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잊었던 아침을 다시 건져내다 / 체스키 크룸로프

체스키 크룸로프 (Cesky Krumlov)

by 다모토리
낯선 중세마을에서의 불안불안


하루 종일 하늘이 시커먼 독일에서 고군분투를 하다가 드디어 체코로 넘어오니 날씨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우린 가끔씩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프라하에서 뮌헨으로 가는 일정 중에 체스키 크룸로프라는 작은 도시를 들렀다. 사람들이 많이 알지 못하는(하지만 지금은 너무 유명해진) 체코의 이 유서 깊은 도시 체스키 크룸로프는 작은 프라하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중세마을이다. 우리가 애용하던 미셸린 유럽 지도에도 필히 방문할 곳이라는 큼지막한 표시가 있었다. 그렇다면 들려봐야지. 그런데 여긴 캠핑장이 없다. 어쩌지? 에이~ 그냥 가자. 아무렴 잘 때 없겠냐~명색이 캠핑카인데. 오케이!



본래 이 마을은 처음에는 관광지가 아닌 그냥 조용하고 평범한 작은 마을이었는데 오스트리아 배낭 여행객들의 입 소문으로 소리 소문 없이 알려졌다고 한다. 우리가 프라하를 떠나 플젠(Plzen)의 유명한 맥주공장을 거쳐 체스키 크룸로프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완전히 떨어진 저녁 6시. 마을은 어둠에 싸여 있고 도통 어디가 어딘지를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마을 외곽을 돌다가 도로변에 캠핑카를 세운 것이 8시.



마을은 조용하다 못해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 같다. 해가 빨리 떨어지기도 했지만 동유럽의 낯선 마을의 밤이 우리에게 주는 불안감도 한몫한다. 우린 일단 주변에 캠핑카를 세우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캠핑카의 안전에 굉장히 민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캠핑카 안에는 노트북과 카메라 등 여행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장비들이 잔뜩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캠핑카를 두고 시내로 들어서려는데, 건너편 조그만 전화박스 앞에 두 사람이 계속 이쪽을 보며 서성거리는 게 보인다.


“야~ 아무래도 난 여기 있는 게 좋겠다. 쟤네들이 좀 걸리거든.”


바로 몇 달 전에 체코에서 가진 물건을 죄다 털어 먹은 경험이 있는 친구는 유난히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유난스러워하는 친구의 걱정이 그다지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쭈뼛거리던 친구들이 차를 몰고 사라지고 차 문을 단단히 걸고 난 후에야 우린 함께 시내로 출발했다. 우린 그날 밤 작은 중세의 창문을 통해 빛이 세어 나오고 있는 마을 사이를 조용히 걸었다. 사람의 기척은 없었지만 연기처럼 흘러나오는 창문 빛은 낯선 이방인에게 뭔지 모를 안도감을 주었다. 마치 밤새도록 누군가와 속삭이는 그런 느낌.



시내 한복판에서 이곳 출신이라며 자신의 명함으로 돌을 내밀던 골 때리는 청년을 제외하곤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너무 늦었나? 다시 돌아온 캠핑카는 여전히 안전했지만 우리는 일단 마을을 벗어나 근교 외곽까지 나가 주차를 하고서야 비로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낯선 중세의 마을 풍경에 불안한 맘이 들어서 그랬을까? 그날 밤은 유난히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예상치 못한 반전

밤새 뒤 치덕 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6시경 일찍 일어나 차량 안전을 확인한 후 기름을 넣고 바케트로 아침을 간단하게 때운다. 아직 어두운 물안개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안개가 걷히고 아침 햇살이 조그만 중세의 마을을 비추기 시작하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어제까지 차량 도둑을 의심하고 시 외곽까지 나가서 노숙을 한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 조그만 도시는 강렬한 아침 햇살로 나의 눈을 놀라게 한다. 고딕에서 로코코까지 교과서에서만 보던 온갖 양식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동화 속 마을. 마을을 통과하는 반짝이는 블타바 강. 그 강 사이로 피어오르는 장작 때는 연기와 구수한 내음. 높은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환상적인 풍경까지.



그것은 우리가 백과사전에서나 찾을 법한 그런 아침이었다. 그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그 아침. 독한 매연에, 시끄러운 클랙션 소리에, 다이옥신의 검푸른 돔 속에서 미친 듯 내팽겨 쳤던 바로 그 아침이었다. 어릴 적 작은 어촌의 등대에서 만선 깃발을 단 고깃배들이 통통하고 들어오는 아름다운 아침의 기억. 돈벌이한다는 핑계로 아침은 하루 일과의 귀찮은 시작일 뿐이라는 좁쌀스러운 생각에 빠졌던 나. 아침은 늘 숙취에 그리고 잠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난 그동안 잃어버렸던 아침을 제대로 찾아내고 있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사라졌던 내 생애 최고의 아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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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블타바 강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아침을 제공한 중세도시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를 비롯해 호란 비체, 쿠트나 호라 등과 함께 보헤미안 1000년의 역사를 지닌 5곳의 체코 세계 문화유산 중 하나로 유럽을 방랑하던 집시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보헤미안들만의 독자적인 문화유산을 계승해 내려온 전통적인 도시마을로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멋진 올드 타운이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이 올드 타운의 옛 시가지에는 체스키 크룸로프 자메크 성을 중심으로 중세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들이 수백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서 다시 한 번 이 마을을 만난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이지.)


쿠엔틴 타란티노의 '호스텔(Hostel, 2005)'


2005년 일라이 로스 감독의 [호스텔]이란 영화가 전 세계에 개봉되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제작을 맡은 이 스플래터 공포 호러물은 배낭여행객이 슬로바키아에서 겪게 되는 끔찍한 경험을 영화의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 음습한 중세의 고택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배낭여행객들의 팔다리가 푸줏간처럼 마구 잘려나가는 고어물이지만 사실 이 영화의 실제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부시다는 중세마을이 배경으로 활용되었다. 바로 체코의 보석. 체스키 크룸로프다. 영화 <호스텔>은 개봉 당시 바로 제한 상영가를 받았을 만큼 공포보다는 호러-스너프에 가까운 잔악 공포물이었다. 이후 영화의 1분 30초 분량을 자진 삭제하고도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을 만큼 마니아층에 가까워 국내에는 개봉되지 못했고 어둠의 경로로만 알려져 있는 영화였을 정도다. (당시 한국에선 DVD도 출시되지 않았었다)


일라이 로스 감독의 [호스텔, 2005] 포스터
일라이 로스 감독의 [호스텔] 속 한 장면


나는 나중에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이 그 영화의 촬영지였다고 해서 실제로 촬영을 한 주택과 골목을 찍어 놓은 필름을 검색하며 다시한번 돌아보니 그저 허탈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영화 시나리오를 보고 적절한 촬영 장소를 물색하던 로케이터의 마인드가 참으로 웃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에서 공포의 흔적을 찾은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들다가 문득 무서운 생각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의 이면에 존재하는 낯선 공포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곳에 도착한 그날 밤 어두컴컴할 때 찾아온 이 마을의 성 외곽에서 느꼈던 그 정체모를 불안감과 일맥상통하는 그것이었다. 아! 그랬구나. 밤과 아침의 풍경 그리고 낯선 곳의 이미지가 주는 여행객의 감정을 그 영화는 아주 디테일하게 표현하고 있었군.. 하는 엉뚱한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 내가 느끼고 있었던 이 마을의 아침은 그런 낯선 공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보헤미안의 성지가 된 중세마을


그렇게 새벽부터 시작된 아침은 10시 30분이 지나가도록 계속되었다. 물안개가 이슬이 되고 공원의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아름답다. 우리는 마을 안쪽에 있는 조그만 공원을 거닐며 기분 좋게 아침을 만끽하고 있었다. 물안개가 주는 멋진 풍경과 어릴 적 잃어버렸던 이슬이 떨어지는 맑은 아침 햇살을 온전하게 경험한다. 한 겨울임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아침 햇살을 볼 수 있는 마을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물론 마을의 중심지역은 겨울엔 텅 비어 있다고 하지만 이 조그만 마을은 전체가 펜션과 호스텔로 구성되어 있어서 여름 성수기에는 방이 없을 정도로 유럽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란다. 구 시가지의 건물은 뭐 특별하다고 할 정도로 멋진 건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을을 한 바퀴 걷다 보면 마을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중세의 세트장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포스를 발산한다.


아침이 멋진 날은 낮잠도 달콤하다. 성안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사진 백업도 할 겸 에스프레소를 한잔 시켜놓고 꿀맛 같은 낮잠을 청했다. 카페에서 자료를 뒤져보니 S자로 휘감는 블타바 강을 끼고 있는 구시가지 안에 있는 다양한 호스텔들은 가격이 무척 저렴해서 하루에 조식 포함 일인당 대략 7천 원에서 1만 원 정도 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배낭여행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글 쓰는 사람들이 이 곳에 온다면 정말 한 달 안에 대박 터지는 시나리오 몇 편을 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득 들 정도로 마음의 평온이 그지없이 오래오래 유지되는 그런 이상한 마을이었다. (물론 호스텔 같은 공포영화 시나리오는 말고 ^^)


903euro-114.jpg 부드바이저 드래프트가 맛있었던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파파스 레스토랑'


우린 하루 종일 마을에서 빈둥대다가 오후에 마을 한 복판에 있는 “파파스 레스토랑”에서 멋진 스테이크와 시원한 부두 바이저의 알싸한 맛을 느끼며 하루를 알차게 즐겼다. 그리고 생각한다. 누군가 오늘도 지독한 매연과 스트레스 그리고 일상적인 반복으로 인한 무력감으로 나날이 지쳐가고 있다면 이 곳을 꼭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당신이 잃어버렸던 아침을 찾으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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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기서 그동안 잃어버렸던 어릴 적의 반가운 아침을 다시 찾았다. 그것은 어떤 작은 희망을 다시 찾았다고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잃어버리지 않고 고이 간직한 어느 작은 도시가 그 도시를 찾은 사람의 잃어버린 기억까지 다시 되찾아주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 여행의 가장 보람찬 기쁨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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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otori's travel notes


골목에 아침이 들어오다

아침은 언제나 그렇게 끈질기게 골목길을 찾아들어 온다. 긴 아침 내내 사람들은 그 햇살을 받으며 하루를 준비하고 아침이란 녀석은 햇살을 무기로 사람들의 나태함을 긴장으로 바꾼다.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 아침은 흐리멍텅하다.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찾은 예전의 아침. 그 끈질기고 생명력 있는 진드기 같은 햇살이 골목을 지나 들이칠 때의 그 느낌이란. 참으로 상쾌한 설득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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