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순달이, 쉰달이, 순다리
온몸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은 끈적거림이 느껴지는 동시에 뜨거운 공기가 휘몰아치는 8월의 한낮, 집에 들어와 냉장고를 열어보면 한구석에 우유도 요거트도 막걸리도 아닌 것이 비슷한 체를 하며 자리 잡고 있다. 제주의 아이들은 무더운 여름 외출이 끝나고 들어올 때면 얼른 컵을 꺼내 들고 그 병에 있는 것을 한 잔 따라 벌컥벌컥 들이킨다. 시원하면서 새콤하고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약간 알딸딸한 느낌마저 드는 제주의 여름 맛 한 잔. 바로 쉰다리다.
제주사람이라면 엄마, 혹은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여름 음식 중 가장 기억나는 음식으로 으레 쉰다리를 꼽을 것이다. 여름철이면 항상 쉰다리가 우리 집 냉장고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고, 엄마는 그 쉰다리가 바닥나기 전에 다시 채워놓으시느라 부엌에서 여름 내내 쉰다리를 만드시곤 했었다.
그런데 쉰다리는 정확하게 어떤 음식을 뜻하는 걸까?
“쉰다리는 제주의 전통 음료로, 곡물을 이용해 발효시킨 쌀 요거트라고 할 수 있어요.
제주인이 즐겨 먹었던 저알콜음료죠.”
내게 제일 처음 정식으로 제주음식을 가르쳐 주셨던 교수님께서는 쉰다리의 정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제주음식 스승님인 친정엄마에게 쉰다리가 뭐냐고 물었더니, 우리 엄마의 대답은 이러했다.
“쉰다리가 뭐긴, 쉬기 직전의 밥을 버리기 아까우니까
누룩 넣고 만든 거지.”
사실 어떤 정의가 맞는 것인지는 나는 모른다.
지역마다 쉰다리, 쉰달이, 순다리, 순달이 등등 부르는
이름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꼭 ‘쉰다리’라고만 부를 수도 없다.
또, 지역마다, 집마다 각각의 쉰다리 만드는 법이 있기 때문에 ‘쉰다리는 이것이다’라고 정의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내 기억 속에 친정엄마가 만들어 준 쉰다리는 이런 모습이다. 우선 발효가 끝난 쉰다리를 냉장고에 차갑게 식힌다. 거기에 작은 야쿠르트를 하나 까서 넣어 섞는다. 그리고 유리잔에 담으면 끝. 그렇게 유리잔에 담은 쉰다리를 내밀며 친정엄마는 ‘시원하게 한 잔 마시라’ 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 여름철 냉장고 한 켠에는 늘 요구르트 한 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의 쉰다리는 작은 컵 한 잔만 마셔도 약간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왔었는데, 아마도 다른 집보다 조금 더 알코올이 많이 들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쉰다리를 정의하자면,
쉰다리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 특히나 잘 쉬었던 보리밥을 버리지 않고 여기에 물과 함께 누룩을 넣고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 발효시켜 마셨던 여름철 제주 음료이다.
겨울보다는 여름에 더 빨리 발효되기 때문에 겨울 음료보다는 여름 음료로 통용되는 것 같다. 약간의 알코올기가 있지만, 술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또 도수가 약해 술의 한 종류로 보기에는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음식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제주 여인들의 조냥(절약)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식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주로 보리밥으로 쉰다리를 만들었지만, 현재는 보리밥보다는 쌀밥이 주곡이 되어 버려서 쌀밥으로 쉰다리를 많이 만들어 먹는다. 행사 때나 외부에서 밥을 사용하다 애매하게 남아 처치곤란 해진 경우가 있다면 제주의 아주망들은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한다.
“나 밥 남은 거 싸도라.
이 밥 가져강, 쉰다리나 만들어 먹어사켜.”
친정엄마는 여름에 과식하거나 속이 더부룩할 때는 쉰다리 한 잔이 천연 소화제 역할을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속이 답답하다고 할 때면 늘 ‘한잔하면 시원하게 다 넘어간다’며 요구르트 섞은 쉰다리 한 잔을 권하셨다. 이렇게 나에게 쉰다리는 약간 취기가 올라오는 저 알코올음료이면서, 천연 소화제 역할도 하고, 또, 살짝 쿰쿰한 맛이 혀끝에 감도는 맛이 너무나도 토속적인 맛을 지닌 제주 전통 음료 정도였다.
한창 제주음식을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었을 30대 중반, 곽지의 한 마을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제주음식 수업을 했던 적이 있었다. 이날의 음식 주제는 상애떡 이었는데, 나는 책으로 열심히 공부한 대로, 상애떡은 밀가루에 막걸리나 탁주를 넣고 발효시켜 만든 제주의 전통떡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의 말을 가로채며 이의를 제기하는 어르신이 계셨다.
“무사, 상애떡에 막걸리를 넣어서 만들어서게?,
그거 아니여, 상애떡은 쉰다리로 만들어나서,
막걸리 넣엉 만든 건 옛날꺼 아니여.”
순간 당황했지만, 곧 그 어르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책과, 인터넷으로 배운 제주의 상애떡은 밀가루에 막걸리를 넣어 발효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곽지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이것과 달랐다. 곽지마을에는 쉰다리로 상애떡을 만들었다고 기억하시는 분들이 꽤 많았다. 그 이후에 다른 마을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쉰다리 상애떡에 대해 여쭤보니, 막걸리로도 물론 상애떡을 만들었지만 이는 막걸리가 상업화되어 쉽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된 이후였다고 한다. 그 전에는 만들기 어려운 막걸리보다는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쉰다리로 상애떡을 만들었다는 것. 책을 통해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이야기를 현장에서 듣는 그 순간, 나는 희열을 느꼈다.
뿐만 아니었다. 쉰다리를 오래 발효시키면 술이 아닌 식초가 되어 버리곤 하는데,
이 쉰다리 식초는 여름에 식욕을 돋구어 주고 살균을 담당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자리물회에는 뭐니뭐니 해도 쉰다리 식초와 제피를 넣어 마무리하는 것이 제라지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역시, 30대의 제주토박이인 나에게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잊혀져 가는 제주음식쯤으로 쉰다리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토박이 친구들과 함께 쉰다리 이야기를 꺼내면 쉰다리를 안 먹어 본 친구들이 거의 없다. 비교적 젊은 제주의 청년들도 기억하고 있는 이 쉰다리는 우리 제주 어른들이 물려주었고 현재도 살아있는 ‘현재진행형’ 제주전통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집집마다 쉰다리 스타일은 조금씩 달랐다. 나처럼 엄마가 요구르트를 섞어 주기도 했고, 할머니가 설탕을 타서 꼭 약지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주셨다는 기억을 가진 친구도 있다. 다른 집은 아빠가 막걸리 대신 먹는 음료라 아이들이 먹을 양만 따로 불에 끓여 알코올을 날리고 정말 요거트처럼 꾸덕하게 만들어 숟가락으로 긁어가며 먹은 기억도 있었다. 누룩과 삭혀진 밥알을 체에 걸러내 음료처럼 마시기도 하고, 건더기까지 식혜처럼 함께 씹어가며 마시기도 했다. 각 집마다 쉰다리 제조법과 음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분명히 같았던 것은 먹다 남은 밥이든 쉬기 일보 직전의 밥이든 쉰다리를 하기 위해 만든 밥이든 우리가 먹는 주식에 누룩과 물을 넣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분명한 사실은 이 쉰다리를 만들 줄 아는 삼십대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쉰다리가 술에 비해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고 단맛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술을 만드는 것과 똑같이 호화된 곡류에 누룩을 넣지만 술을 만들 때 보다는 훨씬 적은 양의 누룩을 넣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사실은 완전히 발효시키지 않고 중간에서 멈추기 때문에 단맛이 강하고 도수가 약한 쉰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쉰다리를 만들어 보면 집집마다 도수가 조금씩 다른데, 그 이유는 누룩과 밥(보리밥)의 비율이 각각 다르기 때문일 것이며, 쉰다리의 농도가 집집마다 다른 이유는 첨가하는 물의 양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인의 여름 음료인 쉰다리는,
제주에만 있는 음식인걸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가양주가 있고 또, 각 지역마다 독특한 주조법이 있는 나라이다. 즉 지역마다 술을 빚기 위한 누룩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냉장고가 없던 그 시절의 여름, 우리나라 각지에서 주곡이 남아 쉬기 직전까지 갔을 텐데, 과연 제주에만 쉰다리 문화가 있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도 감주라는 이름으로 쉰다리와 비슷한 음료가 있다. 지금 한국에서 감주라고 하면 식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엄연히 감주는 호화된 곡류에 누룩을 넣어 단시간에 불완전한 상태로 발효를 끝내 단맛을 끌어내는 음료로 쉰다리처럼 알코올 도수가 낮다. 그리고 식혜는 누룩이 아닌 엿기름을 사용한다. 혹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단시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단술이라고도 했다. 반면 이름은 같지만, 제주의 (골)감주는 차조를 호화시켜 골(엿기름)을 넣어 만든다. 주방문, 증보산림경제, 임원십육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등 옛 문헌에서도 감주 만드는 법이 나와 있는데, 그 주조법이 복잡한 편이지만 밥+누룩+단시간발효 공식은 같았다. 그런데 일반 가정에서는 먹고 남은 쉰밥에 누룩을 넣고 버무려 감주를 만들어 먹었다 했다. 맞다. 좀 더 대중적인 감주는 제주의 쉰다리와 그 만드는 방식이 거의 같았다.
나는 일본 영화 <리틀포레스트: 여름과 가을>편을 보다가 제주의 쉰다리와 비슷한 음식이 나와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이치코는 습도100%라고 표현할 정도로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때 시원한 감주를 만들어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치코는 백미로 죽을 쑤고 여기에 누룩과 이스트를 넣어 반나절 발효시켰다. 그다음 면보에 누룩과 쌀알을 건져 낸 후 맑은 물 걸러 병에 담아 냉장고에 시원하게 두었다. 다음날 밭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이치코는 냉장고에서 그 아마자케라 불리는 단술을 너무나 시원하고 달콤하게 마셨는데 그 장면이 마치 제주사람들이 한여름 일을 하고 돌아와 쉰다리를 시원하게 들이키는 장면과 일치해 몇번을 다시 돌려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 리메이크 한 <리틀포레스트>에서는 고두밥을 지어 누룩과 물을 넣어 5일 동안 발효시켜 막걸리를 만들었다. 한국판 <리틀포레스트>에서는 겨울에 친구 셋이 함께 도란도란 모여 김치전과 함께 막걸리와 마신다. 오히려 한국판의 막걸리보다, 일본원작의 감주가 제주의 쉰다리와 더욱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장면에서 감주, 아니 제주 쉰다리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이렇듯 제주 사람들에게 쉰다리는 한여름의 갈증과 더위를 식혀주는 제주여름음료 이다. 그리고 육지부에는 쉰다리의 또 다른 이름, 감주(혹은 단술)가 있다. 우리가 아는 모주도 감주의 일종이다. 이름은 다를지 몰라도 한 여름에 엄마들이 가장 지혜롭게 가족의 더위를 물리쳤던 강력한 음료. 각각의 지역과 각각의 집안마다 이야기가 있는 그런 저 알코올 여름음료가 혹시 올여름에도 여전히 냉장고 한 켠을 지키고 있지는 않을까?
이번 여름엔 우리 엄마의 쉰다리 레시피를 한 번 전수 받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글은 <제주의 소리> "제주댁, 정지에書" 에 연재되는 글과 일러스트입니다.
@jeju_cookinglife
오늘도 제주댁 : 제주 음식을 공부하는 제주토박이 워킹맘
@iroiro.one
이로이로 : 제주도 작은 마을 작은 공방에서 그리고 쓰는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