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감독이 제시하는 영화적 시선의 진화
전주국제영화제 동물 촬영법의 세 가지 가르침: 디즈니, 숙스도르프, 프라마르티노 <오래된 물레방앗간>, <분열된 세계>, <네 번>를 보고 난 이후 작성한 글입니다.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동물 영상을 본 것은 언제인가?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은 정말 '동물'을 보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욕망'을 보았는가?
전주국제영화제의 "동물 촬영법의 세 가지 가르침" 프로그램이 던진 질문은 단순해 보였다. 동물을 어떻게 촬영할 것인가? 하지만 스크린이 꺼진 후 남은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성찰이었다. 월트 디즈니의 <오래된 물레방앗간>(1937), 베르트 숙스도르프의 <분열된 세계>(1970),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의 <네 번>(2010). 7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만들어진 세 작품은 동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그리고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디즈니의 달콤한 지배 - 자연을 상품으로 만드는 마법
1937년 디즈니가 선보인 <오래된 물레방앗간>은 겉보기에는 목가적인 자연 다큐멘터리다. 물레방앗간 주변의 작은 생명체들이 계절의 변화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린다. 올빼미, 다람쥐, 새들이 등장하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며, 모든 것이 조화롭고 평화롭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1930년대 할리우드 산업이 자연과 맺었던 식민지적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디즈니는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위해 인위적인 세팅을 만들었고,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장면들을 자연에서 촬영된 것처럼 편집했다. 동물들의 행동은 실제 생태적 관계보다는 인간이 원하는 드라마틱한 서사에 맞춰 재구성되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자연을 인간의 오락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 장치로 보는 시각이다. 동물들은 인간이 투사하는 감정과 서사를 대신 연기하는 배우들이 되었다. 디즈니의 카메라는 동물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연출'한다. 마치 완벽하게 통제된 무대에서 예측 가능한 감동만을 생산해내는 것처럼.
이는 기술적으로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다중 카메라 촬영, 정교한 편집, 음향과 영상의 조화는 후에 자연 다큐멘터리의 표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 기술적 혁신은 자연을 더욱 효과적으로 '상품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디즈니는 자연을 보는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자연을 소비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숙스도르프의 냉혹한 렌즈 - 관찰자의 윤리와 거리 두기
1970년 베르트 숙스도르프의 <분열된 세계>는 디즈니의 목가적 환상을 산산조각 낸다. 이 작품은 동물원이라는 인위적 공간에서 동물들의 일상을 담는다. 하지만 여기서 '일상'이란 감금, 스트레스, 부자연스러운 행동의 연속이다.
숙스도르프의 카메라는 잔혹할 정도로 정직하다. 철창에 갇힌 표범의 반복적인 보행, 좁은 공간에서 의미 없이 움직이는 코끼리, 관객들의 시선에 노출된 원숭이들. 그는 동물들의 '귀여운' 순간이나 '감동적인' 장면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대신 동물원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폭력을 냉정하게 기록한다.
이는 1960년대 말 서구 사회의 급진적 각성과 궤를 같이 한다. 베트남 전쟁, 민권운동, 반문화 운동이 기존의 권위와 시스템을 의문시하던 시대, 숙스도르프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슨 권리로 동물을 감금하는가? 그리고 그 감금을 '교육'이나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가?
그의 촬영 방식은 '시네마 베리테'의 영향을 받았다. 최소한의 개입, 긴 테이크, 자연스러운 조명. 하지만 그의 '베리테'는 단순한 현실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그의 카메라는 동물원의 '진실'을 폭로하지만, 동시에 그 진실을 바라보는 관객(인간)의 위치도 문제 삼는다.
특히 주목할 점은 숙스도르프가 동물들의 '주체성'을 인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물들을 인간의 감정을 투사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그들만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가진 개체로 접근한다. 카메라는 멀리서 관찰하는 시선을 고집하며, 동물과의 거리를 의식적으로 유지한다. 이는 '이해할 수 없음'의 불편함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프라마르티노의 순환하는 시간 - 존재론적 평등의 실험
2010년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의 <네 번>은 또 다른 차원의 혁신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염소 떼가 산에서 계곡으로, 계곡에서 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담는다. 그런데 여기서 '주인공'은 염소들이다. 인간은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염소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인다.
프라마르티노의 카메라는 염소들의 시선 높이에 맞춰진다. 때로는 염소들 사이에 섞여 함께 이동하고, 때로는 염소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이는 단순한 기법적 실험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평등에 대한 선언이다. 인간과 동물, 문명과 자연 사이의 위계를 해체하려는 시도다.
작품의 구조 자체가 순환적이다. 네 번의 계절 변화, 네 번의 이동,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 여기서 시간은 직선적 진보가 아니라 원형적 회귀다. 이는 서구 근대의 시간관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다. 발전과 성장, 목적과 성취로 점철된 인간의 시간 대신, 자연의 리듬과 동물의 생체시계가 영화의 시간을 지배한다.
흥미롭게도 <네 번>은 거의 대사가 없다. 인간의 언어 대신 바람소리, 발걸음 소리,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영화의 '언어'가 된다. 이는 인간중심적 소통 방식을 벗어나려는 시도로 읽힌다. 프라마르티노는 인간의 언어로 동물을 '설명'하는 대신, 동물들의 존재 방식 자체를 영화의 문법으로 만든다.
이런 접근은 최근의 '신유물론'이나 '객체지향 존재론' 같은 철학적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인간을 특권적 주체로 보지 않고,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행위자 중 하나로 보는 관점이다. 프라마르티노의 카메라는 이런 철학적 통찰을 영화적 언어로 번역한다.
세 시선이 던지는 현재적 질문들
세 작품을 연속으로 보고 나면, 동물을 촬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지 깨닫게 된다. 디즈니는 동물을 인간의 오락 산업에 복무하는 존재로 만들었고, 숙스도르프는 그런 폭력적 관계를 폭로했으며, 프라마르티노는 아예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 진화가 단순히 '발전'의 서사는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접근 방식은 그 시대의 특정한 문제의식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디즈니의 '순진한' 자연 사랑에는 산업 자본주의의 논리가 숨어 있고, 숙스도르프의 '비판적' 시선에는 여전히 인간중심적 관점이 남아 있으며, 프라마르티노의 '탈인간중심적' 접근에는 때로 관념적 추상화의 위험이 도사린다.
관객에게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동물을, 그리고 자연을 어떻게 촬영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튜브의 동물 영상, 인스타그램의 펫스타그램, 넷플릭스의 자연 다큐멘터리까지. 우리는 매일 수많은 동물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시선을 재생산하고 있는가?
특히 한국의 맥락에서 이 질문은 더욱 복잡해진다. 급속한 산업화로 자연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동물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 K-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지금, 우리는 어떤 자연관과 동물관을 세계에 전파하고 있는가?
세 감독의 서로 다른 접근은 하나의 중요한 통찰을 공유한다. 동물을 촬영하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 정치적, 존재론적 문제라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이미 특정한 권력관계 안에 들어서게 된다. 문제는 그 관계를 어떻게 성찰하고 변화시킬 것인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만들어내는 권력관계를 의식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성찰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세 감독이 각자의 시대에서 보여준 것도 바로 그런 성찰의 과정이었다.
동물을 촬영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촬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동물을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을 반영한다.
마지막 질문: 다음에 동물 영상을 볼 때, 당신은 무엇을 보겠는가? 그리고 그 선택이 만들어낼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전주의 어둠 속에서, 세 편의 영화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들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우리가 써나가야 할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