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想(26)
습하고 더운 기운이 온몸으로 칭칭 감겨오는 염천지절이다.
간만에 그늘이 보여 눅눅해진 마음을 말리며 세차를 했다. 땀으로 목욕하며 평소보다 더 꼼꼼히 닦고 왁스
까지 발라 번쩍번쩍 광을 냈다. 다음 주, 7년을 동고동락하며 큰 사고와 잔 고장 없이 튼실한 발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던 차를 멀리 보낼 예정이다.
나의 애마는 음악 감상실로, 때로는 수면실로 온전한 개인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늦은 밤 출장길에는
잠깐의 에너지 충전소가 되기도 했다. 은퇴를 당한 해에는 전국을 일주하며 울화로 씩씩거리고 있는 심장을
살살 달래주었다. 그동안 세상 눈치 보느라 자기만의 인생을 제대로 운전해보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왔다.
시간에 밀려 산으로 들로 몰려다니며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고교육 유목민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닌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자동차는 마음먹은 대로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거세당한 수컷의 조종을 울리는 강력한 슈퍼파워다. 불평불만이 없는 충성스러운 시종이다. 밋밋한 삶에
상큼한 비타민이다. 위시리스트 상단은 늘 자동차 몫이다.
삶의 속박에서 벗어나고픈 무한 질주는 사내들의 원초적 본능이다. 수컷들의 차부심은 영원할 것이다.
세렝게티 초원을, 알래스카 설원을 누비고 다녔던 사냥꾼의 DNA가 살아 있다면...
이제는 7년을 함께한 녀석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다. 새 차로 바꾸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다. 묵묵히 자기소임을 다한 우직한 충성스러움이 선택의 발목을 잡았다. 비록 생명이 없는 쇳덩어리일지라도 듬직하고 말수
가 적으며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충성스러운 친구였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화도 내고 기쁜 일에는 환호도 하고 또 책도 읽을 수 있었다. 좋은 일, 나쁜 일을 모두 함께한 녀석을 별다른 이유 없이 비즈니스에 도움이 된다는 명분으로 이제 이별하려는 것이다. 매몰차게
정 떼기 하는 건 아닌지 자책도 해본다.
새롭게 만날 녀석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갈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큰 사건 사고 없이 잘 사귀어 10년을 해로(偕老)했으면 한다. 어디는 연결되는 튼튼한 사회적 관계의
그물을 잘 직조하며 마지막 남은 나의 품생폼사를 빛내줄 징표가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