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_누리 빌게 세일란
이 영화, 터키의 '누리 빌게 세일란' 감독의 문제작이다. 오래간만에 맘에 드는 영화를 보았다는 뿌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영화 '침묵의 빛'을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과 늘 사랑하는 연극 코너 맥퍼슨의 '더 웨어'를 교묘하게 짬뽕시켜 놓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무려 2시간 30분. 예비군 훈련소에서 보여주었다면 정말 100% 다 잠들 수 있게 만들어 버릴만한 확실한 수면 유발 영화다. 그런데 이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단 하룻밤과 그 다음날 아침에 걸쳐 일어난 일을 간단하게(?) 다루고 있다. 작은 마을에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체포된 죄수를 동행하여 수사관 일행이 암매장한 시신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전부다.
이 기막힌 스토리 라인속에 어떻게 감독은 2시간 30분이란 긴 앵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가 재밌는 것은 바로 이 단순한 구조가 지닌 평면적인 무대에서 펼쳐지는 잡다한 군상들의 이야기가 오묘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라기보다는 잘 꾸며진 무대 속에서 등장한 여러 배우들의 디테일한 감성과 사고 그리고 유머와 회의 등을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연극처럼 꾸며놓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시작하지만, 살인사건은 그저 이야기의 서막에 불과하다. 이 살인사건 하나로 엮인 다양한 군상들은 서로 말을 섞으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범죄를 저질렀다는 자신의 모습에 인정을 못하는 듯 보이는 케난, 범죄자에게 조금의 친절함도 없으며 뒤에서 남의 욕을 연실 해대는 회의론자인 경찰서장, 착하긴 하지만 쓸데없이 말이 많은 군인들과 남 이야기라며 떠들지만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며 숨기는 가식적인 검사, 의심이 많으며 나중에는 결국 자신의 처지에 '현실'적인 결말을 만드는 의사 등 각각의 비중은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지목하지 않고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자연스러운 대화로 이어지며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 든다.
하지만 그들이 잡스럽게 떠벌리며 이야기하는 얘기들은 대부분이 누구에겐가 주워들은 얘기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극 중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의 모두가 들은 얘기를 바탕으로 사실을 유추하고 결국은 그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이 되어가는 과정을 감독은 잔잔하지만 블랙코미디를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주지 시키고 있다. 모든 진실은 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아는 현실세계의 진실은 정말 다 그러하게 만들어진 엉뚱한 팩트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그 마지막 대답은 생매장을 당한 사체의 부검을 진행하던 의사가 부검 보고서에 그 사실을 기재하지 않고 누락시키는 시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로에 대한 불편함... 오해와 진실 사이의 모호함... 자신의 처지에 관한 무기력함.. 정의가 사라진 공동체 의식까지... 관계는 그러한 면들의 중심에서 철저히 왜곡되고 부정되어 가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간다. 감독이 말한 옛날 옛적의 아나톨리아는 아마도 이런 세상이 아니였을까 라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은 감상자의 몫이다.
영화에 몰입하는 대신, 우리가 연실 내뱉는 조그마한 한마디 말에 집중하게 만드는 영화... 그래서 더욱 깊이가 있고 돌아볼 가치를 던져준 이 영화는 칸느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을 만한 수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미국 영화의 잡담이 사건을 연계시키는 송지나식의 허무하고 맹랑한 킬링 브릿지라면 유럽 영화의 잡담은 삶을 돌이켜 바라보게 하는 어떤 작은 쉼표들로 이루어진 길고 긴 한숨들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