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조르바 같은 삶
조르바, 그는 누구인가 ──
“그리스인 조르바”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로, 20세기 초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조르바’라고 하는 주인공의 삶을 다루고 있으며, 그의 인생 여정과 내면의 변화를 그려내고 있다. 카잔차키스는 에게해를 바라보는 크레타섬에 잠들어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라는 문구가 그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묘비에서조차 ‘오직 자유’를 외치고 있다.
조르바는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혼자서 세상에 대한 의문과 고민을 품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인물이다. 소설은 그의 삶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이슈를 다루며 그리스 사회의 변화와 조르바의 내면 성장을 연결하고 있다.
조르바는 지식인이자 철학자로서 깊은 사색을 추구하며, 정체성과 자아의식에 관한 탐구를 이어간다. 그는 이전의 가치와 전통에 의심을 품고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탐구하며 자아의식을 형성하려고 한다. 소설은 그의 여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 사회적인 압박, 도덕적인 선택 등에 대한 복잡한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또한, 조르바의 삶은 그리스 사회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그려지는데, 그리스의 역사적인 변화와 사회적인 문제들이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작가는 그리스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조르바의 삶과 그가 겪는 여러 어려움, 극복해야 하는 내적 갈등 등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의미와 인간 본성의 탐구를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조르바의 여정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인간 내면 성장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거침없이 자신의 삶을 살다간 조르바와 필자를 주변에서 등식화해서 말하는 경우가 많아서 조르바의 삶을 잠시 소환해 본다.
비판받는 사람이 되자 ──
아들이 미국 유학을 결정했을 때 아버지는 두 가지를 주문했다. 첫째는 청중석에 앉아 단상에서 발표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지양하고, 네가 단상에서 비판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라. 둘째는 친구한테 밥 사는 걸 게을리하지 말라. 위 두 가지를 주문한 이유는 비판에 능한 사람은 대부분 리더가 되지 못한다는 걸 참고했으며, 학생 신분인 상황에서 친구한테 밥을 아무리 많이 산다고 하더라도 1년 통계를 내보면 친구와 내가 계산한 밥값이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많이 베풀고 넉넉한 사람처럼 인식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진수 선생이 집필한 ‘삼국지'와 나관중 선생이 집필한 ‘삼국지연의’를 적어도 한 번쯤은 읽었을 것이다.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하고는 대화도 하지 말라”할 정도니 삼국지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본다. 특히 ‘지도자 꿈을 꾸고 있는 젊은이’라면 유비가 조조에 밀려서 형주로 쫒겨와서 창업정신마저 빛이 바래가고 있다가, 어떻게 재기의 발판을 구축했는지 삼국지를 읽으면서 많은 내공을 축적할 수 있길 희망한다.
삼국지를 대하면서 유비가 제갈량과 어떤 관계를 설정했는지? 그리고 그 둘이 어떻게 해서 삼국통일의 대업이 가능했는지? 살펴보면 흥미롭다. 특히 유비 사후에 제갈량의 유선에 대한 충성심은 ‘약속’ 즉 ‘신의’에 대한 큰 가르침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유비와 제갈량’ 리더십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유비는 한 제국의 황숙이라는 명분 하나로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를 하고 함께 창업을 선언했으나 중앙 정권을 장악한 조조, 지방에 근거를 둔 원소 등 호족들 틈바구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당연히 유비는 관우, 장비 말고는 어떤 인적 물적 기반조차 없어 물적 인적 기반이 풍부한 조조, 원소 그리고 강동의 손 씨와 상대조차 안되었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여기서 유비는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누구보다도 ‘자신이 변해야만 한다’는 변신의 필요를 강하게 느꼈고, 특히 인적 집단의 보강 없이는 자신의 대업을 이루기는커녕 생존 자체도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면서 ‘삼고초려’하는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제갈량을 만나게 되는데, 제갈량의 ‘천하 삼분의 계책'에 못마땅해하는 관우, 장비를 향해 “나에게 ‘제갈량’이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두 번 다시 시비 걸지 말라’며 두 동생의 시비를 정리하게 된다.
분명 제갈량은 난세에 목숨이나 부지하려고 밭을 갈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관중, 악의에 비유할 만큼 가슴 속의 포부가 원대한 인재였다고 생각된다. 여러 정황을 볼 때 제갈량과 유비의 만남에는 분명 ‘서로 통하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따라서 어떤 분야에서건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사람과 그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자신을 인재라고 평가해주는 사람을 위한 제갈량의 노하우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제갈량은 유비가 눈바람을 무릅쓰고 문 앞에까지 찾아와서 요청함에도, 문을 닫고 있었다. 당사자를 만나지 못함에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찾아오게 만드는 제갈량의‘고거고타' 책략과 또 자존심을 묻고 거듭 찾아가는 유비, 둘 다 대단한 인물 아닐까 싶다. 그런데, 왜? 유비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여러 인재 중 ‘봉추’보다 ‘와룡'(제갈량)을 삼고초려 하면서까지 먼저 찾았을까? 황숙이 자존심을 굽혀가면서까지 말이다.
특히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유비 같은 배포로 자발적으로 인재를 찾아 삼고초려 하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과감하게 통째로 변신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도자 꿈을 좆는다면 자신도, 주변에 있는 사람도 피곤하기만 하다. 그리고 결과는 당연히 ‘도루묵’이 된다.
지도자는 “큰 나무 아래서는 작은 나무도 자랄 수 있지만, 풀밭 아래서는 이끼만 자랄 뿐이다”는 격언을 교훈 삼아, ‘필요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고 하는 ‘수구추동’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주변에 인재가 모인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고 본다.
단조로운 삶, 그게 행복 ──
하버드대학에서“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연구를 한 적이 있다. 1938년에 시작한 연구인데 19세 746명 (하버드 학생 373명, 보스턴의 빈민가 동갑내기 373명)이 대상이었다. 당시 그들의 80%는 “돈과 명예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라고 답을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75년간을 추적한 후 다시 “무엇이 당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했는가?”라고 묻자 90대가 된 그들의 생각한 행복의 조건은 “단조로운 삶과 좋은 관계” 였다고 한다.
“단조로운 삶, 그게 바로 행복이다”라는 주장은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주장은 단조로운 삶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단순함과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단조로운 삶의 의미와 현명한 실천 방법을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단조로운 삶은 한 가지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는 현재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더 깊은 경험과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단조로운 삶은 간소한 일상과 소소한 순간들에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것을 강조한다. 작은 성취, 가정생활, 취미, 친구와의 대화 등을 통해 깊은 만족감을 찾을 수 있다.
둘째, 단조로운 삶은 불필요한 변동과 복잡함을 줄이고, 안정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균형을 유지하고 간소하면서도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중요시한다. 우리가 단조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와 목표를 찾고, 그에 따라 삶을 설계하고 행동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순간에 집중하고 삶을 경험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지고 일상 속의 작은 기쁨을 발견하고, 간단한 일들에 몰입하여 깊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단조로운 삶을 살면서 소소한 것들에 감사하고 즐기는 습관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간단한 일상의 순간들에 감사하며, 작은 기쁨들을 찾아내고 나누는 것이 행복을 더욱 높일 수 있다.
셋째, 단조로운 삶을 살고자 할 때는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절한 휴식과 복원, 가족과 친구와의 시간, 취미와 여가활동 등을 조화롭게 조절하여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단조로운 삶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접근법은 아닐 수 있다. 각자의 성향과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행복과 만족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단조로운 삶을 선택한다면, 삶의 단조로움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작은 것들에 감사하며 즐기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단조로운 삶을 통한 행복의 비결은 많은 것 혹은 좋은 것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이미 잘 가꿔진 꽃길을 찾아 걷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놓인 길에 꽃씨를 뿌리고, 가꾸고, 이따금 우연히 발견하는 꽃들에 감사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얘기이다.
아울러, 좋은 관계가 행복의 조건에 해당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과의 연결과 상호 작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좋은 관계는 우리에게 안정감, 소통, 지지를 제공해줄 수 있고, 우리의 감정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특히 사람들과 깊은 연결을 형성하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우리에게 만족감과 소속감을 줄 수 있다. 또한, 어려운 시기에는 좋은 관계가 우리를 지지하고 위로해 줄 수 있으며, 성공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살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뜻하지 않은 순간에 불행이 닥치기도 하고, 원치 않는 선택을 해야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좋지 않아 보이던 선택도 시간이 흘러 돌아보면 오히려 손꼽힐만한 좋은 선택이 되기도 한다는 걸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인생은 수많은 고비를 넘고 또 넘는 과정이다. 그 중간에 아름다운 풍경도 만나고, 때로는 쉬기도 하고, 또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한 번도 고꾸라지지 않고 평탄하게 걸어가는 인생길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삶이란 어떻게 하면 넘어지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뜻하지 않게 넘어지는 순간이 왔을 때 어떻게 다시 일어서느냐가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인생이란 연극에는 본질적으로 고난과 비극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삶의 무게는 더 가벼워지고, 아마도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등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빛 한줄기가 보이지 않을까 싶다. 인생이란 무작정 열심히 산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다 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뜻대로 되는 일보다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특히 삶은 유한하다. 그리고 그 끝이 언제인지,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현재'이며, 매일 매일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어제처럼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명심하면서 말이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인간은 자기가 하는 선택에 의해서 존재 이유를 만들어 간다. 즉, 인간은 스스로 하는 선택들의 결과물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르트르 주장처럼 인간은 삶의 많은 부분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늘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달리 생각하면 무한한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서도 오늘 밤에 시간을 내서 밤하늘 높이 떠 있는 달님을 향해‘소망 엽서’ 한 장 날리면서 행복을 간구하는 시간 가져 보면 어떨까 싶다.
높고 낮은 산봉우리 ──
등산하면서 높은 곳에 올라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줄 수 있다. 마치 발밑에 온 세상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좀 더 등산하다 보면 더 높은 봉우리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조금 전에 낮은 봉우리에서 봤던 세상보다 더 넓다는 걸 알게 된다. 이렇듯 자신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다 보면 자칫 큰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에 생각해 봐야 할 몇 가지 부분과 겸손함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첫째, 우리는 흔히 자신의 경험과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제한된 시각과 편견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눈높이에서만 세상을 평가하면 다양성과 다른 시각을 포용하지 못하고, 편견과 선입견에 빠질 수 있다.
둘째, 자신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평가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자기의 욕망과 이익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가치를 간과할 수 있다.
셋째, 자신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평가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상황과 배경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이는 무지와 오해를 초래하며, 상호 간의 소통과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눈높이를 넘어서 다양한 시각과 경험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겸손함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갖고 있으며, 서로 다른 관점을 공유함으로써 더 넓고 풍부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다섯째, 자신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과 교류를 놓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과 상호 작용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성장할 수 있으며, 인간관계의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내가 볼 때 단지 반추의 대상일 뿐이다. 한때 잘했던 공부가 또 팔을 휘감았던 완장이 50 고개를 넘은 지금 무슨 자랑거리가 될까 싶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눈높이를 넘어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겸손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협력할 때 우리는 더욱 풍요로운 삶과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 읽어야 할까 ──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읽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는 일의 마침표는 대부분 글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기획안을 잘 준비해서 평가를 받고 또 치킨집을 내서 자영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 쪽짜리 전단지에 담을 내용을 함축해서 쓰는 것도 글쓰기이다. 또 졸업 논문을 쓰던 R&D 준비를 하던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던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는 언제나 글을 써야만 한다. 이렇게 글쓰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 아닐까 싶다. 그런데 우리 교육시스템에서 글쓰기 집중 교육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게 많이 아이러니하다.
필자는 여건이 될 때마다 자주 교보문고를 찾는다. 거기에 가면 왠지 편안해지고, 또 마치 뭔가를 많이 얻어갈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읽고 싶은 책을 골라서 두리번거리다 빈 좌석을 발견했을 때 꽤 큰 쾌감을 맛보게 된다. 이것을 작은 행복이라 표현하고 싶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으면 좋을까? 한번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책을 읽으며 대하는 자세에 따라 읽고 난 후 얻어지는 결과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의무감으로 책을 대할 때와 읽고 싶은 책을 대할 때의 느낌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다. 이것은 마치 누구 집에 초대받아 방문했을 때 그 사람의 사는 모습을 느끼는 손님 태도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저자의 집에 초대받아 글쓴이의 세계를 만난다고 생각하고 책을 대하면서 나를 발견해 보면 어떨까 싶다. 그렇게 되면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저자의 사고를 자연스럽게 자신과 일치시키면서 재미있는 책 속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서 저자의 의견에 자연스럽게 흡입돼 꽤 빠른 속도 열차에 탑승해서 듬뿍 힐링할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장휭거’라는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책을 읽음으로써 내 마음을 지킨다. 즉 책을 읽으면서 지키는 것은 내 마음이다. 그런데 그 책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는 순간 그 책이 나의 지배자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말이다. 자칫 내가 주인 자리를 잃고 책한테 그 자리를 넘겨 줄지도 모른다는 얘기이다. “책을 읽는 것은 곧 나를 찾는 것이다”라고 생각해 본다.
언급했듯이 우리가 듣는다는 것은 말을 하기 위함이듯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글을 쓰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또 다른 자기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글 쓰는 것을 꽤 좋아한다. 왜냐하면, 글 쓰는 것 자체가 주는 기쁨과 만족감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쓰려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많이 읽고, 생각하고 또 스스로 많이 느껴야 한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교보문고 책상머리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읽은 책의 수를 헤아려보니 대략 3,000권 정도 되는 것 같다.
글을 쓰는 일은 비우는 동시에 채우는 작업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배움과 깨달음이 덤으로 따라온다고 할 수 있다. 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거나 모르고 있던 것을 새로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쾌감은 형언하기 어렵다. 사랑에 빠지거나 마약을 복용할 때 느끼는 황홀감 같다고 하면 심한 표현일까? 하지만 글 쓰는 일은 행복하면서도 조금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글 쓰는 걸 계속하는 걸 보면 아마‘밑지면서 판다'고 주장하면서도 많이 팔릴수록 좋아하는 상인들 심정과 뭐가 다를까 싶다.
세상과 관계를 이어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필자의 글을 읽고 많은 독자가 응원해 줄 때 힘이 솟아난다. 그리고 크게 감사함을 느끼고 고마움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매년 연말이면 거리 골목은 한 해를 넘긴다는 아쉬움을 핑계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어깨동무하면서 비틀거리는 군상들로 시끌벅적 이게 된다. 그런 것보다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새해를 준비하면 어떨까 싶다. 독자 여러분을 책 속 여행의 동행자로 초대하고 싶다.
삶은 수단일까? 목적일까? ──
더디게만 움직이는 것 같던 시계추가 이제는 빠른 속도로 인생길을 재촉하는 것 같다. 아침을 먹고 돌아앉아서 언제 점심 먹냐? 하시던 어른들의 시간 체험이 이제 내 앞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누구한테 뒤질세라 밤새우면서 헉헉대던 시간도, 동료들과 술잔 기울이며 넥타이를 풀던 시간도, 또 지각할까봐 지하철역에서 냅다 내달리며 땀 흘리던 시간도 이제 추억의 창고에 저장돼 소환날짜 기다리며 낮잠을 자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걸 가져 보겠다”라며 두 손 꽉 움켜쥐고 포효하면서 세상에 얼굴을 내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 고개에 들어서고 있는 인생역정을 되돌아보면서 색소폰 음률에 서유석의 ‘가는 세월’을 연주해 본다. 삶은 과연 늙어가는 걸까? 아니면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익어가는 걸까? 불현듯 우리네 인간의 삶이 참으로 복잡 미묘한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삶이란 육체일까? 아니면 정신일까? 그리고 삶은 영혼일까? 기억일까? 혹시 삶이 다른 존재들과는 어떤 관계일까?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계란이다”라고 읊조리면서 삶의 개념을 단번에 정리해 버린 개그맨 김형곤 씨가 문득 생각난다.
어느 철학자는 주장하고 있다. "인생이 항상 평화롭기만 하고 특별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는 죽은 인생이다. 삶은 결과로써의 삶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라고 말이다.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삶은 소풍이다’ 하면서 갈 때 쉬고, 올 때 쉬고, 또 중간에 틈나는 대로 쉬라면서 일갈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생을 바쁘게 살지 말라고 주문한다.
장자는 “우리는 세상에 일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또 성공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것은 다 부차적이고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는데 장자의 심오한 의미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라고 하면서 아침에 소 몰고 농사지으러 밭에 나가듯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라고 노스님이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라고 하면서 껄껄 웃는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지면 언제나 연등 행렬이 종로거리를 환히 밝혀준다. 그리고 성탄절이 다가오면 거리에는 구세군 냄비가 등장한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일탈해 인생 철학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삶은 수단일까? 아니면 목적일까?
삶은 결국 자기 몫 ──
우리 모두에게는 궁극적으로 미래의 자기 모습과 운명을 정할 환경을 선택하고 조성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한 환경과 외부 영향이 앞으로의 우리 모습에 직접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는 “종달새가 우는 소리를 들어도, 들녘의 철새들 군무를 보면서도 또 내일 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설렘이 없다면 이미 나는 죽은 것이다”라며 주장하고 있다. 단지 우리로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 우리는 작은 연못의 큰 물고기이다. 하지만 또 다른 환경에서는 큰 연못의 작은 물고기가 될 수도 있다. 즉 환경을 바꾸는 것이 바로 나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 옆에서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 되고, 어떤 사람 옆에서는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즉 내가 절대적인 가치관과 변함없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가치와 능력은 고정돼 있지 않고‘체스보드 위’ 주장처럼 상대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 간의 관계, 즉 상황이 실재라는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세상은 당신이 변하기를 원한다. 환경은 약한 자를 지배하지만, 현명한 사람에게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 된다”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내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인으로 살지 못하면 그것은 노예로 사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충동으로부터 해방하라”라고 많은 사람이 외치고 있다. 학벌이나 지위, 아니면 남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들을 향해서 많은 사람이 돌진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는 경우 ‘나는 소외됐다’ 단정하는 경우가 많은 데 그렇다면 재벌이나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이 삶의 주인이 됐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외적으로 접근하는 데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 내부에서 무엇인가 주인이 되는 장애 -두려움과 충동-를 찾아내 해결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주인이 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세상을 변화시킬 훌륭한 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는 영감도 얻지 못하고 마음속 깊이 간직한 꿈조차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더욱 불행한 경우는 자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때이다. 우리는 현명하면서도 강한 존재로 태어났다. 오직‘나’만으로 산다는 게 쉽지 않지만, 또 그렇다고 포기할 정도로 어렵지도 않다고 본다. 한 번쯤은 바쁜 일상을 쪼개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땀을 줄줄 쏟으며 오로지‘나'만으로 사는 길을 찾아 떠나는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삶은 결국 자기 몫”이라는 것은 우리 개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구이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책임지고, 그 결과에 따라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첫째로,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성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자유의지와 선택의 권한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가치, 목표, 욕구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어떤 가치를 추구할지는 우리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 우리는 자기 몫을 자기가 결정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둘째로, 자기 몫을 맡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성장과 발전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우리 자신이 선택한 길을 따라가고 그 결과를 직면하게 된다.
셋째로, ‘자기 몫’은 성장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을 습득하고 기술을 개발하며, 자기 자신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데 노력해야 한다. 자기 몫을 맡는 것은 자기계발에 투자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삶은 결국 자기 몫”이라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몫을 맡아 삶을 주도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는 우리 개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삶은 결국 자기 몫”은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성과 책임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 하며, 성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생은 복잡하고 다양한 도전과 선택의 연속이다. 그중에서도 “삶은 결국 자기 몫”이라는 문구는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과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행동하고, 그 결과에 따라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주체성은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이는 주체성과 자유의지, 선택과 결정, 책임과 성장, 자기계발과 자아실현, 타인과의 상호 작용과 책임에 대한 의미를 갖는다. “삶은 결국 자기 몫”은 우리에게 자유와 자기실현의 기회를 제공하며, 우리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존재의 본성 ──
‘존재의 본성’은 개체나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이나 본질을 나타내는 개념이며,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특징을 의미한다. 존재의 본성은 대상의 본질적인 특징이나 가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며 존재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사람에 있어서 존재의 본성은 이성과 감성, 윤리적인 가치, 사회적 관계 등을 포함할 수 있다. 각각의 개인은 고유한 성격, 재능,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요소들이 그들의 존재의 본성을 형성한다.
또한, 존재의 본성은 대상의 행동이나 특징의 근본적인 이유나 원인을 설명하기도 한다. 개체나 사물이 가지는 본성은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거나 행동하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식물이라는 존재의 본성은 자외선을 흡수하고 이를 에너지로 변환하는 광합성이다. 이러한 본성이 그 식물이 자연적으로 자라고 생존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존재의 본성은 종종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는 예로서 인간의 본래적인 선한 본성을 주장하는 이상주의와 인간의 악한 본성을 강조하는 비이상주의 사이의 논쟁이 있다. 이러한 논의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사회적, 문화적 요소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포함한다.
결과적으로, 존재의 본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이나 특징을 나타내며, 그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개념을 말한다. 이는 대상의 특성과 동작의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면 좋은 사람, 내가 나빠하면 나쁜 사람이지 처음부터 좋고 나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선현들은 이게 “세상의 이치”라고 일찍이 강조하셨다. 아울러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지만 원래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냥 내가 좋아하면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한테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는 나쁜 사람인 경우도 있는 법이다. 또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충족시켜 줄 사람을 기대하지만 그런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점을 참고했으면 한다. 그걸 착각하지 않아야 상처를 받지 않는다.
강철은 강하고 날카롭지만 부드럽지 못하고, 솜은 부드럽지만 강하지 못하다. 이것을 사람들은 "존재의 본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부드러우면서 강하길 바라는 어리석음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더라도 강하면서 부드러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본다. “내가 좋은 사람이면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샤를르 드 푸꼬(1858~1916) 신부님 글 중 일부를 잠시 소환해 본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나를 다 좋아해 주지는 않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도 나를 미워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합니다.
내가 그에게 좋은 말로 대해 주면
그도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요.
내가 그에게 퉁명스럽게 얘기하면
그도 내게 반감을 가지게 되지요.
내가 그를 죽도록 미워하면
그도 나를 죽도록 미워합니다.
내가 그에게 사랑스럽게 대해 주면
그도 나에게 사랑스럽게 대해 주지요.
내가 미운 사람이면 모두가 미운 사람.
내가 나쁜 사람이면 모두가 나쁜 사람.
내가 행복해하면 모두가 행복해 보이고,
내가 좋은 사람이면 모두가 좋은 사람입니다.
도전 정신 ──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다'라 신념과 용기를 가졌을 때 목적한 바와 그 이상의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본다. 처음부터 ‘나는 할 수 없다'든지, ‘내가 꼭 해야 할 바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문제해결은 요원하다. 직장인의 경우 자칫 동료들과 직장 전체의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예전 세대는 ‘하면 된다'는 구호를 부르짖으며 일에 임했고 그 결과로 오늘의 한국 경제를 쌓아 올렸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하면 될까'라는 소극적인 자세로 변했고, 소수의 청년은 ‘하기 싫다'라는 쪽으로 흐르기도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따라서 “나는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고, 우리 사회는 족히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의지와 신념을 가졌으면 한다. 어떤 사회적 문제건 ‘해결의 주체는 바로 나'라는 의식이 전제될 때 그리고 내가 실행 주체가 될 때 미로의 문은 열린다고 할 수 있겠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왕의 이름으로, 그가 어떤 조각상을 보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성인가!”라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더니 마침내 그 조각상이 인간으로 변했다고 한다. 즉 사람은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교훈 아닐까 싶다. 또 어떤 이유에서건 나는 주도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누가 대신해주겠지? ‘언감생심’이라고 본다. 뒷전에서 그것도 익명으로 삿대질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없다는 걸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오죽하면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에 비유했을까 싶다. 이런 교훈을 기억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다. 장기판 훈수꾼이 많은 집단에서의 변화 추구는 ‘연목구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긍정적 자세를 갖고 내가 솔선하는 기상이 요구되는 요즘이다. 아시다시피,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변화를 기대하기 전에 자신의 변화가 먼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총 들고 나서지 않을 때 내 재산, 내 가족 지켜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컵에 물이 반쯤 있을 때 절반밖에 없다고 하는 사람과 절반이나 있다고 하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쪽 사람에 속할까? 긍정의 마인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강조하던 ‘하면 된다'는 기개로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 먼저 찾아 나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서생의 문제의식으로 또 상인의 정신으로 현실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하던 DJ 어록이 문득 생각나는 요즘이다. 아일랜드 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그의 묘비에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유명한 글씨를 남겼다. 이 글귀는 필자가 오래전 안철수 의원이 결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 그에게 던졌던 문구이다.
‘찰스 다윈’은 주장하고 있다. “가장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는 동물들은 일반적으로 거의 동일한 구조와 성질, 습관을 가지고 있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속의 가장 유사한 종이다”고 말이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예술가와 암벽 등반가의 경쟁은 별 의미가 없다. 또 암벽 등반가는 기술 수준이 비슷한 등반가와 서로 경쟁함으로써 기술을 발전시키게 된다. 따라서 사업가도 같은 업계의 사람들과 경쟁해야 한다. 그리고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의 경쟁은 느리고 미미한 발전만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성장을 원한다면 현재 자신보다 앞서가는 사람들과 경쟁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서 보다 앞선 규칙에 따라 사는 법을 빠르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쉬 웨이츠킨’은 저서 “배움의 기술 : 내 실력을 200퍼센트 끌어올리는 힘”에서 이 원리를 어떻게 적용해서 세계적인 태극권 고수가 됐는지 설명하고 있다. ‘웨이츠킨’은 자율 훈련시간이 주어질 때 수강생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기술 수준이 자신과 같거나 약간 낮은 수강생들과 연습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그 이유를 자존심 때문일 가능성이 컷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체 누가 지고 싶겠는가? 누가 어려운 상황으로 스스로를 내몰겠는가?” 그런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이츠킨’은 ‘실패에 투자한다’라는 자신의 규칙에 따라 자율 훈련 시간에 일부러 자신보다 훨씬 기량이 앞선 사람들과 연습했다고 한다. 당연히 계속 걷어차였지만, 이런 시도는 그의 기술을 단시간에 크게 발전시켰다고 회고하고 있다.
즉 ‘후성유전학’에서는 환경이 선천적인 DNA보다 유전자 구성에 훨씬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캘리포니아대학의 사회유전체학연구소 소장인 ‘스티븐 콜’ 박사는 “세포는 경험을 생명 활동으로 바꾸는 기관”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비슷한 수준의 사람과 경쟁하기보다 당신이 도달하고 싶은 수준의 사람과 경쟁하라. 항상 자신의 능력 이상을 추구하라. 성공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가 거기에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간혹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실력이 있는 사람들과 경쟁하는 일은 단지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 시킬 뿐이다” 즉 에너지 소모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건 별개라는 것이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재 상황을 기초로 결정을 내리는 반면, 성공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위치를 근거로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 따라서 “최고의 능력을 끌어내려면 공개적으로 경쟁하라”라고 주문하고 싶다. 1955년부터 러시아(당시 소련)와 미국 사이에서 시작된 ‘우주 개발 경쟁’이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전문가 시대 ──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학벌 사회’가 이제 ‘전문가’ 사회로 본격 전환되고 있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으로 일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긍정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우리네 부모들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어지간하면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당연히 소년의 부모도 그랬다.
그래서 내가 갖지 못한 학력의 배고픔을 자식이 대신해서 충족시켜 주길 바라는 간절함에 자신의 굶주림은 뒤로 한 채 소 팔고 논밭 팔아서 자식의 등을 떠밀지 않았나 기억된다. 그러다 보니, 공고, 상고 등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은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생으로 취급하는 별로 달갑지 않은 문화가 상당 기간 우리 사회를 지배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문화가 MB정부 들어서 특성화 고등학교가 육성되고 정차 우수한 아이들이 입학하고 사회에 일찍 진출해 입지를 갖게 되고 병행해서 국가에서 NCS 제도까지 도입해 기술인을 본격 우대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굳이 대학만을 고집할 필요를 밀어내지 않았나 싶다.
병행해서 고등학교 재학 중에 일찍 기업체에 취업하고 대학진학까지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줌으로써 부모들이 희망하던 학력의 배고픔까지 해소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일하면서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는 양수겸장의 혜택을 기술자에게 제공함으로써 또래 학생들보다 먼저 디딤돌을 밟고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굳이 인문계 고교 진학에 핏대 올릴 필요가 없게 되지 않았나 싶다.
아울러 건물 옥상에서 돌을 던지면 지나가는 사람 중에 돌에 맞는 사람 10명 중 6명이 박사학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이제 학위는 큰 의미가 없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
“요즘 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상당수가 놀고 있다” 그리고 “유럽에 비해 대학이 지나치게 많고 대학 경쟁력조차 55개 대학 중 53위다” “대학을 때려 부숴야 한다”면서 열변 토하던 어느 신부님 말씀이 새삼 와닿는다. 신부께서는 차라리 그 돈으로 가게를 차려 주든지 아니면 부모가 쓰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렇듯 사회에서 또 기업체에서 요구하는 게 학위보다 전문성이라는 게 요즘 세태임을 고려한다면 지금이 바로 전문가 시대 아니고 뭘까 싶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은 많은 분야에서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함정은 전문가들이 자주 경험하는 문제 중 일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전문가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일부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깊게 몰두하면서 업무 중심의 터널 비전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자신의 도메인에 대한 지식과 기술에 집중하면서, 넓은 시야를 잃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회를 놓치거나, 다른 분야의 발전과 트렌드를 놓칠 수 있다.
둘째, 전문가들은 자신의 선호도와 관련된 일에 더 흥미를 느낄 수 있다. 이는 자기 선호도의 편향을 유발하고, 다른 옵션들을 간과하거나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편향은 전문가들이 새로운 관점이나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고, 혁신적인 접근법을 놓칠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셋째, 과거의 성공은 전문가들에게 자신감과 안정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과거의 방식과 접근법에 과신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새로운 도전과 변화에 대한 저항이 생기고, 혁신적인 발상이 억눌리게 된다. 이는 성장과 발전을 방해할 수 있는 요인이다.
넷째,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많이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보 과부하를 초래할 수 있다. 과다한 정보는 전문가들이 중요한 정보를 필터링하고 우선 순위를 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하며, 의사 결정에 혼란을 줄 수 있다.
다섯째, 전문가들은 종종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피로와 과부하에 빠질 수 있다. 지속적인 업무 압박과 스트레스는 전문가들의 창의성과 열정을 저해할 수 있으며, 심각한 경우에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전문가들이 위에 언급한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전략을 고려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첫째,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갖는다.
항상 자기 선호도의 편향을 확인하고 다른 옵션들을 고려한다. 과거의 성공에 너무 의지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도전과 혁신에 개방적인 마음가짐을 갖는다.
둘째, 정보를 필터링하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습관을 갖는다.
균형 있는 삶을 유지하고 휴식과 복원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전문가들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성장과 발전을 이루며, 지속적인 전문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