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34도 무더위에 긴바지를 입는 이유

자카르타 건기와 우기 사이

by Indah



1년 내내 덥다는 동남아에 살면서 에어컨 없이는 못 살지만, 어느덧 에어컨 바람에 거부감이 드는 아이러니한 시기를 맞이했다.


차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한 이곳에서, 차에 타자마자 쏟아지는 서늘한 냉기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일상의 '기본 값'이 되었다.


주로 차에서 실내로, 다시 실내에서 차로 이동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다렸다는 듯 풀가동 중인 에어컨 바람이 나를 맞이한다. 잠깐의 바깥 온탕에서 실내의 얼음장 같은 냉탕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극단의 기온 차를 오간다.


에어컨 없이는 단 1분도 견디기 힘들 때도 있지만, 정작 그 인위적인 바람은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유난히 세차게 쏟아지던 이번 우기도 이제 끝자락에 와 있다. 최근 며칠, 전보다 더한 더위로 지치는 체력을 보며 건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껴진다. 사실 이번 우기는 꽤 좋았다.


시원한 빗줄기와 바람 덕분에 에어컨의 구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찬 비에 미세먼지가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동남아는 1년 내내 여름'이라고만 생각했던 초기 시절과 달리, 이제는 이곳의 미세한 계절의 변화를 읽어낸다. 30도가 넘는 날씨에 긴팔과 아우터를 챙겨 입는 현지인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한국에서 갓 온 여행자 모드로 반팔과 반바지를 고수하던 내가 어느덧 반바지보다 긴바지가 편하고, 우기가 가까워지면 알아서 얇은 긴팔을 챙겨 입는다.


바지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나의 인도네시아 적응도도 깊어졌다. 가벼운 여름옷들 틈에서 자주 꺼내 입을 긴팔과 가디건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내 모습.


한국처럼 뚜렷한 사계절은 없어도, 적도 나라의 우기와 건기, 그 사이의 미묘한 환절기를 느낄 수 있다.


지금 이곳은 서늘했던 우기를 지나 무더운 건기로 넘어가는 중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아마 '봄'을 지나는 중일까.


건기의 메마른 뜨거움이 두렵기도 하지만, 이 더위 또한 내가 선택한 이곳 삶의 배경임을 받아들인다.


타국에 적응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나라가 가진 가장 불편한 온도조차 내 삶의 기본값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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