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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제주댁 May 02. 2022

소년 홍우중의 주머니 속 마늘알과 산듸쌀 몇 알

1936년 생 홍우중 할아버지의 제주음식이야기

80대 중반의 할아버지는 눈빛이 또렷하셨고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으며 꼿꼿하게 편 상체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2021년 가을에 만난 86세 할아버지, 홍우중 어르신은 내가 그동안 상상했던 남자 어르신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푸근하고 상냥할 것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상상하고 만나뵈었지만 어르신은 반듯하고 정갈한 아우라를 풍기며 맞이해 주셨다.


그래서 어르신을 처음 뵌 날, 나는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처음에는 어르신의 ‘포스’에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어르신이 꺼낸 이야기 한 구절에 나는 바로 마음을 빼앗겼다.


“나는 마농지(풋마늘대장아찌)를 잘 해. 텃밭에서 마농 해다가 마농지 만들어 여름반찬으로 먹었었지.”

“어르신, 요리도 직접 하세요?”

“그럼 직접 해야지. 우리 어렸을 때에는 마늘알과 산듸쌀(밭벼)을 주머니에 담아가지고 다니면서 그걸 간식으로 먹었어.”

“그 매운 마늘알을 간식으로 드셨어요?”

나는 상상해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6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0살 즈음 되는 어린 홍우중 소년의 주머니 속에 담겨 있는 마늘알과 거칠게 갈려있는 산듸쌀 몇 알. 그걸 주머니에서 하나씩 꺼내 입으로 쏙 넣고 오물오물 씹으면 그 맛과 향은 어땠을까? 그 간식들을 입에 넣으며 그 꼬마는 어떤 유년기를 보냈을까?


알싸한 마늘과 산듸쌀은 물론 감저(고구마)와 구운 콩도 모두 어르신의 간식이었다. 나는 홍우중 할아버지의 어렸을 적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졌다.1936년생인 홍우중 어르신은 애월면 광령리에서 5남 3녀 중 2남으로 태어나셨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하귀초등학교를 다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광령간이국민학교(초등학교)가 생기자 그곳으로 전학하셨다고 한다. 마을의 초가집을 빌려 만든 간이 학교였지만  동네에서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어 기쁘셨단다. 그런데 곧 4·3으로 인해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산간 마을이었던 광령 사람들은 상당 수 마을을 떠나 해안마을로 피난을 갔는데 그때 어르신도 외도라는 동네를 선택하여 내려오셨단다.


다행히 외도국민학교에서 초등교육은 마쳤으나 학교를 나왔어도 돈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당장 먹을 곡식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공부는 사치였다. 당장에 먹을 문제가 가장 시급했기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은 포기하고 생업, 즉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일은 그 당시에 대부분의 제주 사람들이 그랬던 것 처럼 남의 밭을 빌어서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어르신은 주로 조, 보리, 장콩, 팥, 녹두, 산듸(밭벼), 감저(고구마)농사를 하셨다고 한다.조와 보리는 주로 밥으로 먹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 밥에는 김치나 된장만 있으면 다른 반찬이 따로 필요 없었다. 어르신의 기억에는 마을공동밭이 있었고 그 밭에 조와 보리수확이 끝나는 추석 이후는 쉬는 밭이 된단다. 그럼 마을 사람들이 자기 적시(몫)의 배추나 무의 씨를 뿌리는데, 무나 배추를 기르고 나면 오히려 땅이 좋아져 다음 보리를 심으면 농사가 잘 된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르신이 말씀하신 보리밥에 김치와 된장만 있으면 된다라는 말씀이 쉽게 이해가 되었다. 수확 후 쉬는 땅에 무나 배추를 심으면 다음 보리농사는 더 잘 되고 김치로 해 먹을 수 있는 재료들도 얻을 수 있다. 옛날 어르신들은 콩, 그 중에서도 된장을 담그기 위한 장콩은 꼭 재배하였다고 한다. 이런 순환구조를 이해하면 왜 제주의 어르신들이 옛날에 주로 음식이 보리밥에 된장, 김치였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홍우중 어르신의 들려주신 60여 년 전 김치 담그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옛날 배추는 지금이랑 달리 대가 길었다고 한다. 무 역시 단지무였는데 바닷가로 내려가 바닷물을 길어다가 배추를 절였다. 한 2~3일 정도 절이고 바닷물로 씻어 절인배추를 준비한다. 고춧가루는 농사지은 고추를 직접 집에서 찧어 가루로 만들었다. 지금은 고추에 농약을 치는 경우가 많아 고추가 잘 안 떨어지지만 어르신의 옛날 기억에는 고추가 쉬이 잘 떨어져서 곤혹스러운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농약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벌레도 그렇게 잘 먹었다고 한다.


맛있는 고추는 사람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벌레도 좋아한다.

사람이 반 먹고 벌레들이 반 먹으려고 고추농사를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정성들여 키워봤자 고추의 크기가 손가락보다 큰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지금 고추는 너무 질겨서 아무리 씹어도 잘 씹어지지가 않는다며, 옛날 어르신이 드셨던 고추는 맵지만 부드럽게 씹혔다고 한다. 어르신은 지금 고추는 옛날 고추만큼 하지 못하다며 아쉬워하셨다. 바닷물에 절인 배추에 부드러운 고춧가루와 알싸한 마늘만 들어가도 김치는 만들어 졌다. 아마 여기에 틀림없이 멜젓을 넣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주사람들의 김치는 제주의 바다와 우영팟의 기운이 조화롭게 깃든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의 첫 인상은 다소 무섭고 카리스마 있게 느껴졌지만 음식이야기를 나누니 어느샌가 우리 옆집에 있을 법한 정겨운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심지어 하시는 말씀도 낭만적이셨다.

“우리 옛날에는 나록(논벼) 심었었주게. 조금 있다 나록 대가 올라오면 그 나록냄새가 나는거라. 그 밭을 걸어서 지나가다 보면 향긋한 나록냄새가 솔솔 올라와. 그럼 나는 ‘아이고 쿠시롱하다’라고 자연적으로 말이 그렇게 나왔었어.”

몇 달 전 길을 지나가다 무화과향이 진하게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아직 열매도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가 눈앞에 있었다. 그 진한 향기는 열매도 맺히지 않은 나무에 무화과 열매가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상상하게 될 정도로 강렬하고 향긋했다.  “아 맛있겠다.”라며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웃음이 번진적이 있었다.

아마 홍우중 어르신의 기억에도 그렇지 않았을까?

밭 사잇길로 걷다가 만난 나록의 향은 당장 쌀알들이 보이지 않아도 노랗게 익은 벼들과 밥그릇에 가득 담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곤밥(흰쌀밥)을 떠오르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 쿠시롱하다”라는 말이 감탄사처럼 나왔을 것이다.



홍우중 할아버지의 모습. 일러스트=色色



해방과 6·25, 4·3까지 휘몰아치는 격동의 제주를 사신 어르신은 15살에 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은 못한 채 17살에 광양으로 들어왔다. 당시 도남은 전부 논밭이어서 도남(현 제주시 도남동)에서 농사일을 하셨었는데 그 당시에 쥐가 그렇게 많아 아침에 일어나서 밭에 가 보면 쥐들이 쌀을 싹 다 먹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그래서 쥐약도 정말 많이 쳤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쥐들이 많았던 시기에 갑자지 빈대와 바퀴벌레도 같이 들끓었다고 한다. 아마 당시에 제주항으로 외국의 화물선들이 들어오면서 제주에 같이 들어온 것들이 아닐까 짐작하셨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100여년 동안 제주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격변했을까 나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초등학교 때 머리에 이가 있는 친구들이 많아서 촘촘한 빗으로 빗질을 했던 기억, 외가에 가면 화장실에 돼지들이 무서워 화장실을 가지도 못했던 기억, 이제야 마흔이 깃 넘은 나의 기억과 추억을 지금의 10대들은 과연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다양한 세대가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우리 어른들의 이야기와 삶의 깊이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남자나 여자나 농사가 가장 우선이었다는 어르신의 이야기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20대 초반에 결혼을 했지만 어르신은 결혼에도 당연히 돈이 필요하니, 돈을 벌기 위해 21살에 군에 지원하여 직업군인이 되셨다는 어르신의 이야기는 또 다른 울림을 주었다.


문득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 보았다. 내 주머니에는 4살 아들에게 줄 간식인 쌀과자와 보리과즐이 들어있었다. 일하는 워킹맘에게 따뜻하게 차려진 밥상은 차려서 먹는다는 것은 사실 사치일 때가 많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쌀과자를 뜯어 입에 넣어 오물오물거렸다. 탄수화물이 몸으로 들어오니 머리회전이 되기 시작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이 한 명 있었다.

홍우중 어르신이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첫 인상은 중도를 지키는 멋쟁이 노신사의 인상으로 바뀌어져 있었고 엄격해 보이는 몸가짐에는 85년 넘게 살아온 어르신의 인생에 대한 강인한 마음가짐이 엿보였다. 나는 어르신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다음 회에는 이야기는 군 제대 후 일본에 돈을 벌러 가신 홍우중 어르신의 이야기를 담을 계획이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숱하게 들었던 돈 벌러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간 제주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정착한 제주사람들의 밥상이야기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특별하게 보이지만 그 시대 제주에 살고 있는 여느 사람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제주사람들의 이야기. 즉 특별하지만 평범한 제주 사람의 이야기가 김우중 어르신의 입을 통해 이어진다. 





이 글은 제주의소리에 필자가 제주의 소리에 연재하고 있는 제주댁, 정지에書에서 연재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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