는 메시지와 경험을 제공하므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극히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 일본 사람 중에 특히 신흥종교에 심취한 사람이 많다는 게 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종교나 신앙은 사람들에게 정체성과 소속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혼란스러운 시대나 개인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이러한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올 수 있다. 학문적인 교육만으로는 이러한 정체성과 소속감을 충족시키기 어려울 때, 신흥종교는 이를 제공해주는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다양한 정서적, 심리적인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상처, 외로움, 불안, 의문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취약성은 신흥종교가 제공하는 희망, 안정, 치유 등의 메시지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학력이 높다고 해서 항상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갖추는 것도 아니므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 ──

사람은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삶은 태어나서 죽음까지 이어지는 일시적인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경험과 성장을 겪고, 또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게 된다. 태어나는 것에는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에는 순서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또 다른 표현 아닐까 싶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는 다양한 의미와 함축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여러 측면이 포함된다고 보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지, 또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탐구하게 된다. 또한, 우리의 한계와 유한성을 인식하게 되며, 이를 통해 삶을 소중히 여기고 더욱 의미 있는 선택과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죽음의 존재는 삶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무게와 가볍고 소중한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순간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삶을 더욱 귀중하게 여기고, 순간을 헤아릴 수 있는 미덕을 강조한다. 또한, 죽음에 대한 인식은 변화와 성장을 끌어낸다. 우리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변화를 경험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성장하게 된다. 변화는 삶의 일부분이며, 우리는 그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혜롭게 이해하고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움이 아닌 삶의 가치를 깨닫는 기회로 바라본다. 죽음은 우리에게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의미 있는 선택과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두 번째, 삶은 현재에 존재한다. 현재의 순간을 귀중히 여기고 즐기며, 더욱 의미 있는 경험과 연결해 본다. 삶의 여정에서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 깊게 관찰하고 경험해 본다.

세 번째, 자신의 삶에 목표와 가치를 부여한다.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대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헤쳐 나가는 동기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네 번째, 삶은 변화와 성장의 연속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해 본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 번째,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감사와 연결해 본다.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감사의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헤쳐나가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것들을 참고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혜롭게 이해하고 헤쳐 나간다면 개인적인 성장과 의미 있는 삶을 이루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각 개인의 관점과 신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방식을 찾아 적용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종교, 공포를 먹고 자랄까 ──

우리는 어렸을 때 “신데렐라,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글은 아마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 홍수와 모세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도 거의 흡사하다고 보며,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 널리 퍼져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대홍수 이야기는 구약성경이나 중동 문화권에서나 그리스신화, 중국 신화, 인도의 신화에도 같이 등장하는 걸 알 수 있다. 인간의 정착이 가장 늦은 것으로 알려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탄생한 잉카, 아즈텍, 마야 문명에도 고유의 대홍수 신화가 있다. 즉 신기하게도 지구상의 거의 모든 문화권에 대홍수 신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인간이 살았던 거의 모든 지역에 대홍수 신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마 열대지방을 제외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대홍수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생각된다.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 인류의 직계 조상이 생긴 이후에 그들이 직접 겪었던 가장 큰 자연재해가 소위 LGM(Last Glacial Maximum, 마지막 최대 빙하기) 아닐까 추정된다. 지질학적으로 기원전 3만 년 전에서 기원전 1만 2천 년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빙하기는 지구 공전 궤도의 변화와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등으로 인해서 지구가 태양에서 가장 멀어질 때 벌어지는 현상으로 지구가 생성된 이후에 몇십만 년 단위로 꾸준히 반복되어 온 자연현상이다.


우리 인류의 조상들은 빙하기 이전 십만 년 동안에 계속되던 빙하기 때도 당연히 살기 어려웠는데, 동굴 속에서 짐승 등을 잡아먹으며 용케 버텨냈다. 하지만 마지막 최대 빙하기는 사정이 달랐다. 지구의 절반 이상이 얼음 땅으로 변해버린 서식지 때문에 많은 동식물이 얼어 죽었고 인류의 조상들 가운데도 좋은 피난처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얼어 죽었다. 독일 튀빙겐 대학교 고유진화 연구팀 등이 밝힌 마지막 최대 빙하기 때 유럽과 서아시아 살았던 인류 조상들의 게놈 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면 스페인, 포르투칼 등 리베리아 반도로 피난 왔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생존했던 반면에 이탈리아반도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전부 죽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이것은 두 지역의 산세, 해류 차이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즉 마지막 최대 빙하기 때 북반구의 중위도 북쪽은 물론이고 저위도의 높은 산악지역도 거대한 빙하에 뒤덮였다. 적도 근처에 있는 킬로만자로나 일본의 후지산 등 해발 고도 3천 미터 이상의 산들은 위도에 관계 없이 빙하 위에 또 빙하가 쌓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빙하기 끝났다. 대략 1만 2천 년 전부터 지구 공전 궤도가 다시 태양과 가까워지지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만 년 동안 쌓였던 빙하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녹아내린 빙하의 양이 얼마나 많았던지 지구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한다. 빙하의 녹은 물로 인해 그전에 육지였던 곳이 바다에 잠겼고 그로 인해 베링해협이 탄생했다. 당연히 우리 조상들이 살던 만주와 한반도에도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예를 들면, 지금의 서해는 빙하기 때는 육지였다. 그런데 중국의 여러 산맥에 쌓였던 빙하가 녹아내려서 태평양과 연결되면서 바다로 변한 것이다. 서해에서 유난히 얕은 곳이 있는 것은 육지에서 바다로 변한 곳이기 때문이다. 빙하기 때는 한국과 일본도 얼음 육교로 되어 있어서 통행이 가능했으며 사람과 동식물들의 집단 이동도 가능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두 지역의 지질학적 이론에 의해 뒷받침된다.


신화와 종교와 관련해서 특히 주목할 지역은 지금의 중동 지역과 지중해, 흑해 지역이라고 본다. 흑해는 빙하기 때만 해도 ‘애욱시네’라는 이름의 호수였다. 호수 주변은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위치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엄청난 양의 물이 밀려들었다. 호수는 점점 넓어졌고 수위도 높아졌다. 그런데 어느 날 남쪽의 육지가 둑처럼 터져버렸다. 그 터진 부분이 지금의 보스포루스 해협이 됐다. 이런 과정에서 신화가 창조되고 종교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옛날 원시종교는 어쩌면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공포의 대상 아니었을까 싶다. 공포에 대한 반향으로 종교가 탄생했다고 한다면 과학이 발전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종교는 사라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마이클 셔머의 주장처럼 “사람에게는 어떤 것을 믿고 싶어 하는 믿음 엔진이라는 게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즉 우리에게는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믿음 엔진이라게 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다 보니 엉뚱한 것도 믿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다.


“종교는 공포를 먹고 자란다”라는 표현은 종교 현상에 대한 한 가지 관점을 나타내는 의미이다. 이는 종교적 신념이나 실천이 개인이나 집단의 공포와 불확실성에 대한 필요로부터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교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과 위험에 직면할 때 안정감과 의지를 얻을 수 있는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특히 종교는 많은 사람에게 삶의 의미, 희망, 위로, 도덕적 가치, 사회적 지지 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또 종교는 인간 존재의 한계, 죽음, 무의미성과 같은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많은 사람에게 불안과 공포를 일으키는데, 종교는 이러한 불확실성과 공포를 극복하고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여 안정과 위안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종교는 죽음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와 같은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들을 다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특히 종교는 불확실성과 공포에 직면할 때 신앙, 기도, 의식, 영적인 지도자의 지도 등을 통해 개인이나 집단에 안정감과 희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종교는 다양한 사회 및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종교가 다양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신학자들이 예수가 역사적 인물인지 신화적 인물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역사적 예수는 어떤 존재인지, 과연 부활한 건지 또 동정녀에서 태어난 예수의 탄생설은 과연 믿어야 하는 건지, 성경이 신화는 아닌지, 천국은 가는 곳인지 아니면 이 땅에 임하는 것인지 등 많은 의견을 내놓고 있다. 요즘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핵심적인 이유는 뭘까? 혹시 우리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신은 천국을 보장해 줄까 ──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다. 먼저 유신론자의 세계에서는 ‘신’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신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지켜보고 보호하며 또 내게 말을 건넨다고 생각한다. 유신론자의 세계에서 신은 망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인간의 삶에 구체적이고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반면 무신론자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무신론자의 세계에서 신은 없다. 나의 세계에도 신이라는 용어가 있고, 관련된 문학이 있고, 교회나 사원과 사찰이 있겠지만 어떤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를 지켜보고 보호하며 말을 건네는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물질과 인과법칙의 작용으로 움직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영국 명문 공립대학인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가 특정 신을 믿는 유신론자보다 더 똑똑하다”라고 6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유신론자들은 직감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유신론자의 세계와 무신론자의 세계 중 실제 세계를 더 정확히 서술하는 세계관은 과연 무엇인가?

만일 당신이 확고한 유신론자이거나 무신론자라면 당연히 ‘이것’이라고 분명히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세계는 언제나 ‘자아의 세계’이다. 객관적이고 독립된 세계는 나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해석한 세계에 갇혀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의 주관적 세계, 이 세계를 우리는 ‘지평’이라고 부른다. 즉, 지평은 나의 범위인 동시에 세계의 범위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지평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 종교의 형편은 어떨까? 얼마 전에 조계종 총무원장은 ‘숨겨놓은 자식이 있느니, 어떠니 하고 있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태평양 바다를 건너오면서 많이 힘들었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안타깝게도 ‘세상이 종교를 걱정해야 한다’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자현 스님(박사학위 7개 소지자라고 함) 법문을 들었는데, 제목이 조금 낯설다. “신은 천국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신을 강대국, 인간을 약소국” 개념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예로 들면서 말이다.


우크라이나가 전에는 세계 3대 핵보유국이었는데 1994년에 부다페스트 조약을 믿고 자국의 안보를 맡기고 핵을 포기한 것이 지금의 힘든 상황을 맞이한 것 같다는 해석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안전을 상시 보장해 주는 강대국은 없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핵우산 속에 있느니 어떠니 하지만 “미국은 돌변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북한은 절대로 핵을 개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핵을 개발한다면 내가 책임지겠다” 장담하던 분은 이미 고인이 됐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게 우리 현실이다. 고려 말 공민왕과 신돈 관계를 보면 힘없는 자의 최후가 어떤지 알 수 있다. “강자와 약자의 계약 관계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라는 걸 보여준 좋은 사례 아닐까 싶다. 어떤 약속이건 힘 있는 자가 외면하면 그 약속은 의미 없게 된다. 조선 개국 공신 삼봉 정도전의 최후가 어땠는지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교훈을 주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불교에 등장하는 10개의 신 중 7번째 신은 염라대왕이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행 심판관 역할을 한다고 한다. 처음부터 그런 신을 만들지 않았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당시 사람들이 심심해서 또는 재미 삼아서 아니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런저런 역할을 하는 신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실화되면서 점차 거기에 종속돼 가는 이솝우화 같은 현상을 보게 된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박혁거세나 주몽 등 유명 인물을 우리가 신격화며 미화하듯이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식의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신이한 현상들은 정말 설득력 있는 걸까? “예수는 인간이 만든 신이다”라는 걸 일찍이 바티칸 성직자들이 알았기 때문에 중세 시대에 거침없이 타락한 행태를 보였을지 모른다고 해석해 본다면 이 또한 지나친 걸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에서 자기네 편리한 방식으로 신을 끌어들여 숭배하면서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걸 보면 과연 신이란 존재가 있기는 한 건가를 의심하게 된다. 이렇게 종교 간에 믿음이 다른 집단과의 화해와 사랑은 참 힘든 것 같다. 종교 자체가 가르치는 교리는 화합을 추구하는 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종교가 우리 인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리처드 도킨스가 주장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웃을 사랑하라” 이런 글귀는 읽는 사람 눈만 피로하게 한다고 하던 어느 목사님 설교가 문득 생각난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인간들을 향한 외침 다름 아니다.

자현 스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전 재산을 헌금한다고 해도 신은 천국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은 인간이 만든 존재이기 때문”이라면서!! 그렇다면, 정말 "인간이 신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까” 오랜 기간 반복된 원론적 질문을 다시 소환해 본다. 아울러, “신과 인간의 -갑과 을 같은- 불평등 계약은 절대 지켜질 수 없다”라고 하는 스님의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 있을까? 궁금하다.

문현진(글로벌 피스 재단) 의장은 자신의 저서 ‘코리안 드림’이라는 책을 통해 영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상을 소개하면서 종교의 벽을 깨부쉈던 달라이라마, 간디, 킹 목사, 요한 바오로 2세 등을 소환하고 있다. 그러면서 홍익인간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아울러 부처께서 “사람이 죽으면 진짜 끝일까? 아니면 연속되는 것일까?” 물으시면서 둘 다 증거가 없으니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자고 하신다. 둘 다 증거가 없으면 둘 다 가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때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게 내 삶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라고 하신다. 즉 본인이 확인했다고 해서 “무조건 믿어라” 강압을 하시는 분이 아니고 실용적인 분이 바로 부처라며 어떤 스님이 설법하고 있음을 참고해 본다. 언급한다면 “죽음 뒤의 세계는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라는 의미 아닐까 싶다.


토정비결을 보는 심리 ──

세상은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생기고 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은 보충하고 불필요한 것은 버리지 않나 싶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약간 위태위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은 까치집처럼 말이다. 그래서 세상은 변수가 너무 많고 예측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나 싶다. 특히 내가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길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년 정초가 되면 대부분 토정비결을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행위는 아주 오랜 하나의 관습 아닐까 싶다. 토정비결을 보는 것은 자신과 가족의 한 해 운수를 미리 알고자 하는 심리적 요인 때문이라 생각된다. 요즘에는 인터넷을 통해서도 쉽게 신년 운수를 볼 수 있다. 토정비결은 한국의 전통적인 점술 방식 중 하나로, 고려 시대에 토정 이지함 선생이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매년 신년 초만 되면 토정비결을 보는지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한국 사람들은 전통과 문화에 대한 애정이 높고, 옛 전통을 이어받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토정비결에 관한 관심이 높다고 본다. 이를 통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지침이나 방향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수 있다.

둘째, 신년운세를 점쳐 주는 것이 토정비결의 중요한 부분이다. 한국 사람들은 새해의 시작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 해를 시작하는 순간의 운세가 전체 해를 좌우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신년운세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얻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토정비결이 맞을 확률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토정비결은 점술의 한 형태로, 주로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해석과 경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운세는 개인의 선택과 행동, 환경 변화 등 여러 가지 요소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신년운세가 100% 맞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 결과에 대해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많은 사람은 토정비결이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긍정적인 에너지와 동기부여를 주기 때문에 많이 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행사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며, 점술이나 운세는 오로지 참고 자료로만 활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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