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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Apr 30. 2016

삶이라는 종말의 기록 <토리노의 말, 2011>

(The Turin Horse, 2011)


가끔 아무 생각 없다가 느닷없이 보석 같은 영화를 만날 때가 있다. 말 그대로 횡재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가 그랬고, 바흐만 고바디의 영화가 그랬고.. 빔 벤더스의 영화가 그랬다. 이 영화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역시 그렇게 만났다. 1920년대 작인 '잔다르크의 수난'을 현대적 버전으로 만난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그 꿈이 스크린에서 현실로 일어났다. 어썸...


이 영화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광장에서 마부에게 얻어맞고 있는 말을 보고 울면서 발광했다고 하는 니체의 일화에서 '그 말의 그 후'를 그린 '토리노의 말'(일명 니체의 말)이다. '런던에서 온 사나이'(2007년)로 잘 알려진 헝가리의 명장, 벨라 타르가 감독을 맡았다. 흑백 장편인 이 영화는 2시간 34분 정도의 다소 긴 러닝타임을 지니고 있다. 2011년 '제6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사실 내러티브 자체만 놓고 보면 별거 없이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작품이지만 다양한 감독의 의식을 영화 전편에서 느낄 수 있다. 역동적인 오프닝, 일상의 지루한 롱테이크, 무겁고 암울한 배경음악과 자연의 소리, 우리는 순간 감독이 만들어 놓은 삶의 디오라마에 빠져 마치 세뇌를 당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뭐지... 이 영화... 나에게 좋은 영화는 늘 이런 물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니체의 말인가? 감독 벨라 타르는 왜 니체가 정신분열 속에서 그토록 울분을 토해내게 만들었던 그 토리노의 말을 영화의 모티브로 잡았을까? 사실 그 시대의 그러한 상황은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니체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정황만 전해오고 있으니까... 니체가 누구인가? 19세기 이전 신의 사상만이 지배하던 암흑의 시기에 인간의 정수를 꺼내어 이성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런 위대한 정신을 소유한 그의 피폐한 종말은 '나는 바보였다'로 보잘것없이 귀속된다.


투병중인 1899년의 니체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사상가 니체는 토리노에서 움직이지 않는 말을 무섭게 채찍질하는 마부를 말리며 크게 울었다. 그리고 말년의 그는 그 사건 이후 10년 간 죽을 때까지 정신이상자로서 살게 된다. 니체는 대체 왜 그토록 통곡을 한 것일까? 니체는 말을 자신으로, 즉 사람으로 보았다. 인간이 진보로, 이념으로 세상을 넘어서려 하지만 결국 마차에 묶인 말처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넘어서려고 노력해도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세상의 구원자가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 '토리노의 말'에서 니체의 이러한 생각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러한 감독의 의중을 잘 대변하고 있다. 흑백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가난한 시골의 오두막집을 향해 가는 마부와 말... 롱테이크로 이 장면을 거칠게 연출한 감독은 시작부터 인간의 이성이나 종교 따위는 이미 생각도 하지 못하게 거친 바람과 소리 만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힘에 부쳐하는 말을 대상으로 움직이는 잔잔하지만 묵직한 카메라 앵글은 이 영화의 강력한 메시지다.


영화 <토리노의 말>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방법적 담론으로서 소멸하는 현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삶의 디테일은 매우 정확하며 일정하다. 등장인물들의 삶은 일정한 패턴을 보이며 반복되고, 랜덤 한 일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시골집. 말은 먹이를 먹지 않고, 마차를 끌지 않으려고 버틴다. 마부인 아버지와 딸은 그러한 말과 함께 6일의 일상적인 시간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뜨거운 감자 한 덩어리가 그들의 식사다. 그리고 옷을 입고 다시 옷을 벗고, 물을 길어오고... 빨래를 널고, 그리고 불을 끈다. 지루한 일상은 일정한 간격으로 삶의 방식이 되어 흐른다. 여기에 어떠한 의식이나 종교적 체험, 그리고 이성은 배제된다. 여기에서 삶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각자 의견은 모두 현실에 입각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여기에 누군가가 찾아온다. 처음에 찾아오는 사람은 동네 주민이다. 술을 사기 위해 지인의 집을 찾은 방문객은 엄청난 폭풍이 도시를 휩쓸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 바람이 니체, 이성, 반 종교적인 과학적 태도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바람에 의해 사람들은 종교적 환상과 어두운 종속의 시대를 벗어나게 되었으며 '사제'라는 것들은 다 쓰레기라고 비난한다. 이 말을 지긋이 듣고 있던 주인공 마부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한다.

" 뭔 씨잘 데 없는 잡소리여... 술 받았으면 어서 꺼져"

그렇게 첫 번째 방문객이 사라진다. 새로운 이성의 지배와 삶의 처절한 디테일이 공존하지 못했던 당시의 시대적 적나라함을 감독은 방문객을 통해 대리로 이야기한다. 두 번째 방문객은 노마디즘을 삶의 철학으로 여기는 집시들이다. 집시들이 마당에 있는 우물에 물을 뜨러 오자 마부는 딸을 시켜 그들을 내쫓게 한다. 그들은 욕설을 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물을 떠 준 딸에게 뭔가를 선물로 건넨다. 그것은 바로 신의 상징인 '바이블'이다.



정착과 이동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다. 성경은 그러한 인류의 역사를 정리한 신앙서이며 그 성경은 인류가 19세기까지 갇혀 살았던 암흑의 시대를 흐르던 정신적 지류였다. 그 상징물을 받아 든 딸은 어두운 밤, 간들간들한 촛불에 의지해 성경구절을 읽는다. 니체가 그토록 거부한 신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다시금 인류의 정신적 지주를 마주하게 하는 감독의 의도는 인간의 의지가 아방가르드적인 면과 아카데믹한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종교는 종교대로 실존할 것이다. 근대 과학의 발전과 이성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종교적 의식이 해체되었지만, 그 종교는 지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능적인 인간의 다른 필요로 인해 반드시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는 어떠한 메시지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이들의 삶을 구하지는 못한다. 토리노의 말은 파업을 했고 그 때문에 그들은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으며, 마당에 우물은 집시가 다녀간 후로 사라져 버려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



도시를 휩쓴 폭풍 같은 자아, 이성의 발견과 이에 맞서는 종교적 권위..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삶을 사는 데 있어 당장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종합적인 삶의 허구이자 껍데기이다. 오늘도 그들의 식탁 앞에는 감자 하나와 누을 자리 하나, 바람을 막을 돌덩어리 집이 전부다. 삶은 자연 앞에서 준엄하게도 그렇게 거칠고 심플하다.


종교적 권위, 초인의 이성, 영혼회귀 등은 인간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마주 대하고 있는 거친 자연과의 싸움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게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일단은 살고 봐야 한다. 살려면 먹어야 한다. 인간을 유지하는 기본질서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렇게 마부의 집은 교회도, 이성도, 희망도, 슬픔도 없는 그런 적나라한 디테일한 일상의 공간일 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마부와 딸이 살고 있는 집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자 다른 세계 혹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점이다. 감독 벨라 타르는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인터뷰했다. 요람에서 나온 인간은 결국 무덤으로 회귀하는 운명론적 시간을 품은 존재다.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그 영원의 시간 사이에 인간은 유를 차지하는 찰나의 삶을 살기 위해 '버티는' 시간을 갖는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마부 부녀의 삶은 이러한 버티기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로지 계속 되풀이되는 삶의 연속이다. 잠에서 깨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술 한 잔을 마신 후 우물에서 떠온 물을 데워 익힌 감자를 먹고 마구간의 말을 돌보고, 하루를 마치는 일상의 무한한 반복... 이런 반복적인 삶은 변화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조그만 일상들이 켜켜이 쌓이고 흐르면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감독은 그 변화 없는 일상을 다양한 각도의 카메라 앵글로 심플한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낸다. 이들에게는 희망도 없지만 그렇다고 절망도 없다. 이처럼 인간이 운명에 맞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투쟁은 죽는 그날까지 묵묵히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다. 결국 <토리노의 말>은 인간이 삶과 투쟁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벨라 타르는 <토리노의 말>에 대해서 영국의 영화사이트 'Eye for Film '과 이런 인터뷰를 했다.


"<토리노의 말>은 묵시록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일상에 대한 영화다. 인간은 불을 필요로 하고, 물을 필요로 하고, 먹을 것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Béla-Tarr


그러면서 감독은 인간이 존재 의미를 갖는 시간은 '자연과 관계를 맺을 때'라고 말한다. 자연과의 관계를 맺을 때.. 그래서 <토리노의 말>에 등장하는 자연은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 속 마부 부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영화 내내 불어닥치는 회오리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이 바람 속을 맞서고 부딪히는 그 자체가 바로 이들의 존재적 의의다. 자연이 있은 후에 인간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벨라 타르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바로 인간의 삶의 투쟁은 곧 자연과의 투쟁이라는 사실이다.


황량한 벌판에 무섭게 몰아치는 바람과 먹을 것이라고는 감자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부녀, 과연 저런 곳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먹어,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아버지가 나오는 인간에 관한 처절한 삶의 영화. 니체가 그토록 광분하며 통곡을 한 인간의 본질... 구원자가 될 수 없는 인간의, 너무나 인간적인 한계들이... 시간이란 요람에 담겨 삶을 진행시키는 무겁디 무거운 영화... 너무나도 인간적인 니체를 떠올리게 하는 '토리노의 말'이다....


평점 **** /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도 살아내야만 하는 인간의 처절한 존재 이유를 롱테이크로 건져낸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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