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 물러 섰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3장 살며 생각하며

by 송면규 칼럼니스트

설득과 주장 ──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설득하고 때로는 설득을 당하기도 한다. 또 목소리 높여서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을 듣기도 한다. 설득은 "상대편이 이쪽 편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함”으로 표기하고 있고 주장은 "자기의 의견이나 주의를 굳세게 내세움”을 의미한다. 어떤 철학자는 주장하고 있다. 부처는 ‘설득의 달인’이고 예수는 ‘주장의 달인’이라고. 그렇다면 그런 주장을 하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또는 가풍이 있는 집안에서 성장한 사람은 대체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기보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신경을 더 많이 쓴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설득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의 역량을 설득하는 데 사용하는 것보다 주장하기에 바쁜 것 같다. 이것이 "상대방을 설득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증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국회의사당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가방끈이 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설득보다 주장이 강하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지 많이 헷갈린다.


역사책을 읽다 보면 석가는 왕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왕궁에서 규범 있게 공부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사용하는 어법에서 경청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문화가 곁들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상대방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공감을 표하면서 마지막에 살짝 자기 의결을 피력했다고 한다. 여기서 법정 스님이 살짝 엿보이기도 한다.


반면에 예수는 목수 아들로 태어나서 가난하게 성장한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산상수훈을 비롯해 이곳저곳을 방문하면서 대중을 향해 사용하는 화법을 보면 대부분 “나를 따르라~”식인 것 같다. 그래서 철학자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불경을 읽다 보면 부처의 말씀은 설득을 전제하고 있고 성경은 예수의 주장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을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로 구분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사이비 종교 교주들을 보면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어 주장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논리적 공박에 내몰리면 설득하려고 하는 것보다 "너는 여기서 빠져라”하는 식으로 대응하게 된다.


그것은 상대방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마치 상대방과 언쟁하다 논리에서 밀리면 갑자기 삿대질하면서 화를 내는 것과 뭐가 다를까 싶다. 설득과 주장이 꼭 학력과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배움이 좀 더 크게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옛 성현들이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나 싶다. 따라서 “강하게 주장하기보다 경청하는 습관이 더 효과적일 것 같다”라고 강조해 본다.

소외된 노동 ──

요즘 심심찮게 불거지는 사회 문제 중 하나가 ‘소외된 노동’ 아닐까 싶다. 특히 부부 관련 TV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부부 불화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소외된 노동이 원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여성 패널들이 가정에서 남편의 비협조적인 부분에 대해 핏대를 올리는 데 반해 남성 패널들은 방어하기보다 대부분 침묵으로 묵시적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통계청 발표를 보면 “부부 10명 중 2명이 가사를 공평하게 분담하고 있다”라고 한다. 안타깝다. 하지만 연령대가 젊을수록 가사를 공평하게 분담하고 있다는 것에 희망을 가져 본다. 우리가 오랜 기간 유교 문화에 길들여있기 때문인지 아직도 한국 남편들은 대부분 가사노동을 외면하고 아내 업무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심지어 TV를 보면서 커피를 요구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이제 시대 변화에 걸맞게 변화해야 한다고 본다.

소외된 노동은 마르크스가 정립한 것으로 1.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2.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 3.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4.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형태라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노동에 대한 대가는 온전히 소유할 수는 없고 단지 돈으로만 보상을 받게 된다. 그래서 크고 작은 보람은 생길지언정 자아실현과 같은 더 큰 의미를 느끼는 데는 한계를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 요즘 직원들은 회사 업무를 진정한 자기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면서 점점 일과 노동으로부터 멀어져 가게 된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과 현재 하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사표를 내던지는 꿈을 꾸기도 한다. 이것은 직장인들의 갈망이 어쩌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소외된 노동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우리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창조해 갈 수 있다면 그리고 노동의 생산물이 오롯이 자신에게 귀속된다고 하면 우리는 노동 소외의 문제를 극복하고 활기찬 삶을 살게 되는 걸까? 요즘 소외된 노동으로 지쳐가는 사람들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 보겠다며 도전하고 있는 크리에이터라는 새로운 직업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AI와 로봇 등 첨단 기술의 등장으로 내 지식과 창의력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나는 곧 비자발적 노동 소외자 대열에 서게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인기가 높은 직종이면 그만큼 시장이 크므로 AI 등 첨단 기술의 먹이가 되기 쉽다는 얘기이다. 영상의학 판별, 약사 같은 직종에서 AI가 훨씬 더 정확하고 빠르다는 건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많은 현대인이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길 희망하고 있으나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노동은 우리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생계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해서 노동 소외를 당하기 전에 미리 자본을 축적해서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는 인생 100세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기우멱우 ──

‘기우멱우’는 한자로 구성된 사자성어로 ‘기우’는 ‘기상을 갖추다’라는 뜻이며 ‘멱우’는 “사람의 성격이나 지위”를 의미한다. 이 사자성어는 사람이 기품과 품성을 갖추고 있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기우멱우’는 주로 사람의 성격이나 품성을 높이고 귀감으로 여겨지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사자성어는 사람이 고요하고 진중한 자세로 행동하며, 올곧고 품격 있는 태도를 갖추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사람이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갖추면서도 자신의 품격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사자성어는 사회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을 강조하는 문화적인 요소로 사용될 수 있으며, 사람들은 ‘기우멱우’라는 용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행동에 반영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적 인식과 상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라 시대 한 스님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고 있는데, 멀리서 농부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와 스님을 다급하게 불러 세우면서 “자장 스님을 아시는지?”물었다. 그러자 내가 자장이라 말하자 넙죽 엎드리며 자신이 스님을 만나려고 두 달이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고 한다. 스님이 "왜 저를 만나려고 하는지?”물었다. 기다린 이유는 “스님이 세상일을 꿰뚫어 보신다”라고 하자, 스님은 웃으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농부는 스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한 번만 자신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애원하고, 자장 스님은 농부의 얘기를 듣게 된다.


자신은 저 산꼭대기 밑에 있는 외딴집에서 4대째 살고 있는데, 괴이하게도 나이 사십만 되면 식솔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면서, 자기 나이가 38세인데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점이라도 봐달라는 얘기인가?”하자 무당도 불러서 굿도 여러 번 해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한다. 스님은 일단 집에 한번 가보기로 한다. 스님은 집 앞 미루나무 높게 까치집이 있는 걸 보고 탄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안방, 부엌, 헛간 등 곳곳을 둘러보고 자기가 보기에는 별다른 게 없는 것 같다고 농부에게 말했다. 그러자 “어째서 식구들이 단명하는지요?”라고 묻자 스님께서는 답은 필시 가까이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날이 무척 더우니 물 한 잔만 달라고 부탁한다. 농부는 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자장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깜짝 놀라서 “여태껏 이 물을 마셨단 말이오?”라며 말한다.


그러자 태어나면서부터 이 물만 마셨다고 한다. 스님은 “물맛을 보니 이 물은 쇳가루가 녹은 물이오. 그러니 단명할 수밖에~~”내일부터는 아랫마을에서 물을 길어다 마시면 된다고 말해주고 집 밖으로 나가면서 ‘등하불명’이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대나 나나 길을 몰라 헤매는 건 마찬가지 같다”라며 껄껄 웃었다. “기우멱우는 소 등에 앉아서 소를 찾는다”라는 뜻이다.

파랑새를 찾겠다며 산 넘고 강 건너면서 헤매다 "파랑새는 없는개벼” 푸념하면서 집에 돌아오자 자기 집 처마 밑에서 파랑새가 짹짹거리며 지저귀고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렇듯 우리는 삶의 중요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멀리서만 찾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은 해답이 생각하는 것보다 내 곁 가까이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따라서 혹시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가 있다면 밖에서만 찾으려 애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또 내 주변에서 찾는 것부터 해보면 어떨까 싶다.

혜종 선사께 배우는 지혜 ──

당나라에 난초를 좋아하는 혜종이라는 스님이 살았는데, 수행을 마치면 늘 난을 보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혜종이 불법을 설파하러 먼 길을 떠날 때였다. 그때 한 제자가 급히 뛰어와 자신이 동행하겠다고 하자, 스님은 “동행 대신 난을 잘 보살펴달라” 당부하였고, 제자들은 세심하게 난초를 보살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자들이 깜빡 잊고 난초를 집안으로 들여놓지 않은 실수를 범한 어느 날 밤에 갑자기 광풍과 함께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제자들이 깨진 화분과 망가진 난초를 보며 몹시 후회하자, 한 제자가 "내가 해결 할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하면서 “난초를 아교로 붙여놓으면 스님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혜종 선사는 절로 되돌아왔고, 제자들은 행여 스님이 난초의 이상함을 눈치챌까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스님이 난초를 보자마자 단번에 이전과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전혀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말씀하신다. “난은 그대로이나 난의 향기는 이미 변해있구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사실대로 고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스님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그대들이 아니고 나일세” 그러면서 “그동안 내가 난초 향기에 사로잡혀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꼬” 스님의 담담한 이 한마디에 감동한 제자들은 더욱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앞으로 깨질 난초와 같은 운명 즉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깊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우리가 친구들과 많이 하던 구슬치기를 잠시 상상해보자.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해서 구슬을 따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었다. 반면 구슬을 잃고 나면 시무룩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과거의 구슬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 그 구슬은 내 주머니만 무겁게 할 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재물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만약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온갖 부귀영화도 이 구슬처럼 무겁기만 하지 않을까?


인생에서 어떤 것을 얻었다느니 잃었다느니 하는 것은 어쩌면 단지 환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현들이 인생을 “바람과 구름처럼 덧없다”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혹시 환상으로 생긴 헛꽃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길을 멈춰 보면 어떨까 싶다.


Z세대의 직업관 ──

Z세대는 1996~2010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을 일컫는 용어로 X·Y세대의 뒤를 잇는 세대를 일컫는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SNS를 통해 인간관계를 맺는 등 인터넷에 익숙해 ‘디지털 원주민’이라 불리기도 한다. Z세대는 하루 중 41%를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를 사용하며 TV, 스마트폰, 랩톱, 태블릿PC 등 하루에 최소 5가지의 디지털 기기를 오가면서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다. 특히 이전 세대와 달리 개인적이고 독립적이며 경제·환경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등 다른 소비 패턴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정보력으로 무장한 이들이 미래소비의 주축이자 여론 형성에서도 중요한 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얼마 전에 모 기업 취업준비생들에 대한 면접관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서류 전형과 필기시험이라는 수백 대 일이라는 경쟁을 거친 수험생들을 마지막 관문에서 만났다. 면접관 눈에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려고 많이 준비한 그리고 잔뜩 긴장한 모습의 그들을 대하면서 오래전 필자의 취업 당시를 잠시 소환해 본다.

어려운 경쟁 과정을 통과해 취업한 그들의 이직률이 의외로 높다고 한다. Z세대 10명 중 3명이‘퇴준생, 퇴사준비생’이라고 하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높은 실업률 속에서 어렵게 취업에 성공한 그들이 왜 회사를 박차고 나오는 걸까? 퇴사를 단행하는 이유가 “일자리 조건이 직장에서 잘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청년들이 취업하고 싶지 않거나 퇴사의 사유가 될 수도 있는 일자리 특징”조사에 의하면 기피 직장 1순위가 “정시 근무 지켜지지 않는 회사”라고 한다. 취업을 꺼리는 일자리 조건 2순위는 “불편한 출퇴근”이다. 출퇴근할 때 불편한 환경이 기대 이하 월급이나 비정규직과 유사한 수준의 일자리 기피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서울, 인천, 경기 등 교통이 발달한 수도권에서도 불편한 출퇴근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는 인구 과밀에 따른 불편함이 큰 원인으로 추측된다. 월급이 기대 이하인 회사도 당연히 기피 일자리 3순위였는데, 마지노선은 월평균 244만 원이었다. 반면, 고졸 학력자 중 최저 희망급여는 191만 원 수준이었다. 청년들은 비정규직에 대한 거부감이 컸으며, 대졸자의 경우 64%로 가장 높았다. 전문대, 고졸 학력자도 각각 56%가 비정규직으로 취업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주5일 근무를 지키지 않는 회사들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위에 열거한 일자리 조건을 종합해보면 청년들은 취업을 준비할 때 직장의 안정성인 워라밸을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지켜지지 않는 근무환경은 청년들에게 취업하지 않거나, 취업했더라도 곧 이탈할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청년들이 특히 중소기업을 꺼리는 이유는 청년 기피 일자리 조건 5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일자리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중소기업의 취업률을 높이고 양질의 노동력이 중소기업에 공급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의 근무환경 개선이 시급하다고 본다.

사마천의 ‘사로’ ──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이며 ‘사기’의 저자로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남성의 주요 부위를 잘리는 궁형의 형벌을 받고도 죽지 않은 이유는 불후의 역사서인 사기를 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까닭인지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유명한 도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데 지금까지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며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청년의 얘기를 듣고 있던 도사가 제자 두 명을 불러 “이분을 모시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최대한 많이 해오너라” 시킨다. 제자들은 도사의 말을 따랐다. 얼마 후 땀에 흠뻑 젖은 청년이 나무 두 단을 짊어지고 문 앞에 도착했다. 그 뒤에 건장한 제자가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으로 무려 여덟 단의 나무를 짊어지고 나타났다.

그런데 나이 어린 제자가 보이지 않자 ‘혹시 내려오다 다친 건 아니냐?’라며 청년이 걱정하듯 말한다. 잠시 후 어린 제자가 열두 단의 나무를 실은 뗏목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고, 도사는 미소를 지으며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청년은 억울하다며 여덟 단의 나무를 갖고 오다 너무 무거워 두 단을 버렸고 또 오다 무거워 두 단을 버리고 겨우 두 단을 짊어지고 왔다고 말한다.


그러자 건장한 청년이 자기는 네 단의 나무를 짊어지고 내려오는데 절반쯤 산길을 내려오다 두 단이 버려져 있어 아까워 들고 내려오는데 또 버려진 두 단이 보이길래 주워서 총 여덟 단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자 어린 제자는 "애당초 저는 두 단도 짊어질 힘이 없었다. 그래서 한 단만 가지고 내려올까 생각하다 문득 개울이 보여서~~”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도사는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세 명이 각자 취한 방법의 차이를 이제 알겠소?” 그러면서 “문제를 규정하는 방법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법이라오” 그러면서 "잘못된 방법으로는 백 번을 풀어도 잘못된 답이 나올 뿐이오. 그래서 노력보다 방법이 중요한 법이라오”라고 말한다. 즉 모든 성공에는 방법이 있고, 그 방법은 ‘생각의 길'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사마천은 이를 ‘사로'라고 했는데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길이 있는 생각”을 의미한다.


‘생각의 길’이 달라지면 내가 달라지고, 내가 달라지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법이고, 나아가 인생의 길이 달라질 수 있다. 사마천은 말한다. “배우길 좋아하되 깊게 생각해야 마음으로 그 뜻을 알게 된다”라고. 즉 사로가 있어야 출로가 있고, 내 마음의 자세가 바르게 서야 사물의 문제를 올바르게 규정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해답도 찾아낼 수 있는 법이다.


편견과 오만이 가득 찬 마음으로는 그 어떤 문제도 제대로 풀어낼 수 없다. 노력하기에 앞서 잠깐이라도 ‘노력보다 방법’을 먼저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그것이 바로 힘들게 헛삽질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비법인 것 같기 때문이다.

2030 청년들의 주거의식 ──

주거는 작게는 생활기기, 가구 및 실내 장비, 실내 공간, 주택, 거주지 등까지 확대되는 물리적 범위와 취침·취미 등의 개인 생활, 식사·휴식·단란 등의 가족 공동생활, 접객·사교 등의 근린 생활과 공동체로서의 지역 생활을 포함한 사회생활이 함께 어우러지는 생활의 장소로 개념을 지을 수 있다. 이러한 주거의 역할은 가족생활을 보호·유지하고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며 가족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기능과 휴식 및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기능, 가사노동의 장소가 되고 지역 사회생활의 기반이 되는 기능을 한다.

주거정책 연구센터에서 2030 미혼 청년들의 주거여건과 주거인식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조사 목적은 최근의 취업과 소득, 사회적 건강, 결혼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한 청년세대의 주거상황과 주거인식을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전국에 거주하고 있는 2030 미혼 청년(만 20세 이상 39세 이하) 3,009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그런데 조사를 통해서 2030 미혼 청년들에 대해 다음 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첫째, 일반적 특성으로는 미혼 청년의 2/3가 현재 부모와 동거하고 있으며, 부모와 동거하고 있는 청년의 소득 수준은 대부분 100만 원 미만이다.

둘째, 부모한테서 독립한 미혼 청년의 주거여건은 대부분 아파트 이외 주택 거주가 74.7%, 보증부 월세가 43.8% 상태로 거주하고 있으며, 부모로부터 보증금을 지원받고 독립하였다.

셋째, 주거인식 부분에서는 부모의 경제적 지원에 대한 기대 여부에 따라 주택 소유 의식과 미래 주택의 소유 가능성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2030 청년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중 가장 큰 요인이 “자산·주거·일자리 얻기 어려운 구조”라는 걸 감안해서 정부에서는 위 내용을 포함해서 2030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정책을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사과 ──

우리 국민한테 특히 화가 많은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어지간하면 그냥 넘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필자 자신도 화부터 내는 것 같아 스스로 씁쓸한 생각이 들 때가 간혹 있다. 오랜만에 국회의원회관을 방문했다, 그런데 국회의사당역을 내리기 무섭게 플랫폼에서 “장애인 평생교육법을 제정하라”라고 하면서 마이크 잡고 연설하는 사람과 휠체어 타고 동조하는 여러 명의 장애인 그리고 그 곁을 지키고 있는 경찰들이 보인다.


국회를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나오기 무섭게 이번에는 여러 단체에서 각종 구호가 적힌 팻말과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뭔가를 해결해 달라”라고 하면서 한이 섞인 주장을 하고 있다. 비단 오늘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겠지만 너무 시끄럽다는 생각보다 나름 얼마나 화가 나고 한이 맺혔으면 스피커가 터지라고 목소리 내고 있을까 싶다. 어쩌면 그들의 외침이 그냥 허공을 향해 주먹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지인이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고국에서 망중한을 보낸 후 출국 전날 저녁 식사를 하다가 자기 동생과 별것 아닌 일로 티격태격하다 급기야 밥상을 차버리고 짐을 꾸려서 근처 모텔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혼자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고 한다. 타국에서의 생활에 심신이 지쳤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기 전에 그동안 얼마나 화가 많이 내재 되었으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불같이 화내면서 오랜만의 고국 방문을 망쳤을까 생각하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별것 아닌 걸 가지고 화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건 이제 이상한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우리 한국인은 화를 크게 또 자주 내는 걸까?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토론을 하면서 삿대질하는 건 또 왜일까? 화를 참고 화를 적게 내는 건 정말 불가능한 걸까? 많이 궁금하다. 화를 삭이게 하는 첫 번째 요소는 ‘진정한 사과’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사과는 상황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태도를 갖추며,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사과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원만한 화해를 위해 진정한 사과를 하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활용하면 어떨까 싶다.


첫째,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 아울러, 실수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사과는 당연히 진심 어린 마음으로 해야 한다. 상대방의 감정과 피해를 이해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실망이나 상처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셋째, 사과의 언어와 태도가 중요하다. 상대방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겸손한 태도로 사과해야 한다. 상황을 과장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정중하고 명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넷째, 단지 사과만으로 끝나지 않고, 실수를 반성하고 개선하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상대방에게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다섯째, 사과할 때는 상황과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해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선택해야 한다. 상대방이 화나거나 상처받은 상태라면 조용하고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


이처럼 진정한 사과는 상대방의 마음을 보듬고 이해하는 자세를 갖추며, 상대방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개선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사과를 통해 서로의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위에 언급한 방법을 활용해서 서로 대화했더라면 독일 지인이 혼자 쓸쓸하게 출국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 같아 지금도 많은 아쉬움이 있다.

선택의 기로 ──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선택은 결정과 같은 의미 아닐까 싶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의 취업을 포기하고 미국 대학원에 입학해야 하는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당시 녀석은 중앙직 7급 공무원 시험에 최종 합격한 상태여서 그냥 편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었음에도 미국 대학원에 유학하기 위해 GRE 시험을 거쳐 아이비리그 대학 3곳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요즘 7급 공무원은 고시와 같다면서 취업을 택하는 걸 권유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아들과 둘이서 북한산 족두리봉을 오르면서 많은 대화를 했다.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하지 않고 유학을 선택한다는 건 불확실한 미로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학비를 부담해 주신다면 한번 개척해 보고 싶다는 당찬 아들의 결정을 아버지는 존중해 주기로 했다.


아들이 컬럼비아대학에 유학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감으로 너의 길을 개척하거라” 하면서 아버지는 흔쾌하게 동의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미친 짓이다’ 같은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반대가 심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는 본인임을 전제하고 아들은 일정에 맞춰서 뉴욕으로 출국했으며, 아버지는 아들이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보내는 수고를 감당해야 했다. 다행히 아들이 최우수 논문상을 받고 뉴욕에 있는 영국인 기업에 스카우트돼 취업하자, 이번에는 그동안 아들 유학에 비판했던 많은 사람이 언제 그랬냐 싶게 “미국 유학은 현명한 선택이었다”라며 칭찬하기 바빴다. 아들은 삼성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으나 미국에서 머무는 걸 택해 현재 컬럼비아대학 후배와 결혼하여 뉴욕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미국인 사장으로부터 역량 있는 엔지니어로 평가받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취업했을 경우와 현재 미국에서의 생활 중 어떤 것이 더 현명한 것인지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본인만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또 크고 작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선택의 기로에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는 자신의 목표와 가치를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목표와 가치가 명확하다면, 선택할 옵션들이 이에 부합하는지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둘째는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택할 옵션들에 대해 연구하고 조사한다면 잠재적인 결과와 영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전문가의 의견이나 경험을 듣고 참고할 수도 있다.


셋째는 선택한 각 옵션에 대해 잠정적인 결과를 예측하고 평가해야 한다. 특히 장기적인 이익과 단기적인 희생, 가능성과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아울러 어떤 결과가 자신의 목표에 가장 부합하고 가치를 실현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는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옵션이 있다고 하면, 각 옵션을 비교해서 각각의 장단점을 고려해야 한다. 가중치를 부여하여 어떤 옵션이 더 우선순위를 가져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다섯째는 합리적인 결정은 단순한 분석과 계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직관과 내면의 소리를 듣고 신뢰해야 한다. 내 감정과 직관이 나에게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려줄 수 있다.


여섯째는 가능한 여러 시나리오를 상상해보고 각각의 결과와 후속 조치를 고려해야 한다. 또 선택한 옵션이 실패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계획해야 한다.


일곱째는 선택한 옵션이 특정 위험을 내포한다면, 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 특히 위험을 최소화하거나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덟째는 결정을 내리면 적절한 행동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선택한 길을 따라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


특히,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완벽한 결정은 없다고 본다. 실패하거나 후회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또한, 경험을 통해 배우고 조정할 수 있는 유연성과 적응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인정의 욕구 ──

인정의 욕구는 사람들이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주목을 받기 원하는 욕구를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매년 여름철이면 노인들이 무더운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시다 일사병으로 입원하거나 심한 경우 사망했다는 마음 아픈 뉴스를 간혹 접하게 된다. 옛날과 달리 요즘에는 밥을 먹지 못해 노인들까지 무더위 속에서 일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농촌 가정은 아마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왜 노인들은 자식들이 이구동성으로 잔소리처럼 얘기하는 “이제 일 그만하시고 쉬라”는 얘기를 귓전으로 흘려듣고 한여름 뙤약볕에 논으로 밭으로 향하시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인정의 욕구”라고 해석하는데 인정의 욕구는 “타인에게서 자신의 존재 가치 따위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라고 해석되고 있다.

필자 지인 중에 중소기업 대표가 있다. 그는 매일 퇴근할 때면 힘들고 지쳐 맥이 풀린다면서 이제 일은 그만하고 자식한테 회사를 넘겨 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면 여지없이 쳇바퀴 돌 듯 자기도 모르게 자동차 시동을 걸고 있다며 겸연쩍게 웃는다. 그러다 70대 중반이 되면 일찍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했던 자신을 후회할 것 같다고 한다. 그걸 알면서도 지금 하는 일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그것은 가난한 배고픔의 시대를 거치며 성장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치 “음식을 먹고 있으면서 배고픔을 느끼는 것”처럼.


지금 50, 60대가 일 중독자의 늪에서 헉헉대고 있지만 정작 자식들의 생각은 딴 판인 것 같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부모를 향해 “그렇게 살지 마시라”면서 주문하고 있다.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배가 고프다”라는 말이 있듯이 설사 재정적으로 안정된 상태라 하더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 언론매체에서 강연자마다 “일에서 해방하라”라고 여러 탈출 비법을 설명하면서 여유로운 노년의 삶을 강조하지만 50, 60대 대부분이 그런 것은 배부른 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며 간과해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지만 세상의 자식들이여!

허리 구부정한 우리 부모가 지팡이에 힘든 몸 의지하며 무더운 여름 햇볕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에 논밭을 향하더라도 너무 핀잔하지 않았으면 한다. 또 시골에서 노인네가 반찬거리 등 잔뜩 싸 들고 집을 찾아오시거든 때로는 별 소용없는 자질구레한 것일지라도 인정의 욕구 때문이라 생각하고 고맙게 받아주는 자식들이 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우리네 어르신들이 이런 방식으로라도 존재감 표출을 통해 자신의 삶에 조금이나마 자긍심 갖고 사실 수 있도록 폭넓게 이해하고 소화하는 자식들이 되길 기대해 본다.


이처럼 인정의 욕구는 사회적으로 특정한 성향 가진 사람들에게 특히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인정의 욕구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과 행동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인정의 욕구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상호 작용을 중요시하며,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주목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둘째, 인정의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자아 증명을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특별하거나 뛰어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성과를 얻으려고 한다. 이를 통해 인정을 받으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셋째, 인정의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많이 의존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자신에게 대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넷째, 인정의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주목을 받기 위해 다양한 행동을 한다. 이들은 말하기, 행동하기, 차림새 가꾸기, 업적을 달성하기 등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다섯째, 인정의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자주 타인과 자기 자신을 비교한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더 나은 성과를 끌어내려고 하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인정의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외부 인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중요시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받으면 자신감이 상승하고, 자신의 노력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곱째, 인정의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어떤 그룹이나 사회적인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을 중요시한다. 이를 통해 그룹 내에서의 인정을 얻을 수 있으며,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렇듯 인정의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위와 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정의 욕구가 강한 사람한테서 특히 우울증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인정의 욕구에 목말라하는 것은 아니며, 개인의 성격과 경험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참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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