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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Dec 31. 2015

잊었던 아침을..체스키 크룸로프

체스키 크룸로프 (Cesky Krumlov)


2005년 일라이 호스 감독의 [호스텔]이란 영화가 전 세계에 개봉되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제작을 맡은 이 스플래터 공포 호러물은 배낭여행객이 슬로바키아에서 겪게 되는 끔찍한 경험을 영화의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 음습한 중세의 고택들이 무시로 등장하지만 사실 이 영화의 실제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부시다는 중세마을이 배경으로 활용되었다. 바로 체코의 보석. 체스키 크룸로프다. 


체코 남부의 체스키 크룸로프(Český Krumlov)는 보헤미안의 흔적이 서린 중세도시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체코를 여행하는 배낭족들에게는 프라하를 거쳐 빼놓지 않고 꼭 한번 가봐야 하는 중세 도시 중 하나다. 이곳은 체코의 중세 도시 가운데 가장 역사적 가치가 높고 보존이 잘 된 곳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에서 열차로 4시간, 남부 보헤미아의 중심도시 체스키 부데요비치에선 버스로 45분(25km)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스트리아의 린츠를 통해서도 갈 수 있다.



크롬로프 성에서 바라 본 아담한 마을풍경


보헤미안의 흔적이 서린 중세마을 


블타바 강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중세도시인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를 비롯해 호란 비체, 쿠트나 호라 등과 함께 보헤미안 1000년의 역사를 지닌 5곳의 체코 세계 문화유산 중 하나로 유럽을 방랑하던 집시의 원산지인데다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화유산을 계승해 내려온 전통적인 도시마을로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멋진 올드 타운이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이 올드 타운의 옛 시가지에는 체스키 크룸로프 자메크 성을 중심으로 중세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들이 수 백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영주를 모시던 하인들이 거주했던 라트란 거리                                                      


아직까지는 배낭객들에게만 알려질 만큼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겐 낯선 곳으로 인식되고 있는 체코의 이 유서 깊은 도시는 작은 프라하로 불릴 만큼 자연과 도시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는 이곳을 캠핑카를 이용해 찾아왔는데 당시 애용하던 필립스 유럽 지도에도 필히 방문할 곳이라는 큼지막한 표시가 있었을 만큼 유럽인들에겐 빼놓지 않고 들러야 할 관광명소로 일찌감치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본래 이 마을은 처음에는 관광지가 아닌 그냥 조용하고 평범한 작은 마을이었는데 오스트리아 배낭 여행객들의 입 소문으로 소리 소문 없이 유럽 전역에 알려졌다고 한다. 


마을 한 가운데를 관통하며 흐르는 불타바강의 아침 풍경


캠핑카를 몰고 프라하를 떠나 필젠(Plzen)의 유명한 맥주공장을 거쳐 체스키 크룸로프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떨어진 저녁 6시..마을은 어둠에 싸여 있고 도통 어디가 어딘지를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마을 외곽 도로변에 캠핑카를 세운 것이 밤 8시. 


마을은 조용하다 못해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 같다. 해가 빨리 떨어지기도 했지만 동유럽의 낯선 마을의 밤이 주는 불안감도  한몫한다. 일단 주변에 캠핑카를 세우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그날 밤 작은 중세의 창문을 통해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마을 사이를 걸었다. 사람의 기척은 없었지만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이 빛은 낯선 이방인들에게 뭔지 모를 안도감을 준다. 


마을의 상징인 크롬로프 성


마치 밤새도록 누군가와 속삭이는 그런 느낌. 시내 한복판에서 이곳 출신이라며 자신의 명함으로 길에서 주운 돌을 내밀던 마리화나에 취한 청년을 제외하곤 사람들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너무 늦었나? 다시 돌아온 캠핑카는 여전히 안전했지만 프라하에서 한번 털린 경험이 있는 우리 일행들은 마을을 벗어나 근교 외곽까지 나가 주차를 하고서야 비로소 잠을 청한다. 


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나 차량 안전을 확인한 후 기름을 넣고 바케트로 아침을 간단하게 때운다. 아직 어두운 물안개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짙은 안개가 걷히고 아침 햇살이 조그만 중세의 마을을 비추기 시작하자 내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어제까지 차량 도둑을 의심하고 시 외곽까지 나가서야 노숙을 한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 조그만 도시는 강렬한 아침 햇살로 나의 눈을 놀라게 했다.




고딕에서 로코코까지 교과서에서만 보던 온갖 양식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동화 속 마을. 마을을 통과하는 반짝이는 블타바 강. 그 강 사이로  피어오르는 장작 때는 연기와 구수한 내음. 체스키 크룸로프 자메크의 높은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환상적인 풍경까지. 그것은 우리가 백과사전에서나 찾을법한 그런 아침이었다. 


그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아니 기억은 있었지만 잊고 살았던 그 청명한 말 그대로의 아침. 독한 매연에, 시끄러운 클랙션 소리에, 다이옥신의 검푸른 돔 속에서 미친 듯 내팽겨 쳤던 바로 그 아침이었다. 




어릴 적 작은 어촌의 등대에서 만선 깃발을 단 배들이 통통하고 들어오는 아름다운 아침의 기억.  돈벌이한다는 핑계로 아침은 하루 일과의 귀찮은 시작일 뿐이라는 좁쌀스러 생각에 빠졌던 나. 아침은 늘 숙취에, 잠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난 잊고 있었던 아침을 제대로 기억해내고 있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사라졌던 내 생애 최고의 아침을 말이다. 


새벽부터 시작된 아침은 10시 30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물안개가 이슬이 되고 공원의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아름답다. 우리는 마을 안쪽에 있는 호미 거리의 조그만 공원을 거닐며 정말로 아침을 만끽하고 있었다. 물안개가 주는 멋진 풍경과 어릴 적 잃어버렸던 이슬이 떨어지는 맑은 아침 햇살을 온전하게 경험한다. 동유럽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아침 햇살을 볼 수 있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다.  




체스키 크룸로프의 올드 타운은 마을 전체가 펜션과 호스텔로 구성되어 있어서 여름 성수기에는 방이 없을 정도로 유럽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이지만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찾는 이가 한산해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가 되곤 한다. 


구 시가지의 건물은 뭐 특별하다고 할 정도로 멋진 건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아한 아케이드식의 르네상스식 건물과 고딕 양식의 타운 홀로 이루어져 있어 그 사이를 걷다 보면 마을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중세의 세트장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포스를 발산한다. 




아침이 멋진 날은 낮잠도 달콤하다. 성안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사진 백업도 할 겸 에스프레소를 한잔 시켜놓고 꿀맛 같은 낮잠을 청했다. 카페에서 자료를 뒤져보니 S자로 휘감는 블타바 강을 끼고 있는 구시가지 안에 있는 다양한 호스텔들은 가격이 무척 저렴해서 비 성수기에는 하루에 조식 포함 일인당 대략 1~2만 원  정도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배낭여행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글 쓰는 사람들이 이 곳에 온다면 정말 한 달 안에 대박 터지는 시나리오 몇 편을 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 정도로... (호스텔 같은 공포영화 시나리오는 말고 ^^) 마음의 평온이 그지없이 오래오래 유지되는 그런 색다른 마을이다. 



성내안에서 오리지날 부드바이저 드래프트를 맛볼 수 있는 파파스 레스토랑


마을 한 복판에 있는 “파파스 레스토랑”에서 멋진 스테이크와 시원한 부두 바이저의 알싸한 맛을 느끼며 생각한다. 누군가 오늘도 지독한 매연과 스트레스 그리고 일상적인 반복으로 인한 무력감으로 나날이 지쳐가고 있다면 이 곳을 꼭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당신이 잃어버렸던 아침을 찾으라고 권하고 싶다. 


난 여기서 잃어버렸던 어릴 적의 내 아침을 다시 찾았다. 그것은 어떤 작은 희망을 다시 찾았다고 보는 것과 같다. 오랜 세월을 잃어버리지 않고 고이 간직한 어느 작은 도시가 그 도시를 찾은 사람의 잃어버린 기억까지 다시 되찾아주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내가 느낀 유럽 여행의 가장 보람찬 기쁨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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