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광화문-포천] 뜬금없는 여행과 옛길의 추억

CHAPTER 1_ 추억을 달리는 시내버스 (서울-춘천)

by 다모토리
비는 후드득하고 떨어진다


남들이 살면서 한 번쯤은 경험하는 실직을 매년 겪으면서 '비는 후드득하고 떨어진다'라는 일본 속담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다. 비라는 것이 처음 시작될 때는 천천히 내리는 듯 하지만 본격적으로 퍼붓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을 때가 많은 것처럼, 세상사 돈벌이 역시 그렇다. 집안에 쌀이 떨어지는 날, 공과금이 밀려 들어오고 아이들 학원비 마감일에, 국세청 체납 압류장까지 들이닥치는 격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때우며 근근이 벌어먹고 산다. 평생을 알바 치기로 살다가 그나마 나이가 들어 이젠 그 짓도 못하게 된 폐기 직전의 내 인생에 한 줄기 빛은 이미 주룩주룩 내리는 빗물에 한참을 가려져 있었다.



먼동이 트기도 한참이나 이른 새벽, 시내버스 여행의 짐 싸기에 들어간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징글징글한 장대비를 맞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을 돌파하는 방식도 그 사람 나름인 법이다. 돈을 벌 수 없다면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것이나 열심히 해보자는 이 담대한 계획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필요한 짐을 방구석에 너저분하게 널어놓고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사실 버스여행이 뭐 별것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겠지만 이 여행이 전국투어로 돌변하는 순간 준비물부터 따져야 할 숙소와 경비까지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익히 들어본 적 없는 이 버스여행의 설렘이 묵직한 경비를 압도하는 순간이다.



이번 버스 오딧세이의 목표나 계획은 단 하나. 시내버스를 타고 한반도 남쪽 땅덩어리를 한 바퀴 빙 둘러 오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한 번에 성공적인 투어를 마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나누어 천천히 돌기로 했다. 빨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느긋하게 즐기면서 가는 게 목적이니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경비가 떨어지면 후회 없이 돌아온다는 대 전제가 있고, 낯선 땅에서는 가능하면 지인에게 빌붙어서 의식주를 해결하자는 소박한 빈대 정신도 가득하다. 그래, 준비할 것은 이 정도면 됐다. 나머지는 버스가 알아서 데려다줄 것이다. 고민은 버스에서 내리는 그곳부터 다시 시작하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이번 여행의 시간과 일정이 뜬금없이 정해졌다. 맞아,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가고 싶을 때 그냥 훌쩍 떠나는 거지. 준비만 하다가 끝난 여행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출발이라도 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하는 자위를 해본다.



최초의 시내버스와 빛바랜 추억


단출하게 꾸려진 행장을 메고 푸른 새벽을 걸어 출발점을 향해 움직인다. 아직 많은 이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는 시간, 새벽을 여는 사람들만이 주변을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 이 여행의 첫 차는 서울의 남북을 종주하는 간선 150번 시내버스다. 평소 내가 일하러 갈 때 가장 많이 애용하는 버스이기도 하다. 운전면허라는 것을 평생에 한 번도 따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매일 일상 속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한다. 나 같은 뚜벅이들을 먹여 살리는 이런 버스야말로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여행의 첫 기점인 세종로 사거리에 조금 있으니 저기 멀리서 환한 라이트를 밝히며 150번이 등장한다. 오늘의 첫 차. 기점인 금천구에서 종점인 도봉산까지 그 긴 구간을 한 번에 가는 사람은 없겠지만 중간중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버스이기에 첫차였지만 사람들로 북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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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자리를 잡고 첫 번째 여정을 시작한다. 익숙한 자리에 편안함을 느끼며 배낭을 열어 오늘의 스케줄 표를 확인한다. 과연 시내버스로만 전국을 연결해 이번 여행을 무사하게 완료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되어 대뇌 한편에 튼실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날이 조금씩 밝아오자 버스의 창밖으로 익숙한 미아리 고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보인다. 조금만 지나면 서울을 벗어나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번 여행의 화두인 시내버스란 단어에 집중해 본다. 시내버스는 말 그대로 시내를 다니는 버스다. 사전적으로 풀어보면 대도시와 주요 도시의 지역을 서로 연결해서 운행하는 버스라고 나온다. 이런 시내버스의 종류는 형태에 따라 간선, 지선, 마을버스로 나뉘고 운행에 따라 일반, 농어촌, 급행, 순환버스 등으로 구분된다. 자, 이런 설명을 보면 시내버스를 타고 전국을 한 바퀴 도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이 없듯이 두메산골 오지 어디에서 멀쩡하던 버스 노선이 짠하고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여행기간 중에 버스노선이 끊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조금만 더 부언하자면, 처음으로 시내버스가 운행된 곳은 서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시내버스가 처음 운행된 곳은 놀랍게도 서울이 아닌 대구였다. 우리나라의 첫 시내버스는 1920년 7월 1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국내 최초로 운행되었다. 당시 대구 호텔 주인이었던 ‘베이무라 다마치로’라는 일본인이 일본에서 버스 4대를 들여와 대구에서 시내버스 영업을 시작한 것이 최초였다. 이 버스는 대구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동촌, 북쪽으로는 팔달교까지 오갔다. 여름에는 오전 6시에서 오후 10시까지, 겨울에는 오전 8시에서 오후 7시까지 운행했는데 전차와 달리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도 누구나 손을 들면 태워줬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전차보다 비싼 7전이라는 요금 때문에 시민들이 외면했고 결국 버스 운영권이 경성전기 주식회사로 넘어갔다. 그 뒤 서울에서 1928년에 경성부 부영버스가 최초로 운행되었는데 초기에는 버스보다는 마차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 버스 역시 부족한 노선과 비싼 요금 때문에 시민들이 외면했고 대구처럼 1932년 전차 운영업체인 경성전기에 인수돼 전차의 보조수단으로 이용되는데 그친다.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고 1960년대 중반까지 마이크로버스와 미군 트럭을 개조한 시내버스가 시내를 활발하게 누비며 승객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시내버스는 도시와 시골을 잇는 주요한 대중교통으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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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mb-751156509_123b16e7_KAH0097E1_600x638.jpg 서울에서 최초로 운행된 시내버스인 부영버스


그렇다면 이런 시내버스는 세계에서 누가 최초로 고안해냈을까.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버스를 제안한 사람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로 유명한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다. 평소에 인간에 대한 배려심이 많기로 소문난 그는 아침마다 일터로 나가는 파리의 시민들을 유심히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그는 곧 이들이 함께 타고 다닐 수 있는 값싼 수송 수단은 없을까?라는 고민에 휩싸였고 이를 현실에 적용할 아이디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1661년 여러 대의 마차를 연결해 파리 시내의 정기노선을 순환 운행하고, 요금은 1인당 5수(sous·구 프랑스 화폐)를 받자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승합 마차의 아이디어로 파리에서 최초의 버스 회사가 탄생되었다. 1662년 3월, 드디어 서민들이 탈 수 있는 승합 마차들이 파리 시내를 달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파스칼의 시내버스는 당시 큰 인기를 얻었지만 1680년경 영업부진으로 폐지되기에 이른다.


0003.jpg 파스칼과 그가 고안한 대중버스의 이미지


그리고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1826년 파리의 온천 목욕탕 주인인 스타니슬라 보드리에라는 사람이 파스칼의 아이디어를 화려하게 부활시킨다. 그는 시 외곽에 대중목욕탕을 만들고 도심에서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마차를 운행했는데 중간에 내리려는 승객이 많은 점에 착안, 여관과 주요 지점을 거치는 코스를 개설하고 승객과 우편을 원하는 장소까지 운송했다. 요즘으로 치면 시내버스와 관광버스를 적당히 합친 형태의 노선버스를 개설한 것이다. 이후 그는 1828년 파리로 건너가 본격적인 버스회사를 설립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온천 마차의 종점에 있던 모자가게 간판인 '만인을 위한'이란 뜻의 라틴어 옴니버스(Omnibus)를 명칭으로 사용했고 이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버스(bus)의 전신이 되었다.


0002.jpg 1846년 당시 파리에서 인기를 끌던 옴니버스의 모습


이렇게 역사의 흔적을 남기며 발전해 온 시내버스는 우리 세대에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흔히 386세대라고 하는 80~90년대 학번들은 대부분 시내버스에 대한 애틋한 추억들을 지니고 있다. 1984년에 버스 안내양 제도가 없어졌으니 이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겐 교복과 안내양이 있던 시내버스가 추억으로 진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나의 첫 시내버스 탑승 추억은 초등학교 시절, 강원도 고성군 산골짜기 동네인 간성읍에서 거진읍을 왕래하던 프런트 엔진 방식의 늘씬한 시제품 시내버스였다. 이 버스가 마을 신작로에 들어서면 얼마나 타고 싶었는지 동네 친구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그리곤 50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고 일부러 그 버스를 타고 간성읍내까지 나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던 기억이 새록새록 남아 있다. 그뿐인가, 중학교 1학년 때 당시 등교버스에 가득한 학생들에게는 무언의 법칙이 하나 있었다. 앞자리는 여학생들이, 뒷자리는 남학생들이 타는 불문율이었다. 첫 등교를 하면서 이런 불문율을 모르고 냉큼 앞자리에 앉은 나는 결국 상급생 누나들이 에워싸고 내려주지 않는 바람에 몇 정거장이나 더 먼 여중학교 앞에서 징징거리며 내려야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쌤통이라며 훌쩍거리는 나를 보고 깨알같이 웃던 그녀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 진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잠시 시간을 돌려 애틋한 추억에 잠겼다 깨어나니 버스는 어느새 수유리를 지나 도봉구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 도봉소방서 정류장에서 포천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할 시간이다. 날이 환하게 밝고 그 사이 사람들이 우르르 출근길로 쏟아져 나온다. 미세먼지로 그윽한 이 답답한 도시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사라진 옛길을 그리워하며


72번 버스에 오른다. 이 버스는 기점인 서울의 수유리를 출발해 포천시청을 경유하고 종점인 경복대까지 운행하는 총연장 88km의 간선버스다. 서울에서 의정부로 가는 사람들과 멀게는 포천까지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사람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북쪽 방향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울에서 경기를 오가는 버스는 특징이 하나 있는데 2인용 좌석이 많다는 사실이다. 서울의 버스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서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경기도 버스는 운행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 때문에 서 있는 공간보다 좌석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버스는 이내 서울의 경계를 지나 곧바로 의정부를 거쳐 포천으로 향하는 43번 국도를 쏜살같이 치고 오른다.



버스를 둘러보니 승객들은 대부분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이다. 게 중에 눈길을 끄는 할머니들이 있었는데 왁자지껄한 대화를 들어보니 야생버섯을 캐러 가는 길인 듯했다. 역시 시내버스의 묘미는 왁자지껄한 수다 소리다. 서울에서는 휴대폰에 정신 팔린 사람들이 많아 소음도 적었는데 역시나 시골길에 오르자마자 떠들썩한 기운이 여행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고조시킨다. 도로 주변으로 빌딩이 사라지고 너른 들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버스는 시골길을 내달린다. 버스에 타고 있는 승객들도 역시 양복차림과 교복 대신에 간편한 등산복에 저마다 수건이나 배낭을 들고 있는 것이 눈에 확연하게 들어온다. 버스 안이 할머니들의 들뜬 왁자한 수다 소리로 정신이 없는 사이에도 72번 버스는 시원하게 북쪽으로 내달린다.



버스는 서울에서 곧장 북쪽 방향으로 올라가지 않고 우측으로 선회한 길로 북상하고 있는 중이다. 서울에서 곧바로 북쪽 방향으로 가면 양주를 지나 동두천에 이르고 왼편은 파주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이 여행의 귀환 도로이니 그때 다시 거론하도록 하고 지금 내가 오르는 43번 국도는 예전에는 경흥대로라고 불렸던 조선 6대, 혹은 9대 도로 중 두 번째 도로였을 정도로 중요한 길이었다. 경흥대로는 조선 시대에는 한양에서 함경도 경흥까지 이르는 길이었다. 그 거리는 2,459리, 즉 965.7km에 이르며 현재 휴전선 인근 김화까지 이어지는데 더 이상은 북으로 올라갈 수 없다. 현재 경흥대로는 국도 43호선과 거의 겹쳐져 있는데 이 국도는 지역 교통은 물론 포천 주변 지역으로 연계되는 물류 운송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내가 타고 있는 72번 버스가 지나고 있는 이 43번 국도의 시작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이며, 종점은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이다. 총길이는 295km인데 의정부에서 포천을 지나 철원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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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잠깐 조선시대 서울에서 전국 각지로 뻗어나간 총 9개의 큰 도로를 한번 살펴보자. 조선의 9대로는 한양 도성에서 시작해 동서남북 각 성문을 통해 지방으로 가는 도로망과 연결되어 있는데 제 1도로는 서울~의주로 서대문으로 나가 국토의 북서쪽 끝인 의주까지 총 434km이다. 제 2도로는 지금 지나가는 43번 국도로 서울∼경흥까지를 일컫는다. 제 3도로는 서울∼평해로 동대문을 통과해 동쪽의 울진군 평해면에 이르는 길로 총 352km이다. 제 4도로는 서울~부산으로 남대문을 출발해 한강진을 건너 판교와 용인을 지나 동래부 부산진까지 384km에 이른다. 제5, 6도로는 모두 통영으로 가는 길인데 둘 다 남대문에서 출발한다. 제 5도로는 문경과 상주를 지나고 제 6도로는 노량진을 건너 과천, 공주, 전주, 함양, 진주를 경유해 통영에 이르는 총 394km이다. 제 7도로는 서울~해남으로 남대문을 출발해 남쪽으로 제주도까지 이르는 길로 노량진을 건너 삼례와 정읍을 지나 관두량까지 가서 바닷길로 제주까지 이르는 총 388km이다. 제 8도로는 남대문에서 부천을 거쳐 보령의 수군절도영에 이르는 길이며 제 9도로는 서대문에서 서쪽으로 양화진을 건너 강화에 이른다. 이러한 조선의 대표적인 9개 대로는 조선 후기 김정호가 편찬한 지리서 [대동지지]에 수록된 길이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길이 많지만 민간과 정부가 앞장서서 현재 옛 길을 복원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72번 버스는 신나게 시골 도로를 달리고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전에 이러한 길은 지금과는 달리 조그만 수레나 다니던 작은 길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넓은 강이 있어 길을 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외적의 침입이 빈번해 조정에서는 일부러 길을 평탄하게 다지지 않았다고 한다. 길조차 외적의 통로가 된다고 하여 길이 없으면 나라가 안정하다는 무도즉안전(無道則安全)을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이에 관한 웃을 수 없는 일화가 전해온다. 조선 초기 정치가였던 양성지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명나라 관리가 우리나라의 산천 지세를 물었다. 이에 양성지는 우리나라는 국토가 좋고 큰 하천이 없어서 홍수가 나도 괜찮은 수준이라 답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우리나라의 도로 상태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에 양성지는 아차, 자신이 실수했구나 하는 마음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한성까지 오려면 큰 강을 여덟 개나 건너고 여덟 개의 험준한 고개를 건너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소”라며 엄포를 놓았단다. 외세의 침략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국토가 좋아 홍수가 없다던 나라가 순식간에 최악의 험준한 지형으로 급변했을까. 우리나라 도로의 폐쇄성을 알게 하는 이러한 웃지 못할 사실은 중국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이 수레가 다닐 만한 길의 중요성을 임금에게 상소한 사실을 보고도 쉽게 알 수 있다.


눌재%20양성지%20초상.jpg 무도즉안전(無道則安全) 에피소드의 주인공 눌재 양성지. 그는 실용적인 정책대안으로 후일 정조대왕의 정신적 스승으로 받들어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예전의 길을 한번 원상 그대로 걸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경흥대로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빠름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옛 선조들이 걷고 또 걸으며 남겨놓은 오랜 옛길을 그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메마른 아스팔트로 시원하게 갈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길은 동시대 사람들이 남긴 역사이자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서양인들은 길을 방법적 기호로 해석했고 동양의 선지자들은 길을 내적 의미로써 해석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번 여행에서 나는 우리의 길을 어떻게 볼 것인지 자연스럽게 고민해 보게 된다. 물론 가방 끈이 짧은 나에게 이런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확인하고 싶고 원하는 것은 그저 세상의 풍경을 조금은 느리게 바라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그건 어떤 길이든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네 부모들이 살았고 내가 살고 있으며 앞으로 후손들이 살아갈 이 땅을 담담하게 느끼고 들여다보며, 거기서 뭔가를 찾아내고 싶은 바램. 그것이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의 길이고 마을의 길이며 역사의 길이다.


주마간산이라는 긍정의 힘


그렇다면 그렇게 세상과 길을 보고 느끼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속도는 어느 정도일까? 우리에게 익숙한 사자성어로 ‘주마간산’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뭔가 대충대충 보고 지나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부정적으로 많이 쓰이지만 나는 이 주마간산이란 단어를 그리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보고 싶지 않다. 왜냐면, 속도의 세계라는 관점에서 산술적으로만 따져보면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주마간산에서의 말의 속도보다 대여섯 배 이상 빠른 스피드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이 달리는 속도를 구분해보면 평보, 속보, 구보, 습보 등 4가지다. 이를 시속으로 환산하면 평보는 6.6km, 속보는 13.2km, 구보는 19.2km, 습보는 59.4km에 해당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습보는 경마장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의 주법이니 이를 제외하고 계산하면 일반적으로 주마간산은 약 20km 내외의 속도로 볼 수 있다. 시내버스가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속도와 비슷하다. 이 정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예전에는 무척이나 빠르게 느껴졌을 테지만 지금은 풍경과 생각을 합쳐볼 수 있는 다소 여유로운 속도라 할 수 있다. 내가 주마간산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바라보고 시내버스 여행을 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시대 양반이 유유자적 말을 타고 유람하던 그 분위기를 요즘엔 시내버스를 타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차창 밖으로 이제는 사라진 경흥대로의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사이, 버스는 어느덧 축석령을 지나고 있었다. 축석령은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려온 한북정맥이 두 도시의 경계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의정부시에서 포천으로 넘어가는 큰 고갯길이다. 조선 중기 포천의 어룡동에 오백주라는 효자가 살았는데, 부친이 큰 병환에 들자 온갖 영약을 찾아 전국의 산하를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신령이 나타나 어느 산 어느 고개의 큰 바위 아래로 가보라고 해서 효자는 그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고개에 떡하니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자 그는 밤새도록 빌어 약을 구해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빌 축(祝) 자, 돌 석(石) 자를 써서 축석이라 했다는 고갯길이다. 물론 지금은 호랑이 대신에 더 무서운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고갯길이지만 아무리 예전이고 전설이라고 치부하더라도 산세가 깊다고 이런 고갯길까지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면 과연 백성들이 살 수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슬쩍 들었다. 차라리 돌을 쌓아 병환을 빌었던 ‘축성’이 사람 입을 타고 넘나들며 호랑이까지 등장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니 우리네 조상님들 풍자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 사이 버스는 이제 포천의 소흘읍에 위치한 환승지점인 시청 정류장에 서서히 다다르고 있었다.




⓵ 간선 150번 / 세종로 사거리-도봉소방서

서울의 끝과 끝을 잇는 노선이다. 북쪽으로 의정부시 입구에서부터 남쪽으로 안양시 만안구 입구까지 이어진 노선으로 서울의 최북단과 최남단을 오가는 장거리 노선이다.

*운행시간 : 첫차 04:00, 막차 22:10 *배차간격 : 평일 6~9분, 주말 8~14분


⓶ 일반 72번 / 도봉소방서 -포천시청

포천교통에서 운행 중인 시내버스 노선으로 강북구 수유역에서 포천시청을 지나 경복대까지 운행한다. 포천시 일반 시내버스 중에서 배차간격이 나은 편이다.

*운행시간 : 첫차 04:20, 막차 22:40 *배차간격 : 평일 10~15분, 주말 12~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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