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선면 가시리 출신 안일수 어르신(1955년생)의 메밀이야기
“아이고 고생햄쪄, 시장 막 홍보하젠 하난.”
이 말과 함께 냉장고에서 꺼낸 검정 봉지가 내 손에 들려졌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건네고 두 손을 내밀어 넙죽 받은 봉지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빨리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시장에서 종종거리던 걸음은 시장을 나와 이내 뜀박질로 변했다. 지난번 어르신에게 한 번 호되게 욕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던 나는 무심한 듯 툭, 건넨 어르신의 그 검정봉지가 너무 반갑기도 했고 그 봉지 속 정체가 너무 궁금하기도 했다.
메밀범벅!!!
봉지 속 정체는 바로 큼지막한 고구마가 콕콕 박혀있는 메밀범벅이었다.
나에게 메밀범벅은 제주에서 점점 사라져간 음식이자, 2000년대 이후 거의 볼 수 없는 음식, 그래서 지금의 어르신 세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게 될 옛 일상식이라 생각했다. 나 역시 5년 전 신풍리의 한 어르신께서 주신 범벅을 먹은 것이 태어나서 먹어본 최초의 메밀범벅이었다. 그 범벅의 맛을 기억하기 위해 레시피를 꼼꼼히 기록해두고 가끔 스스로 만들기도 하지만 늘 마음 한편에는 아쉬움이 들었다. 젊은 내가 만든 메밀범벅이 아니라 어르신이 해 준 메밀범벅을 더 먹어보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
그런 나의 바램을 어떻게 아셨는지 67세 안일수 어르신(1955년)의 검정 봉지에는 메밀범벅,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감저범벅이 있었다. 냄비에 고구마를 툭툭 썰어 넣고 물을 붓고 끓여 익힌다. 고구마가 설겅설겅한 식감으로 바뀌면서 익어가면 이때 메밀가루를 풀어 넣고 잘 저어준다. 그러면 메밀범벅이 완성된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단순한 레시피지만 물의 양과 가루의 양을 잘 맞추지 못한다면 너무 질어져 죽처럼 되어버리거나 메밀가루가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딱딱해 질 수 있다. 한 마디로 간단한 재료와 레시피에 비해 그리 만만한 음식이 아니다.
내가 만난 비교적 젊은(?) 어르신인 안일수 사장님은 올해로 24년째 제주의 전통시장에서 꿩메밀국수를 팔고 계신다. 20년 이상 한 자리에서 장사를 하셨으니 동문시장의 터줏대감 중 한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97년 같은 자리에 있던 꿩메밀국수집을 인수하셨을 당시, 이 식당은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운영하고 계셨다고 했다. 주인 할머니가 나이가 많으셔서 가게를 넘기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바통을 이어받으셨다. 젊을 때에는 보험일도 했었고 장사를 하고 싶어서 결혼 전 서문시장 쪽에서 홈패션을 하기는 했었지만 음식업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던 터였다. 꿩과 메밀이라니! 하지만 안일수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르신과 꿩메밀칼국수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인연인 듯하다.
물론 전 주인 할머니에게 꿩메밀칼국수 만드는 법을 전수 받기는 했지만 안일수 어르신 댁에서도 일상적으로 메밀로 만든 음식을 먹었었다고 한다. 어르신은 표선면 가시리에서 12남매 중 7번째 딸로 태어났다. 집에서 밭농사를 워낙 크게 했던터라 매년 메밀, 유채, 콩, 귤, 산듸, 보리 농사를 하느라 학교를 다니면서도 농사일에 손을 보태야 했다.
“우리 동네는 뜬땅이라서 보리 농사는 잘 안되었어. 오히려 메밀농사가 잘 되었지”
어르신이 이야기하는 뜬땅이라 함은 푸석푸석하고 물을 잘 머금지 못하는 땅을 의미한다. 그래서 같은 양의 보리를 파종해도 서쪽이나 서남쪽 지역에 비해 수확이 덜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메밀은 농사가 잘 되어서였을까? 어르신의 어렸을 적 기억에는 메밀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았다.
메밀을 수확하면 동네 여인들과 할머니들이 안일수 어르신의 집에 와서 도리깨질을 했다. 그럼 메밀쌀이 얻어진다. 어른들은 그 메밀쌀을 들고 맷돌방으로 들어갔다. 어르신 집의 맷돌방에는 고레(맷돌)가 3개가 있었는데 “쌀방”이라고 불렀단다. 여럿이 모여 옹기종기 그 방에 앉아 고레를 돌려 메밀가루를 얻었었다. 메밀쌀을 갈고 나서는 체에 내리는데 체 아래 내려간 고운 가루는 주로 떡이나 묵을 하는 데 사용했다. 체 위에 남은 것들을 통상 느쟁이(는쟁이)라고 불렀는데 이 느쟁이가루는 조밥 지을 때 위에 솔솔 뿌려 넣어 밥을 지으면 그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한다.
“옛날 우리 밥 지을 때 말이지 모인조(메조) 위에 메밀느쟁이 놓고 밥 지으면 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
조팝(조밥) 위에 살포시 올라간 느쟁이가루를 골고루 섞어 한 그릇 가득 떠서 먹으면 어떤 느낌일까? 고구마조팝만 먹어 본 나는 이제는 쉽게 구하기도 어려운 느쟁이조팝 맛이 너무 궁금했다.
확실히 가시리가 고향인 어르신의 기억에는 제주의 메밀음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어르신이 나에게 알려주신 흥미로운 메밀음식 몇 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먼저 남성들이 포제를 지내거나 여성들이 당에 갈 때 메밀로 돌레떡을 준비했다고 했다. 이 돌레떡은 신에게 바치는 용도로도 사용했지만 상이 나면 돌레떡을 만들어 장지에 가서 사용하거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메밀 특성 상 식으면 금방 딱딱해 지는데 그 딱딱한 돌레떡을 화로에 구워서 먹으면 소금과 설탕을 하나도 넣지 않아도 신기하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사람이 아닌 자를 위해 만드는 떡이라 소금을 넣지 않는다는 정설은 제주 떡에는 거의 반영되는 것 같다. 지금에야 방앗간이나 떡집에서 떡을 주문해서 올리기도 하고 집에서도 어느 정도 간을 해서 떡을 만들지만 어르신의 옛날 기억에는, 특히나 돌레떡에는 소금간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또 메밀만두가 그렇게 별미라고 하셨는데 만두소는 우리가 아는 만두의 소가 아닌 팥을 삶아 넣던가 무를 넣었다고 했다. 아마 다른 지역에서 메밀세미떡이라고 말하는 음식과 같은 음식인 것 같다. 세미떡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시고 메밀만두라고 하는데 아이들에게는 주로 달콤한 팥소가 들어간 메밀만두를, 무가 맛있을 계절에는 무를 넣은 메밀만두도 별미라고 한다.
나는 옛날 우리 제주 사람들은 메밀을 수확한 다음 메밀가루를 장만해두고 고팡이나 정지에 보관하면서 일상식으로 사계절 내내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르신이 말씀해 주신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조금 달랐다. 여름에는 메밀가루가 쉽게 빨개지고 금방 맛이 변해 버려서 메밀가루로 음식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름엔 메밀음식을 많이 해 먹을 일이 없었고 제사에도 메밀묵을 쑤지 않고 두부적을 많이 올렸다고 한다. 여름제사에 메밀을 올릴 때에는 메밀반죽을 동그랗게 지져서 올렸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메밀 맛이 그나마 쉽게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르신의 메밀음식이야기가 흥미로워 메밀이야기를 더 이어갔다.
“사장님, 사장님이 추천해 주는 가장 맛있는 메밀음식은 뭔가요?”
“나? 나는 메밀쌀 죽에 간장 조금 넣고 꿩마농 살짝 올려서 먹으면 그게 제일 맛있어. 먹어봐~ 진짜 맛있어.”
메밀쌀죽은 메밀쌀로 수프정도의 농도로 죽을 쑤어 작은 그릇에 담아 꿩마농과 간장을 살짝 올려 마시듯이 후루룩 넘기는 것이라고 한다. 또, 겨울에 먹는 별미로 메밀쌀을 볶아 뜨거운 물에 넣어 살짝 불려 먹어도 든든하고 맛있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외국의 오트밀을 뜨거운 물에 부어 죽처럼 만들어 식사대용으로 먹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안일수 어르신의 아버지는 마을사람들과 꿩사냥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여섯살 무렵, 저 올레 밖에서 아버지가 꿩사냥을 끝내고 말을 타며 들어오는 그 모습이 기억나는데, 얼마나 늠름하고 멋있어 보였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집으로 분배된 꿩은 잘 저장해두었다가 제사 때 사용해야 했다. 우선 다리와 날개는 소금에 절였다가 대나무 꼬치에 꽂아 통기가 잘 되는 곳에 말려두었다가 제물음식으로 사용했다. 나머지 고기로는 엿도 만들어 먹고 구워도 먹고 메밀을 반죽해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한 가지 독특했던 점은 그 당시 기억에 어머니가 메밀반죽으로 국수를 만든 후 그 반죽을 썰어서 널어 말렸다가 건면 상태로 만든 다음 삶아서 쓰셨다고 한다. 지금 본인이 국수를 만들어 보니 면을 말려서 국수를 해 먹는 것 보다는 바로 먹는 것이 더 맛있는데, 그때 어머니가 왜 그러셨는지 아직도 궁금하다고 한다.
이처럼, 안일수 어르신은 어렸을 적 경험 덕에 자연스럽게 꿩메밀칼국수 식당을 운영하게 되신 것 같다. 초기에는 꿩 샤브샤브도 있었고 탕도 함께 하셨다가 일이 너무 많고 공간도 좁기도 해서 꿩구이와 꿩메밀국수만 하신다. 하지만 여건만 되면 메밀범벅도 내 주고 싶고 빙떡도 선보이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안일수 어르신의 식당에서 꿩메밀국수를 주문하고 가만히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우선, 주문이 들어오면 숙성시켜둔 메밀반죽을 오래된 연식이 느껴지는 밀대로 밀고 민 반죽을 썰어 국수를 만든다. 경쾌한 도마 위 칼질 소리가 끝나면 얼마 되지 않아 꿩메밀국수가 완성되어 식탁에 올라온다. “메밀은 겨드랑이에 끼워도 익는다”라는 제주 사람들의 말처럼 제면 후에 메밀면을 삶아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메밀 100퍼센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툭툭 끊어지는 식감과 꿩육수와 메밀가루가 섞여 폴폴한 느낌의 국물은 속을 풀어주기에 더할 나위 없다.
며칠 전 하루 종일 쫄쫄 굶고 동문시장이 파장할 때 즈음 꿩메밀칼국수 한 그릇이 너무나 먹고 싶어 식당을 찾았다. 오랜 만에 여유 있게 식당 내부를 둘러보니 어르신의 고향인 가시리의 사진과 요즘 제주의 들을 하얗게 물들인 메밀꽃밭의 사진도 눈에 들어왔다. 어르신은 메밀꽃과 고향 사진을 보며 24년간 한 자리에서 국수를 만들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르신은 24년간 식당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스트레스 때문에 괴로웠던 일이 없었다고 하신다. 그래서 어르신의 국수를 먹으면 나도 하루 동안 쌓였던 업무 스트레스가 단 번에 풀리는 것 같다. 천천히 먹으라는 다정한 말씀과 함께 건네주시는 국수 한 그릇에 따뜻한 엄마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이 식당에 올 때면 많게는 90세가 넘어 보이는 어르신부터 적게는 증조할아버지를 따라 온 것 같은 대여섯 살의 꼬마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손님을 볼 수 있다. 그날은 연세가 70이 훌쩍 넘어 보이는 어르신들이 마주보고 앉아 맛있게 국수를 드시고 계셨다. 증조할아버지에서 증손주까지 4대가 넘게 대를 이어 사랑하게 되는 이 슴슴하고 뜨끈하고 구수하고 베지근 한 맛. 꿩메밀칼국수는 마음속까지 따뜻하게 데워주는 제주사람들의 소울푸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