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들이 끓여 준 콩국이 그땐 너무 질렸었지,
연말연초 지긋지긋할 정도로 내린 눈은 제주를 하얀 설원으로 만들었다.
몇 일 동안 제주 사람들의 일상은 눈으로 인해 멈춰지고 연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제주에서 언제 이렇게 많은 눈을 마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펑펑 내리는 하얀 눈을 창밖으로 바라보니 괜시리 반갑고 설레이는 감정이 들기도 했다.
해야 할 많은 일들이 눈으로 인해 멈춰진 정적인 겨울의 찰나의 시간, 집 밖으로 잠깐 나와 발목까지 쌓인 눈을 밟으며 발 아래를 쳐다보니 몽글몽글 하얗게 뭉쳐있는 눈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 맞은편으로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아이고 춥다. 집에 강 콩국이나 끓여사켜.”
제주의 중ㆍ장년층이라면 겨울에 콩국을 질리도록 먹었었다고 손사레를 칠 분들이 꽤 있다. 지인 중에서도 어렸을 적 할머니가 겨울만 되면 일주일에 4~5일은 콩국을 끓여주셔서 먹었던 것이 너무 지겨워 어른이 된 후에는 한동안 콩국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니 그 콩국이 어찌나 그립고 생각이 나던지 친정엄마에게 콩국 끓이는 방법을 배워서 가끔 그 콩국을 끓여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육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콩국은 여름철 차게 해서 먹는 여름별미인데 제주에서는 왜 콩국은 겨울 음식이라고 할까?
일단 제주 콩국은 육지 콩국과는 그 모양과 조리법이 다르다.
육지의 콩국은 콩을 불린 후 삶아 곱게 갈아내서 만드는 방법이 기본이다. 여기에 얼음을 띄워 시원하게 먹는데 우뭇가사리로 만든 우무묵이나 면, 야채 따위를 넣어 여름철 시원하게 먹는다. 대구에서는 찹쌀튀김을 넣어 적셔 중국식으로 따뜻하게 먹기도 한다.
제주 사람들은 가을철 콩 수확이 끝나면 콩 원물 그대로와 콩가루로 만들어 두는 비율을 고려하여 분류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가루는 콩을 볶지 않고 원물 그대로 제분한 날콩가루이다.
제주 사람들이 초여름 보리를 수확해서 개역을 장만할때는 보리를 볶은 후 제분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이렇게 용도에 따라 나누면 각각 쓰임새도 다르다. 콩 원물 자체로는 주로 일년 동안 먹을 된장을 담근다. 제주의 된장은 몇 년씩 묵히는 육지의 된장과는 다르다. 보통 다음 해 콩 수확 후 된장을 담근 후 그 된장이 숙성되어 먹기 직전까지, 즉 일년 동안 먹을 된장만 담그는 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는 김치도 그러한데, 제주사람들은 김치도 일년 동안 먹을 김치를 한번에 담그지 않고 사시사철 나는 제철식재료로 김치를 만들어 금방 소비해버린다. 즉 겨울을 맞이하여 육지부에서 몇백 포기씩 담가 준비하는 육지의 김장문화가 제주에는 낯설다. 제주의 음식은 몇 년동안 묵혀 먹는 음식이 없다. 그리고 남은 또 여분의 콩은 집에 중요한 일(결혼, 장례 등)이 있을 때 쓰일지 모를 마른둠비(마른두부)를 만들기 위해 보관해 두기도 한다.
가을철 수확한 콩으로 만든 날콩가루는 바로 지금, 겨울에 빛을 발한다.
몽글몽글 콩가루들이 뭉쳐있는 뜨끈한 콩국 한그릇에 얼어붙은 몸과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펴진다. 육지의 콩국이 불려 삶은 콩을 곱게 갈아 만든 콩국이라면 제주의 콩국은 숟가락으로 떠서 먹어야 하는 국이다. 육지 사람들이 보면 마치 비지찌개같아 보인다. 하지만 김치도, 돼지고기도 들어가 있지 않아 허여멀건한 제주의 콩국이 영 낯설어 보인다. 그런데 또 비지의 식감과 향과는 완연히 다르다. 비지의 식감보다는 조금 더 단단한 느낌이고 그 맛과 향도 훨씬 구수하고 담백하다. 잘 끓여낸 콩국은 절대 비리지 않다.
작년 한 어르신께 콩국을 끓여 드릴 일이 있었다. 콩국을 드시면서 그 어른신이 하시는 말이 무척 재밌어 기억에 남았다.
“옛날에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시어멍(시어머니)이 뭘 가장 먼저 시켜봤는지 알아? 콩국 먼저 끓여보라고 해나서(했었어). 친정어멍(친저엄마)한테 콩국 지대로(제대로) 끓이는거 배워신지 안배워신지가 중요해났거든. 콩국 부끄면 아이고 자이 콩국도 지대로 못배웡와쪄. 이래났주게(이랬지).”
제주의 콩국은 날콩가루로 만든다. 필요한 부재료는 무와 배추만 있으면 된다.
다시물에 무를 넣고 끓이다가 날콩가루를 물에 되직하게 개어 그대로 훌훌 육수에 넣는다. 날콩가루가 육수에 들어간 순간 부터 절대 콩국을 저으면 안된다. 그리고 콩가루가 물에 들어간 순간부터 불조절이 관건인데 너무 센불에서 끓이면 한순간에 콩국이 넘쳐버린다. 그렇다고 너무 약한불에서도 오래 끓이면 비린맛이 강하게 남는다.
어른들이 말하는, 가장 어렵다는 적당히 중간약불로 은근하게 끓여내야 한다. 물에 갠 콩가루를 넣고 국이 끓으면 약한불에서 불조절을 하면서 손으로 툭툭 뜯어낸 배추를 콩국 위로 살포시 얹는다. 배추를 빨리 익히기 위해 그 배추를 국자로 일부러 눌러서는 절대 안된다. 뜨거운 콩국에 저절로 배추가 숨이 죽어 서서히 콩국 안으로 들어갈 때 까지 절대 건들면 안되는 까다로움을 가지고 있는 국이다.
배추들이 아래로 들어가고 콩가루들이 국 제일 위로 떠오르며 막을 형성한다. 그러면 중간중간 육수가 끓어 넘치려고 구멍을 만들어 내는데 여기에 천일염을 넣어주면서 간을 한다. 천일염이 들어가는 순간 콩가루들이 비지처럼 엉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콩들이 끓어 넘치지 않게 불 조절을 해 줘야 하는 것이 제주콩국의 조리법이다.
이렇게 꽤 오랜시간 콩국을 끓이다 보면 처음 그 날콩가루의 비릿함은 사라지고 구수한 콩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이 구수한 냄새가 퍼질때까지 절대 저으면 안된다. 저으면 날콩가루가 절대 엉기지 않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콩국은 푹 익혀져 흐물거리는 무와 배추와 그 식감이 너무 잘 맞고 부드럽고 따뜻한 한그릇이 된다. 콩의 고소함과 겨울무와 배추의 달큰함이 잘 어울린다. 바로 끓여서 먹어도 맛있지만 겨울철에는 하루 뒀다가 먹는 것도 더 맛이 들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그리고 나름 제주에서는 만들이 쉽지 않은 제주음식 중 하나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불 앞에 서서 콩국이 끓어 넘치지 않게 계속 지켜보고 불조절을 해야 해서 그렇다. 콩국이 끓어 넘치는 것을 제주사람들은 “부끄다”라고 말하는데 “콩국 부끄지 않게 불 앞에 잘 이서야 한다”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꽤 까다롭기도 하지만 제주의 콩국은 겨울철 제주사람들의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음식으로 중요하기도 했다. 제주의 보리개역이 여름을 준비하는 가루라면 제주의 날콩가루는 겨울을 준비하는 가루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겨울음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계절 내내 먹어도 무방하다.
나의 친정엄마는 여름철에 콩국을 별미로 끓여 드시는데, 냉장고에 차게 두고 더운 여름날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콩국에 뜨거운 밥을 한 공기 넣고 만 다음에 여기에 시어버린 김치를 올려서 먹으면 또 그 맛이 기막히댄다.
육지에서는 며느리가 시집오면 시댁에서 깨를 볶아보라고 한다고 한다. 생깨를 일어서 돌과 분순물을 제거하고 그 깨를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오랜 시간 불조절을 하며 볶아야 한다. 음식의 가장 기본인 깨를 볶는 것부터 잘 배워왔는지 확인하는 일종의 첫 의례(?)가 육지의 방식이라면 제주는 콩국이 이 깨볶기와 견줄만 하다. 그만큼 콩국이 제주에서는 불 앞에 붙어서 꽤 오랫동안 만들어야 하는 불조절이 어려운 까다로운 음식인 편이다.
물론 비교적 간단하고 짧은 조리시간을 보여주는 제주음식 중에서는 음식을 만드는 시간이 꽤 길고 섬세하게 조리해야 해서 생각보다 쉬운 음식은 아니다. 콩국 끓여본 어머님들 중에서 콩국 한번 부끄지 않아 본 어머님들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다들 어렸을 적 질리도록 먹은 기억이 있는 콩국을 지금의 제주 아이들은 얼마나 먹어 보았을까?
(여기서 부끄다는 끓어 넘치다라는 뜻으로 제주에서 쓰인다.)
날콩가루와 무, 배추만 있으면 할머니가 끓여주신 콩국 한그릇이 완성된다. 불 앞에서 가만히 콩국이 익어가는 과정을 집중해서 보다보면 몽글몽글 뭉쳐지는 콩가루들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 지곤 한다. 할머니의 맛을 콩국에서 찾는 제주 사람들. 추운 겨울 따뜻한 콩국 한그릇 하고 싶은 겨울이다.
이 글은 <제주의 소리> "제주댁, 정지에書" 에 연재되는 글과 일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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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주댁 : 제주 음식을 공부하는 제주토박이 워킹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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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이로 : 제주도 작은 마을 작은 공방에서 그리고 쓰는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