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좋은 이유

by Kosop

처음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접했을 때, 그것은 예고 없이 찾아온 우연이었다. 추천은 친구로부터 왔고, 선택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화면 속 인물들은 말이 없었고, 이야기는 느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속도와 침묵은 더 이상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간결함 속에서 어떤 진실이 스며나오는 것을 느꼈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주고, 남기고, 흘려보낸다. 그의 인물들은 대사보다는 몸짓으로, 표정보다는 부재로 말한다. 그들이 사는 공간은 빈약하지만, 그 빈약함 속에서도 인간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낡은 카페의 카운터, 고장난 자동차, 흐릿한 형광등 아래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의 영화에는 실패한 자들, 버려진 자들, 말 없는 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패배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있다.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존재 자체가 어떤 저항이 된다. 카우리스마키는 이들의 삶을 미화하지도, 비극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이 마주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놓아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현실 속에서도 웃음이 있고, 음악이 있고, 작은 연대의 순간들이 있다.

그의 유머는 통속적인 웃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웃음 뒤에 가려진 허탈함이나 부조리를 드러낸다. 인물이 갑자기 춤을 추거나, 아무런 이유 없이 벽을 내려다보는 장면들은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공감된다. 그것은 삶의 부조리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와 닮아 있다. 웃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쓰린다.


카우리스마키의 정치성은 선언적이지 않다. 그는 계급이나 이념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그의 영화는 그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노동자의 손, 빈민가의 거리, 이주자의 얼굴—이것들은 모두 말하지 않는 정치다. 그의 영화는 사회적 약자에게 연대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존재할 권리만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안에서 어떤 위안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안.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위안. 카우리스마키의 세계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진실하다. 그의 영화는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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