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들의 삶의 저편. 동문시장
몇 번의 태풍과 비가 지나가고 뜨거웠던 제주의 여름이 자연스레 가을로 넘어가고 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온다는 것은 우리나라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추석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뜻일 것이다. 이미 제주의 시장도 평소와 다른 명절 분위기가 나기 시작했다. 물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명절을 앞둔 시장의 분위기가 예년과 달리 조금은 조심스러워 보이기도, 불안해 보이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장의 상인들은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히 명절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차시설이 잘 갖춰진 대형마트나 클릭 한 번으로 배달까지 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명절 음식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제주에는 백화점이 없기 때문에 제주사람들은 아이들의 추석빔의 경우 칠성통이나 연동의 의류매장을 이용하거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다. 감사한 분들께 마음을 담아 보낼 선물도 프로모션을 활발히 펼치는 세련된 상점가에서 사거나 할인의 폭이 넓고 간편한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한다. 특히, 온라인을 이용해 명절 음식 재료를 준비하거나 추석빔, 선물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비중은 해가 갈수록 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렇다. 손가락 하나로 핸드폰을 이용해 빠르고 손쉽게, 편리하게 제각각 명절을 준비한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명절음식 만큼은 정성을 들여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주의 어른들은 이런 젊은 세대의 방식이 탐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우린 이걸 다 시장에 가서 해결해나서!”
예전에는 설이나 추석 등 큰 명절이 다가오면 수많은 제주 사람들은 동문시장을 찾았다. 길게는 명절 몇 주 전, 짧게는 며칠 전부터 동문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어물전, 정육점, 기름집 등에서 미리 추석 때 사용할 재료들을 주문해 두기도 했다. 지금은 쉽게 볼 수 없지만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동문시장 어물전에서 상에(상어)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제주 사람들, 특히 제주시 사람들은 다들 명절 준비에 필요한 대부분의 식재료를 동문시장에서 구입하였다.
비단 명절뿐일까? 제주 가문잔치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신부상 위의 꽃닭도 당연히 제주 동문시장에서 구입하였다. 제주 어른들은 가문잔치가 많이 치러지는 주말 아침이 되면 동문시장 닭집들에 꽃닭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씀하신다. 최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고기국수의 핵심 식재료인 중면(건면)도 최근까지 동문시장 내 한성국수라는 국수공장에서 생산되었다. 지금도 국수 기계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지만 약 이년 전, 그 기계소리가 멈춰버렸고 지금 그 공장터에는 오메기떡집과 농산물판매점이 들어서 있다. 우리세대가 좋아하는 떡볶이집 옆에는 항상 별미로 사 먹었던 닭똥집(닭 모래주머니)을 팔던 코끼리통닭집이 있었는데 그 또한 최근에 제주관광상품을 파는 점포로 바뀌었다.
“우리 운동화 사러 가게.”라는 말은 곧 동문시장으로 가자는 이야기였다. 그 정도로 제주동문시장, 그중 제주 최초로 백화점식 상가형태를 띠었던 주식회사동문시장은 늘 손님들로 북적여 발 디딜 틈 없었다. 추석이 다가오면 추석빔과 운동화를 사기 위해 주식회사동문시장으로 사람들이 몰렸고 자녀의 결혼이 다가오면 부모님들은 당연히 동문시장을 찾아 이불, 커튼, 한복 등 혼수 일습을 구매하였다. 혼수품을 만드는 경쾌한 재봉틀 소리가 주식회사동문시장 1층을 가득 채웠다면 2층은 동양극장의 영사기가 늘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주식회사동문시장은 제주의 패션 1번지이자 젊은 청춘들이 찾는 최고의 데이트장소였다.
주식회사동문시장의 건물 외관은 언제든 제주항을 떠나 출항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 하얀 배의 모습으로 그 자체로 대장부다운 위용이 넘쳐난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커다란 건물이 마치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이다.
제주 사람들은 제수 음식 장만과 추석빔, 추석 선물 구입을 으레 동문시장에서 해결하였다. 상인들의 인심도, 구매자들의 설렘이 가득했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렇게 제주 사람들은 중요한 순간을 준비하기 위해 제주동문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시장 근처에 동일주도로와 서일주도로의 종착지인 터미널이 있었던 터라 제주 각지에서 가장 신선하고 질 좋은 상품들은 제일 먼저 동문시장으로 당도했고, 이 상품들을 사기 위해 제주도 전역의 제주사람들이 제주시로 몰려들었다.
장을 본 후, 영화를 보고, 밥도 먹고, 약국에 들러 상비약을 사기도 했다. 또, 목욕도 했고, 이발도 했다. 시장 안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동문시장은 지금의 종합 쇼핑몰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1954년 개점 한 제주동문시장은 제주의 공식 1호 시장이다. 제주동문시장은 총 7개의 시장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제주동문재래시장, 제주동문공설시장, 주식회사 제주동문시장. 제주동문수산시장, 제주골목시장, 제주동문야시장, 새벽에 열리는 도깨비시장까지 각각의 특성과 개성을 가진 7개의 시장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어 전국적으로도 시장의 규모가 꽤 큰 편이다. 또, 각 시장의 운영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불철주야 언제나 불이 꺼지지 않는 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관광객들이 사랑하는 제주의 향토시장이자 너무나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제주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 시장임은 변함이 없다. 시장 골목골목을 걷다보면 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무리 동문시장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장 곳곳에는 제주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그대로 녹아있다. 때문에 동문시장에 대한 제주사람들의 사랑은 앞으로도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예전의 동문시장이 제주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엮여 있는 시장이었다면, 지금은 좀 더 관광객들을 위한 시장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다. 관광 기념품을 파는 점포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시장에서 파는 음식들도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품목으로 바뀌고 있다. 때문에 제주 어른들은 동문시장만의 매력과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주식회사 동문시장은 간간이 재봉틀 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뿐, 예전의 시끌벅적했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어졌고, 상인들은 30여년 전의 르네상스 황금기라고 불러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던 그때의 동문시장의 풍경과 소리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시장 상인들이 관광객만 바라보고 있다고 오해하면 절대 안 된다. 상인분들은 예전처럼 늘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제주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른 아침 동문시장으로 가 보자. 관광객은 거의 없고 오히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장을 보고 있는 모습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단골집도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기름집 앞에 가면 제주의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동백기름을 뽑기 위해 동백씨앗 한아름 안고 들어오시는 분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시장 안의 한 뜨개방에서는 엉덩이 붙일 공간도 부족할 정도로 많은 분이 도란도란 모여 뜨개질을 하고 있다(지금은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 규칙을 준수하며 앉아 계시지만).
신부상 위에 올릴 꽃닭을 진열대에 즐비하게 늘어놓고 안쪽에서 부지런히 꽃닭을 만드셨던 할머니는 편찮으셔서 더이상 가게에 나오지 않으시지만 대신 아드님이 그 자리를 2대째 지키고 있다. 할망 좌판에서는 그래도 아직 우리집 우영팟을 통째로 들고 자리를 지키시는 어르신도 있다. 동문시장 내 오래된 칼국수 가게에서는 늘 경쾌한 마인드로 즉석에서 메밀칼국수 면을 뽑고 계시는 장인도 계신다. 저녁때면 퇴근 후 집에 가기 전 시장을 들러 찬거리를 급하게 찬거리를 구매하는 분들은 흔한 풍경이다.
30년 넘게 한복을 만들고 계시는 어르신도 작업을 위해 침침한 눈을 비비며 돋보기를 고쳐 쓰신다. 주식회사동문시장 내부를 걷다 보면 이가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문을 닫은 점포 때문에 뭔가 모를 공허함이 느껴지고 동시에 활기찼던 시장의 모습이 희미하게 오버랩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주인의 삶의 흔적을 쏠쏠하게 찾아낼 수 있다.
이른 아침의 동문시장은 여전히 제주 사람들의 동네의 정겨운 시장이다. 점심시간 즈음부터는 관광객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고 야시장이 열리면 관광객들로 불야성을 이루지만, 야시장 폐점 후 몇 시간 후면 다시 제주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제주의 새벽을 연다.
같은 공간에서 보이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모습을 꼼꼼하게 살펴보니, 우리가 사랑한 동문시장이 사람들이 우려와는 달리 아직 많이 변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명절, 조금 불편하더라도 주위의 재래시장으로 가 보는 것은 어떨까? 재래시장이 발 디딜틈도 없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그 시절 꼬마가 된 것처럼 어머니 손을 잡고 동문시장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장 곳곳에 나만의 추억과 그리움을 하나둘씩 꺼내 자녀들이나 주위사람과 함께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이 이야기들만으로도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명절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제주의 소리> "제주댁, 정지에書" 에 연재되는 글과 일러스트입니다.
@jeju_cookinglife
오늘도 제주댁 : 제주 음식을 공부하는 제주토박이 워킹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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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이로 : 제주도 작은 마을 작은 공방에서 그리고 쓰는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