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컴퍼니 맨 (The Company Men), 2010_존 웰스>
영화가 주는 감동은 극 중 리얼리티에 기반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필요한 처세를 말하자면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시장원리에 적응해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요즘의 자본주의 삶이라는 게 언제부터 위태로웠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 역시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몸소 체험하기 이전에 거대한 세력들이 만들어낸 시장 틈바구니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인생을 이미 조작된 이미지로 배웠기 때문이다. 민중이 주인 되는 그 거대한 혁명적인 역사의 치열한 시점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는 각자 자신만이 판단하고 운명 지을 일이다.
하지만, 그 거대한 후유증은 우리가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면서 영화 한 편을 성실하게 지켜보는데도 부득이하게 다시 등장한다. '리얼리티'라는 것은 남의 말이 아닌 것에서 출발한다. 저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같으면 몰입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할리우드의 기회적인 장치가 관객들에게 꼭 해로움을 전달해 주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 [더 컴퍼니 맨]은 그런 영화였다. 불편하지만 먼 거리에서 작정하고 볼 수 있는 킬링타임류의 영화이기도 하면서 가까이 들어가면 상당히 불편하고 지랄 맞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듯 보면 조지 클루니의 '업 인디 에어'와 상당히 유사한 맥락을 지니고 있는 스토리라인을 지니고 있는데... 고용과 해고 사이에 우리가 처해진 사회환경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업 인디 에어>가 개인적인 취향을 보여준데 반해, 이 영화는 시장구조의 본질, 그 원론적인 부도덕성을 파헤치는 보다 더 큰 범위에서의 사회적 문제를 보편적으로 다루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자신이 월급 받고 직장 다닐 때는 몰랐다고. 사회에 나오니 그건 전혀 딴 세상이었다고.... 맞다.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절대적인 상황에서 이지, 가능성이나 유추의 상태에서는 그저 애정과 관심 정도만 전달되는 법이고, 생존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면 그건 바로 전쟁터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좋은 주택에 멋진 차, 나이스 한 연봉을 받는 잘 나가는 37세의 영업직 사원(벤 애플릭)이 회사에서 갑자기 잘리면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잘린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시장 가격을 결정하는 기업의 결정 권력이 자신의 이익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용된 리스트에서 비싼 놈부터 자르는 거다. 물론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공감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의 경영진들에겐 그러한 도덕적인 기대심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스톡옵션과 새로운 빌딩, 효자노릇을 하는 영리 추구 시설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영화 전편에 걸쳐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에게 이익이라는 몫을 반드시 전해줘야 하는 경영 이 사진들의 결정은 그래서 결국 대량해고라는 방법으로 실타래를 풀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묘사된다.
이 영화는 엄청난 배우들이 캐스팅된 무한 기대감을 활용해 지루함을 배제하고 진중하게 흘러간다. 모럴해저드에 빠진 대학 동기 보스를 둔 선량한 부사장 토미 리 존스, 잘 나가는 영업 신예 벤 에플렉, 기업의 존재가치와 경영의 선한 방식을 보여주는 소규모 건축업자 케빈 코스트너, 실제 무력한 명퇴자로 보이기까지 한 크리스 쿠퍼까지. 우리가 갑자기 직장을 잃는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당분간 취직이 안되고 실업급여도 다 끝나갈 때가 된다면 당신은 어떤 심정이 될까?
우리는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결국 믿게 될까? 아니면 부도덕한 기업주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될까? 뼈 속 마디마디까지 무력해지는 그러한 무기력함을 전달받게 되는 것은 정해지고 선택된 누구의 몫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공평하지 못하고 편협하게 재벌의 바지 가락을 붙잡고 사정하고 흔들린다면 이러한 비참함은 대를 이어 후세 아이들에게까지 물려줄 수밖에 없다. 선택은 늘 사회가 해주는 것이고 우리는 항상 그들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인정하자, 혁명의 시대는 지났으며 우린 은퇴한 사회주의 로망의 후세대들인 것이다.
자, 그럼 당신은 안전한가? 저 얘기가 남의 얘기가 아니고 그저 영화 속 얘기라서 다행스러운 건 전적으로 내가 아직은 해피해서인가? 정권의 꾀꼬리 역할을 하는 9시 뉴스에서조차 무수하게 들리는 정리해고,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등등등.... 대량해고 뉴스를 들으면서 우리는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저녁을 먹지만... 골 때리는 건 이런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더 상황 파악을 잘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 이 정신 나간 시추에이션이 정말 식겁하게도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는 나만의 경우인가?
난 썩 나이스 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일거리가 있었다. 물론 출근은 안 한다. 그러니 고용이니 실업급여니 연금이니 보너스니 하는 인생 보험도 당근 없다. 그저 인생 자체가 알바다. 정해진 날에 정해진 급여를 받을 수 없으니 당근 제때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돈을 받고 굴리지도 못한다. 항상 필요할 때는 돈이 없고 필요 없을 때는 돈이 있다. 머 이런 식이다. 그래서 열라 불편하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산다. 누가 날 자를 수도 없다. 난 그게 좋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이 시대를 묵묵하게 버티고 살아간다. 왜냐? 그렇게 교육받고 자랐으며 그렇게 스스로 패배하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시대는 자본주의에 이미 패배했다. 더 이상 어쩌란 말인가? 돈 앞에 심지어 노동자의 기본권리라는 게 있었냐는 둥, 노조 자체가 없는 세상이 굴러다니고 있다. 마지막 영화 속 장면에서 느닷없이 주인공의 처형인 케빈 코스트너가 바비에게 툭하고 던진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자네 사장에 대해 저번에 잡지에서 읽었네. 회사 직원 평균 연봉보다 700배를 더 벌었다고 하더군.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 사장이 정말 기름탱크 안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직원들보다 700배 이상 일했다고 생각하나?"
".............."
정치와 경제가 특정 가문으로 얽힌 독점 카르텔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상은 그런 거다. 내가 주인공이 절대 아닌 그런 세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은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건 각자 나름의 몫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