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무려 15년 전 이야기입니다
“인생 뭐 별거 있냐? 그냥 한번 떠나 보는 거지”
지루한 일상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던 2003년의 어느 날. 런던에서 수신자부담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자기가 여기서 내가 좋아할 만한 끝장나는 여행 아이템을 하나 찾았다고 침을 튀기며 자랑을 했다. 나는 그게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대체 뭐길래?'라며 은근 떠보았다. 그러자 친구 녀석이 자랑거리를 끝내 참지 못하고 훅 하고 불어버렸다. IMF 때 홀라당 망하고 나서 빈곤의 나날을 씻고자 정처 없이 유럽으로 정신수양을 떠난 친구가 선물 보따리를 들고 찾아온다는 내용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여행이었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캠핑카를 빌려서 유럽여행을 함께 가보자는 것이었다. 패키지도 아닌 것이 배낭도 아닌 것이.. 캠핑카로 떠나자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뭔가 재미나겠구나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들어는 봤던가. 캠핑카!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달 후 친구는 내가 어렸을 적 꿈꾸었던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세계여행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는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들고 귀국했다. 런던에서 알게 된 또 다른 후배 녀석을 홀려서 푸조 206을 렌트해 텐트를 싣고 유럽의 캠핑장을 석 달간 누비는 사전답사까지 완벽하게 마치고서 말이다.
그 친구가 돌아온 날. 우린 충무로 뒷골목 조그만 고깃집에서 삼겹살에 침까지 튀겨가며 뿜어대는 석 달간의 캠핑여행 답사기를 들었다. 조그만 시골길로 다니는 유럽 캠핑카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그 얘기들은 마치 손자 녀석이 쭈글쭈글한 할머니 젖꼭지를 만지면서 이불속에서 듣는 달콤 쌉싸름한 옛날 얘기 수준을 능히 대적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홀릴만한 가치가 있는 컨셉이었다.
나는 금방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 그래, 기회는 늘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지. 하기사 몇 번의 기회를 놓치고 한참 삭은 나이에 이런 기회를 잡은 나는 서두를 필요를 느꼈다. 곧바로 부리나케 일정을 잡고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캠핑여행은 나에게 있어 그리 낯선 여행은 아니다. 학창 시절 설악산 계곡에서 친구들과 야영도 많이 했고 여름 시즌이면 언제나 해수욕장에는 텐트들로 가득 차 있는 풍경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여행을 캠핑으로 한다는 것은, 그것도 추운 겨울에 유럽 전 지역을 캠핑카로 여행한다는 것은 쉽게 시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난관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첫째는 (지금은 당연한 네비가 렌트 차량에 없던 시대) 지도를 표준 삼아 캠핑카의 운전과 여행 일정을 직접 컨트롤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다양한 언어에 대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시급하고 큰 문제는 두 달여간 6인승의 캠핑카를 빌려야 하는 경비가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단 유럽 전체를 캠핑카로 그것도 고속도로가 아니라 국도를 이용해 작은 마을까지 속속들이 돌아보는 캠핑카 여행을 시작하기 위한 좌충우돌 못 말리는 팀이 꾸려지자 이곳저곳에서 스폰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나이 35세, 직업은 시간이 돈인 프리랜서. 나는 애가 둘 딸린 현역 가장이었다. 물 좋은 보스나 줄리아나에서 퇴짜를 맞고 이젠 돈텔마마에서 얼쩡거려야 하는 비극적 신세를 캠핑카 여행으로 만회해 보려는 독기마저 품고 있는 386 마지막 세대의 초인적 발악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 이럴 때 안 가면 언제 가보겠냐? 인생 뭐 별거 있나? 그렇게 손바닥을 치며 애들처럼 좋아하던 나는 여기저기 손을 벌려 스폰서를 구하고 힘들게 경비를 마련해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캠핑카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짐을 잔뜩 싣고 올라 탄 프랑크푸르트 행 아시아나 541편 비행기는 우리가 그동안 여행을 위해 준비한 기간이 무색할 만큼 더디지 않고 사뿐하게 인천공항의 하늘을 갈랐다. 이제 패키지여행과 배낭여행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할 그런 새로운 유럽의 풍경과 에피소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드디어 시작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