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게도 겨울방학이 필요해

나만의 리듬으로 보내다 보면 선명해지는 것

by 김희성

손에 쥐고 있던 여러 콘텐츠들이 각자 끝을 향해 매듭을 지어간다. 도저히 안 풀릴 것 같던 일도 데드라인이 되면 어찌저찌 마무리가 된다. 10여 년이 넘게 수많은 마감을 하면서 '원고는 마감이 써준다'는 인생의 진리를 알게 된 후에는 도저히 해결될 기미를 안 보이는 일이 있어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상황에 압도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마침표를 찍게 된다. 세상 모든 일에 통용되는 법칙일 테다.


한 번의 마감이 끝나고 나면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프로젝트가 또다시 시작된다. 다행히 이번 달에는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기까지 숨 고르기를 할 여유가 주어져 요 며칠 동안을 겨울방학처럼 보냈다. 어른의 겨울방학은 이렇다.



1. 아침에는 알람 없이 눈 뜨고 싶을 때 눈을 뜬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알람 없이'다.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해야 할 일이 없을 때의 나는 오전 8~9시 사이에 눈을 뜨더라. 자신이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자는 사람인지만 알아도 삶의 질이 달라질 거라고 한 어느 전문가의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들은 적이 있다. 아무런 긴장감이 없는 상태의 나, 그러니까 자연인 상태의 나는 오전 8~9시에 기상하는 사람이었다. 알람 없이 기상하는 것만으로 쫓기는 느낌이 들지 않고, 오늘 하루를 오롯이 나의 리듬으로 살아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그 좋은 기분은 보통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어진다. 가벼운 하루는 자연스러운 리듬에서 시작된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2. 휴대폰은 멀리 던져둔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휴대폰을 더욱 자주 들여다보게 됐다. 코어 타임에는 집중하고, 따로 휴대전화 체크하는 시간을 정해두고 일하라는 조언도 새겨들을 만 하지만 동시에 여러 사람과 일하는 프리랜서의 특성상 그러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나의 마음이 편치 않다. 시시각각 빠르게 업데이트해 줄수록 업무에 도움 되는 일도 많기 때문에 일할 때의 나는 휴대폰과 거의 한 몸이다.


그렇지만 바쁜 일들이 모두 마무리되고 잠시 소강상태가 되는 며칠이 주어지면 휴대폰을 최대한 멀리 던져두는 편이다. 확인해야 할 연락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어른의 겨울 방학이라고 하면 조금 슬프려나. 휴대폰을 집 안 어딘가에 둔 채 오랜만에 영화를 집중해서 보거나 책을 읽는다. 휴대폰에 신경 쓰지 않으면 작품이 쏙쏙 더 잘 들어온다. 몰입의 감도가 달라진다.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널 때, 집 안 곳곳을 정리할 때도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다 보니 일종의 명상처럼 느껴진다. 성공의 척도가 있다면 디지털 기기를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삶이 아닐까.


3. 무엇이든 비워낸다

자료로 필요할 것 같아 캡처한 이미지가 사진첩에 점점 쌓인다. 겨울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사진첩을 비워낸다. 휴대폰을 멀리 던져두긴 하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한 번씩 집어들게 된다. 그래서 한 번 휴대폰을 손에 잡을 때마다 10개씩 지우기로 정했다. 일단 10개만 지워야지, 하다 보면 20, 30개까지도 순식간에 지우게 된다. 다운로드한 파일들로 어질러진 컴퓨터도 정리해 준다. 언젠가 쓸 것 같아서 못 비우고 있는 파일도 많지만 완벽하겐 아니더라도 확실히 없어도 되는 것들은 지운다. 이 작업도 마감이 끝난 직후 하는 것이 효율이 높다. 시일이 한참 지난 후에 보면 앞으로 필요한지, 아닌지 파악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쌓인 쓰레기가 있다면 비워낸다. 책상 위 잡동사니도 선별해서 버린다. 냉장고 안도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 없는지 점검한다. 무엇이라도 좋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비워야 한다면 비운다.


4. 해야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

폭풍 같은 일들을 끝내고 여유가 있는 시기에는 해야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인풋이 필요한 기분이 들 때는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들고 좋아하는 동네 카페에 가 훌륭한 커피와 함께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긴다. 그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갑자기 쓰고 싶은 글감이 생각나기도 한다. 당장 급한 일을 쳐내느라 잠시 잊고 있던 인생의 계획에 대해서도 숙고해 보게 된다. 해야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면 '인생에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이 절로 떠오른다.


5. 몸이 원하는 것을 먹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는 건강한 음식보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게 된다. 나름의 겨울방학을 보내다 보면 이상하게 당기는 음식들이 있다. 나의 경우 해산물 요리(특히 해물누룽지탕, 초밥, 전복죽)나 솥밥, 돌솥 비빔밥, 신선한 과일 같은 것이 그렇다. 예전에 8 체질 검사를 한 적 있는데, 신기하게도 해산물이나 채소가 나의 체질에 잘 맞는 음식이라고 하더라. 우리의 몸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몸이 원하는 것을 따라 내가 아는 한 가장 맛있는 식당으로 향한다. 제철 요리를 먹고 나면 신기하게 안색도 단숨에 좋아지고 활력이 생긴다. 아무리 폭풍 같은 마감 속에서도 건강한 식사를 잘 챙기는 동료들이 간혹 있는데, 정말 좋은 습관이라 생각한다. 나도 올해는 그런 사람이 되어 보리라고 결심해 본다.



요 며칠 동안 밀린 영화를 보고 제철 음식을 먹고 집을 비워냈다. 겨울은 그런 계절인 것 같다. 솎아내고 가지치기하는. 나만의 겨울방학을 보내며 인생에서 필요 없는 것과 굳이 짊어지고 가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겨울방학에는 제철 생선을 챙겨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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