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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Feb 26. 2017

인생, 결국 내가 주인공이다 <시네도키, 뉴욕>

<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Y), 2008_찰리 카프먼>

<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Y), 2008_찰리 카프먼>


먼저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의 한 줄 평으로 이 영화 얘기를 시작해본다.


"유작으로 남길 영화를 데뷔작으로 만들다"


이 짧은 한마디의 평이 이 영화의 복잡 다난함을 공포적으로 예견하고 있다. 그러기에 영화를 말하기 전에 이 영화의 감독을 먼저 알아야 했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그가 나름의 시나리오계 덕후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해진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를 쓴 시나리오 작가이기 때문이다. '7층 반'이라는 묘한 설정의 사무실로 들어가 다른 이(존 말코비치)의 정신세계를 경험한 존 쿠삭과 카메론 디아즈가 나누는 후덜한 대사와 연기가 아직도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바로 그 영화다. 그것만이 아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 (1999) _스파이크 존즈 감독


'뇌사 상태에 빠진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에 대한 멋진 힐책'이라는 뉴욕포스트의 평과 함께 기존 코미디의 영역에서 벗어나 진지한 연기의 끝판왕을 보여준 짐 캐리와 변신의 여신 케이트 윈슬렛이 보여준 기억 지우기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시나리오를 쓴 장본인이다. 뭐 이 정도 얘기하면 이 양반의 필모그래피가 그저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 (2004)_ 미셸 공드리 감독


찰리 카프먼은 일관되게 인간적 사고와 기억에 주목하며 자신의 불안하고 외로운 정신세계를 작품 속에 집어넣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 만이 지닌 이러한 독특한 류의 영화들은 관객들을 때로는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의 내면적 상상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이들에겐 무한한 영역의 나르시즘을 선사하기도 하는 카프카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가 시나리오만 쓰다가 처음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고 만든 영화가 바로 이 영화 '시네도키, 뉴욕'이다.


이 양반이 바로 문제적 감독 찰리 카프먼이다


영화 '시네도키, 뉴욕'. 이 영화는 전혀 친절하지 않은 만큼, 관람객을 취향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마구 헤매게 만든다.  일단 영화 제목부터 헛갈린다. 여기서 '시네도키'란 사물의 일부를 통해 비유하는 표현방식인 대유법 중에서도 제유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흔히 '너 밥 먹었니'에서 밥이 그냥 밥이 아닌 끼니를 의미하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들'이 들판이 아닌 조국을 의미하는 표현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은 제유법으로서의 '뉴욕'이 함축하고 있는 그 이상의 뭔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뭔가 뉴요커들은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


삶이란?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어디서 부터 고쳐야 하는 것일까?

      

실제 이 영화 속에는 상당한 양의 -주인공이 체험하는 뉴욕적인 정서, 수많은 인연과 그와 관련된 사건 및 기억, 나름의 추억, 그에 따른 삶의 파편들- 삶의 어두운 측면에서의 '시네도키'가 내포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연기자들의 다양한 중의적 표현과 농담들 속에 이리저리 녹아있다. 그러므로 관객들이 이러한 비유적 '시네도키'를 전부 다 이해하면서 영화를 즐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즉, 시작부터 쉬운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벅찬 감동은 언제나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심지어 이 경우, 감동으로 가는 길엔 박사학위가 필요해 보인다.  


영화속에서 등장하는 무수한 상징과 지표들은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극적으로 상기시킨다.


영화 포털이 제공하는 줄거리는 이렇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심각한 연극 연출가인 주인공 케이든(필립 셰이무어 호프먼)이 우연한 기회에 기부를 받아 어떤 인물의 삶을 자신의 연극으로 올리면서 시작된다. 도시 변두리 지역에서 극장을 운영하던 케이든은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물론 화가인 아내와의 별거로 인해 두려움과 지독한 외로움까지 더해져 일상이 무너질 듯이 위태롭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거대한 연극 프로젝트는 마치 새로운 출발과 기회의 장처럼 보이지만 그 연극은 점점 케이든 자신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면서 예기치 못한 혼란에 휩싸이게 되는데...    


아니 줄거리가 뭐 이리 어려워... 할 필요는 없다. 주인공이 삶의 멘붕상태에 빠진 뉴요커이고 그는 극단을 운영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원하는 작품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 만큼의 큰 상금이 주어진다. 무제한의 돈이 시간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일생일대의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데 그게 바로 자신의 삶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뭐 이 정도쯤 되겠다.  

 

자신의 삶을 일생일대의 연극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한 케이든


그런데 그가 계획하고 있는 연극무대가 간단치 않다. 일단 넓직한 교외의 창고에다가 실제 도시 크기의 무대를 만들고 어마어마한 출연자들을 섭외해 자신의 삶을 연극으로 올릴 계획을 한다. 그러나 연극의 완성을 위한 시나리오와 리허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의 삶과 교차되며 혼동되기 시작하고 점차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연극무대인지가 헛갈리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한마디로 주인공 케이든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마구 뒤엉켜버린 것이다.

                                                   

주인공의 아내 아델은 신경증적인 케이든의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그를 떠난다. 


게다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것도 힘든데 일상의 뭔가가 삐끗할 때마다 다시 고쳐야 하는 시나리오는 더욱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제 그는 17년간 그저 자신의 삶을 주제로 한 연극에서 리허설만 되풀이하고 있었다는 각성에 괴로워하는 처지가 된다. 그렇다고 벌려놓은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삶을 위해 벌인 연극무대는 자신의 삶을 혼동시키는 주체가 되고, 연극은 답이 안 보이는 그의 실제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대한 중의적 표현방식을 취하고 있는 이 영화의 컨셉은 다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다. 영화의 처음은 마치 주인공을 따라가는 시점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지만.. 스토리 시점이 점차 주인공의 외부 시점으로 변환되는 전개 방식으로 인해 관객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영화를 외부 시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는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큐 싸인에 의해 스스로 삶의 무대(연극)에서 죽음이라는 경계에 서게 되는 주인공을 당황스럽게 목격하게 되는 지점에 이른다. 인생과 죽음의 '시네도키'는 각자 개인에게 어떤 의미적 확장성을 지니고 있을까? 이 영화가 묻는 퍼즐이다.


실제와 환영의 경계에서 그는 비로소 삶과 죽음이란 명제를 맞딱드린다. 


죽음에 전착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여러 가지로 각별하고 특이한 경험을 선사해 준다. 하지만 삶과 일상의 부조리함, 시간과 관계의 무분별한 충동으로 인한 소모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고 싶지 않은 관객들과 이 영화를 무려 2시간에 걸쳐서 같이 본다는 것은 무리일 듯싶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관계에 부적절하게 집착하는, 사회적 자아의 상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유부단하고 애매한 강박관념으로 시달리는 도심 속 지식인이 자신 스스로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 펼쳐놓은 다이어리...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다.


연극을 통해 보여지는 삶의 진정한 진실은 누구나다 다 주인공이라는 시살이다.     


영화 속에 연극이 나오고, 내가 있는데 또 나를 연기하는 배우가 등장하는 이러한 중의적인 접근방식들은 이미 '도그빌'에서 경험한 바 있는 시대적 트렌드인 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센치해지고 무력해지지 않으려는 시대의 경솔함만이 거리에 쩌렁쩌렁 울리는 시대에...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팀 로빈스처럼 투명하게 앉아서 자전거 도둑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태도로 이 영화를 본다면 죽음에 대한 접근방식과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설정 정도의 이해, 하나쯤을 더 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본 영화를 적극 보라고 감히 권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개별적인 영화적 감동의 '시네도키'가 나로선 전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보탠다면 영화 <시네도키, 뉴욕>은 비록 흥행에서는 참패했지만 평단으로부터는 21세기 최고작이라는 극찬을 받았다는 슬픈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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