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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시래기

by damotori

by 다모토리
할머니와 시래기


Leica M4 / 50mm F2 Summicron DR / Tri-x (+2), 장암


봄이 왔다. 집집마다 겨울 양식으로 말려 놓았던 시래기가 죄다 사라지고 벽담 모퉁이에 달랑 한 코 뎅이만 남은 걸 보니 지금이야말로 한창 봄인 게다. 날이 풀려 온 천지에 산나물, 들나물이 새록새록 올라오면서 비쩍 하고 마른 품새 사나운 시래기는 주인장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화창한 봄날 겨우내 코가 질리도록 먹었던 시래기 국이 또 올라오자 지겨운 어린 맘에 내가 툭 밀어내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밥상머리에 국 단지를 고쳐놓으시며 하시던 말씀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밥 속에 넣으면 나물이 되고 된장에 넣으면 국이 되고 둠벙(연못)에 붕어라도 잡아오는 날에는 붕어 매운탕이 되는 게 시래기란다.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녀석이 하도 우리 손주 놈 같아서 벌써 봄이 온지도 몰랐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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