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시내버스를 탄 오디세우스

프롤로그

by 다모토리
백수와 시내버스


오래전 길거리 사진 찍는 걸 좋아하던 시절, 영국 작가 ‘Tom wood’의 사진집 [버스 오디세이]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었다. 리버풀이라는 작은 소도시에서 20년간 버스만 타고 다니면서 기록한 진솔한 풍경들은 나에게 우리네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버스는 나에게 있어서도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다. 밥을 먹으려면 밥솥이 필요하고, 수다를 떨려면 커피 한 잔이 필요하듯 누구를 만나고 일을 보고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만 한다. 난 운전면허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자가용을 타고 다니고 또는 안 막힌다는 이유로 전철을 많이 타곤 하지만 내게 버스는 운송수단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시내버스에는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이들, 보따리를 든 행상 아주머니, 지팡이에 의지한 할아버지, 하굣길 학생들의 수다, 졸음에 고개를 꺼덕이는 40대 샐러리맨 가장까지 그 좁은 버스 한 칸에는 수많은 인생들이 타고 내리고 또 지나간다.



또 다른 이유는 버스가 지나가는 우리네 풍경이다. 지하철 밖은 언제나 깜깜하다. 그러나 버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길을 지나간다. 노점에서 가게,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집으로 가는 사람들 등 버스에 타면 그저 일상적으로 바라보았던 모든 삶의 행위들이 복합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난 그런 일상성이 좋다. 그때부터 난 시내버스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고등학교 시절, 방학을 맞아 유학 온 서울이라는 동네가 신기해서 잠실나루에서 무작정 21번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서울을 돌아다닌 기억이 있다. 난 그때의 뭉클한 감정을 지금 다시 한번 느끼고 싶은 것이다.



버스를 탄 사람들은 바쁘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디론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난 그 사람들을 언젠가 사진과 글로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그 결심을 실행으로 옮겨보고자 한 것이다. 지천명을 앞두고 있지만 일거리가 사라진 진정한 백수와 한가로운 시내버스. 뭔가 묘하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닌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


옛말에 ‘도를 닦는다’는 말이 있다. 본래 도라는 것은 길인데, 의미가 확대되어 삶의 법칙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수행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중용에서는 도를 잠시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도’란 정신적 성장을 위한 수행을 의미하지만, 자연에서의 ‘도’는 인간이 밟아야 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어떤 길이다. 인간은 길 위에서 언제나 희망을 찾아왔다. 성인들이 도가 아니면 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길이 아닌 곳에 있음이 마치 짐승과 마찬가지란 얘기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인간의 길 위에는 언제나 사람과 사람이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인간을 만들어주는 곳이 바로 길이기 때문이다.



루쉰이 말하길 희망이란 땅위의 길과 같다고 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함께 걸어가는 존재라고 믿지만 요즘 이러한 길 위의 명제가 빠름에 치이고 있다. 우리네 일상은 느릿하게 걷는 것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조그만 반도의 땅에 음속을 주파하는 열차가 달리고, 산이란 산은 모조리 뚫려 터널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땅을 기어이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어버리고 우쭐해한다. 이제 사람과 사람들이 소통하던 길에는 기계들이 광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국을 누비지만 그들이 당도한 곳은 길이 아니라 단지 목이 잘린 목적지일 뿐이다. 고속의 시대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 공간을 파괴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길은 오로지 도시 골목과 한적한 시골길을 느릿하게 달리는 시내버스길 뿐이다.



그렇다. 시내버스가 다니는 소소한 길의 풍경엔 아직도 잔잔한 인정과 짬을 내어 나누는 수다 그리고 타인을 존중하는 배려와 소통이 존재한다. 물론 거기엔 여전히 호통과 버럭 질도 있으며 아쉬움과 작별도 존재한다. 이 모든 희로애락이 한 대의 버스 안에 존재하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시내버스 한 대의 여유가 우리 삶의 보편적인 정서를 회복시켜 주리라 믿지는 않지만 그 속에서 발견한 풍경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추억의 시공간을 힘껏 건져 내어줄 충분한 힘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에게 시내버스는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를 그리며 항해하던 모험 속의 위태로운 선박이며, 이 조그만 반도의 남쪽 땅덩어리는 영웅을 10년간 모험에 들게 한 오랜 신화 속 거칠고 푸른 망망대해였다.



떠나는 것이 돌아가는 것이다


‘가장 먼 길이 집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타고르는 자신에게 돌아가는 길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스로 오디세우스가 되어 모험으로 가득 찬 먼 길을 돌아 집으로 향하고자 결심했다. 우리가 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 길은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닌 신화와 역사로 가득한 먼저 간 이 들의 것이었다. 그 길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바라보며 나만의 서사를 완성하고 싶었다. 여기에 격식은 없을 것이고 피 터지는 싸움도 존재하지 않지만 전설이 된 호메로스처럼 누구라도 이 길을 한 번쯤 따라와 봤으면 하는 기대를 품고 싶은 것은 솔직한 심정이다. 일상이 모험이 된 지금, 내가 올라탄 시내버스가 삶의 풍랑 한가운데로 나가는 쪽배처럼 느껴지는 것은 단지 나만의 허황된 착각일 뿐일까? 이 상황에 내가 위안을 삼는 단 한 가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스스로 ‘누구도 아닌 자(nobody)’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그래, 우리는 누구나 모험을 떠날 자신만의 인생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리라. 드디어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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