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관인면-이평리] 살아갈 날들과 낯선 청춘들

CHAPTER 1_ 추억을 달리는 시내버스 (서울-춘천)

by 다모토리
진정한 여행은 살아갈 날들이다


관인면 파출소의 애향심 강한 경찰분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넘어 편하게 철원군 상노 1리에 도착했다. 잠시 여장을 풀고 편의점에서 늦은 아침을 먹는다. 편의점에 붙어 있는 시간표를 보니 버스가 오려면 아직 시간 반이나 남았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쬐는 한가한 시골길에서 잠시 망중한을 즐긴다. 여행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여기에서 내가 알아서 가야 할 길은 없다. 버스가 올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여행. 나는 이런 여행을 꿈꾸었다. 누군가 나를 실어 나르는듯한 편안함이 온몸에 느긋하게 퍼진다. 이렇게 뜬금없는 여행에는 언제나 뜬금없는 감동이 일어나기 마련. 이 시골길에서 받는 조그만 햇살과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생각나는 것은 터키의 혁명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시 한 편이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시는 나짐 히크메트가 12년간의 옥중생활 중에 지은 시 [진정한 여행]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그가 한 줄기 햇살조차 다다르지 않는 좁다란 감방에 갇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스스로 신념과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단호한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라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나의 마음을 후벼 판다. 사실 인간에게 가장 먼 여행은 인생살이다. 그 여정이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나지 않은 날들이 너무 아름다워 차라리 축복을 보내는 그의 결기가 이 조그만 시골길에 한가롭게 널 부러져 있는 나를 다시 한번 고무시킨다.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가, 단지 두발로 뚜벅뚜벅 걸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축복받고 감사한 하루라고 생각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간사스럽게도 갑자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나름 감상적인 짧은 브런치 타임을 끝내고도 버스 시간이 남아돌아 동네 한 바퀴 마실을 간다.



철원군 동송읍에 속해 있는 상노리 마을은 이리저리 보아도 참 평온한 산촌마을이란 느낌이 든다. 이 마을은 철원평야 중에서도 논이 적고 구릉이 많아 주로 밭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한다. 물론 여느 시골마을처럼 젊은이들은 많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전통을 고수하며 이웃끼리 소박한 삶과 정을 나누며 살고 있는 모습이다. 촌락은 130여 세대 정도 되는데 여기 터줏대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00년대 후반 풍천 임씨와 순흥 안씨 일가족들이 500년간 터를 잡고 살았던 토착민들이다. 역사가 이러니 텃세도 만만치 않겠다 싶지만 마을 어르신들이 말도 잘 건네시고 불쑥 나타난 이방인도 곧잘 반가워하신다. 하지만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여기로 귀농하면 당장 퇴출당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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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노리 하면 문득 떠오르는 것이 땅을 다지는 민속놀이인데 공식 명칭은 상노리 지경다지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동네는 원래부터 농경지의 지반이 약했다. 그래서 큰 기와집이나 재실을 지을 때 터를 다지지 않으면 집이 땅속으로 꺼지는 싱크홀 현상이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하루하루 끼니를 챙기는 것도 급급했을 백성들이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밤에는 횃불을 밝혀 땅을 다지기까지 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되지만 토착민들이 만든 자연부락이라 애향심이 대단했었나 보다. 실제로 이 마을은 부락민들의 공동체 의식이 강원도 어느 곳보다 강하다고 한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땅 꺼짐 현상을 그저 살아가기 위해 한 마음으로 땅을 메웠던 시절은 이제 사라졌다. 요즘 개발이란 미명 아래 방치되었던 도심 곳곳에 시도 때도 없이 도로가 푹 꺼지는 싱크홀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공동체도 함께 그 큰 구멍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다.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를 이해하고 손익계산 없이 하나로 뭉쳐야만 가능한 그런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동송으로 가는 시외 3005번이 도착할 시간이다.



누가 감히 청춘을 군바리라 하는가


서울을 기점으로 조선시대 제 2대로인 경흥대로를 따라 반도의 중앙을 치고 올라온 여정은 이제 강원도로 진입했다. 알다시피 강원도는 태백산맥을 분수령으로 영동과 영서로 구분된다. 영동지방은 대관령, 미시령, 진부령 등 많은 고개와 계곡이 우후죽순으로 치솟아 있고, 그 너머로는 7번 국도를 따라 푸른 동해가 줄지어 이어진다. 이와 반대로 내륙으로 재를 넘어오면 영서지방이다. 높아졌던 산맥의 봉우리들이 앞 다투어 산악과 분지가 되어 완만하게 서쪽으로 강물처럼 뻗어 나간다.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높은 데 오르면 푸른 바다가 망망하게 펼쳐지고 골짜기에 들어가면 물과 돌이 아늑하여 경치가 나라 안에서 실상 제일'이라고 강원도를 평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는 아직 강원도의 서쪽 끝자락. 시원한 바다는 보이지 않고 험준한 재와 골짜기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전투형 군대가 산재한 군부대 마을이다. 사실 여기서 부터가 총만 안 들었지 밀리터리 빌리지의 산실인 셈이다. 그 유명한 ‘오버 워치’의 라이브 버전에 드디어 내가 들어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버스가 동송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펼쳐진 풍경은 내 추억의 한 자락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전역을 명 받은 인근 부대의 사병들이 모자와 어깨 견장에 예비군 마크를 당당하게 붙이고 전우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있는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점심시간 즈음인데도 환송의 낮술을 걸친 전역병들은 함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가열한 송별 시위를 하고 있다.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예비군 마크를 보면서 우리 때는 저렇게 심하게 완장질은 안 했는데 하는 우려는 쓸데없는 걱정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예비군을 동경했으면, 그 지긋지긋한 군복에 붙어 있던 상명하복의 계급마크를 잡아떼고 싶었으면 하는 생각에 측은함이 밀려든다.



하지만 이내, 푸르른 날에 개구리복을 벗고 다시 사회로 나가는 이들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어 졌다. 이 땅에 흙수저로 태어나 고관대작 자식들처럼 회피할 수도 있었을 군대를 필수로 가야 했다. 그 바람에 힘들게 사귄 애인들은 죄다 고무신을 거꾸로 갈아 신었다. 그뿐이랴, 이제 군대 갔다 왔으니 철들었다고 믿는 부모님 안심시키려고 복학생 코스프레를 하다 말고 취직부터 걱정해야 하는 우리네 청춘들. 그래 지금 이 시간만이라도 맘껏 즐겨라. 언제 이런 시간이 다시 오겠는가? 누구는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다지만 이런 피할 수 없는 추억이 쌓여 이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그대들이 있기에 청춘이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복받쳐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은 이런 청춘들을 마냥 자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헬 지옥의 한 복판에 내가 들어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대를 이어 군 면제 판정을 받은 고위공직자는 100명에 달하고 국적 포기를 하거나 기득권으로 병역을 면제받은 자들은 무려 2천5백 명이 넘는다. 고위층의 병역면제율이 무려 일반인의 10배 수준에 이른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한 단면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기득권을 이용해 군역을 면제받은 이래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법치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도 역시 이러한 현상은 없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득권 세력은 사실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군역을 면제받기 시작했다. 친일부역을 통해 각종 징용을 면제받았고, 일부는 한국전쟁 당시에도 전선의 피비린내 나는 전방이 아닌 후방 행정으로 가거나 또는 면제되었다. 시쳇말로 장군의 아들, 신의 아들이란 웃지 못할 단어들이 유행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때 보람찬 군대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낮술 한잔하고 거리에서 고성방가를 좀 했다고 해서 그게 무에 그리 비난할 일인가. 즐겨라. 이 대낮같이 소중한 시간을 맘대로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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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얘기지만 내가 군대에서 복무할 때 우스운 얘기가 하나 있었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대한민국의 멋있는 남자 직업을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군인이 2위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후임에게 해주었더니 그 친구가 듣고서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1위가 뭔지 아냐? 민간인이다... 끌끌 끌”



허탈함은 군인의 기본적인 정신수양이다. 이렇게 사회적 유행에 민감하지 못한 것은 당시 군인들이 지금처럼 스마트 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대 안에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그런 환경도 아니었기에 멀고 먼 나라의 얘기처럼 들릴 시대였으니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도 많은 군인들이 후임들을 괴롭혀 쫙 차려입고(그래 봐야 군복인데) 휴가나 외박을 나가도 주변에서 군바리라고 놀리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군바리의 바리는 일본어인 바라의 변형이다. 바라는 ‘들’ ‘무리’라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의 대사로 유명해진 시다바리라는 말도 역시 하인을 뜻하는 시다와 바라가 합쳐진 말이다. 당연히 이 군바리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군인들을 낮춰 부르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그런 말을 우리가 아직 쓰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럽게 여겨야 할 문화다. 자신에게 단 한번 있을 화양연화의 시기를 총 들고 나라를 지키는데 써 버린 이 시대 청춘들에게 다시는 군바리라는 말을 쓰지 말자. 얼마나 아름다운 말들이 많은데 하필 그따위로 우리 청춘들을 계속 폄하할 것인가. 나는 기꺼이 시간을 내서 동송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난 반가운 전역 병들의 사진을 몇 장 찍어주었다. 그래, 그간 참으로 고생했다.



이제 동송터미널의 떠들썩한 전역병 환송식을 뒤로하고 지포리의 신철원터미널로 이동해야 한다. 지포리로 가기 위해선 동송터미널 건너편 이평리 정류장에서 농어촌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이 농어촌 버스는 철원에서 그나마 가장 자주 다니는 마을버스로 철원읍을 통과해 직탕폭포를 거쳐 고석정 방향으로 간다. 이 때문에 서울에서 동송 시외버스터미널로 바로 내려온 관광객들이 고석정을 가기 위해 많이 이용한다. 롯데리아 앞 정류장에서 한 무리의 할머니들이 머리를 쭉 빼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잠시만 한 눈을 팔면 버스가 그냥 지나간다고 불평을 하신다. 터미널 앞이라 복잡하기도 하고 할머니들이 기력이 없으셔서 차를 확인하고 움직이면 가끔 버스가 먼저 출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본시 시내버스란 태생 자체가 손만 들어도 멈추는 것이 장점인 교통수단인데, 조금만 벅적거리는 시골 도시에서도 그런 여유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덩달아 나도 머리를 쭉 빼고 언제나 올지 모르는 농어촌 동송-지포리 버스를 기다린다.




⓸ 시외 3003번 / 상노 1리-동송 시외버스터미널

수유역에서 포천 동송 시외버스터미널을 오가는 경기고속 시외버스이다.

*운행시간 : 첫차 06:00, 막차 21:00 *배차간격 : 평균 40분 / 하루 3대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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