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우중할아버지의 삶의 이야기와 제주음식
“이디 왕 사 갑서(여기 와서 사세요).”
오사카의 쓰루하시 시장에서 낮익은 소리가 들린다.
30대 후반의 홍우중은 제주가 아닌 오사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르신은 15살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17세에 제주시 광양으로 자리를 옮겨 여관 등에서 일을 하거나, 남의 밭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에 직업군인의 길을 택해 21살에 해병대에 입대 하셨다. 처음으로 제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어르신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부대에서는 위생병 보직을 배정 받았는데 약품이 모조리 영어로 표기돼 있어서 약품을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차라리 약품이 한자로 표기돼 있었으면 관리하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을, 난생 처음 보는 영문을 외우고 관리하려니 다른 동료보다 진급이 쉽지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라도 영어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홍우중 어르신이 부대 내에서 막다른 책임감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르신이 29살이 되던 해에 휴가를 받아 제주에 내려왔는데 참한 여인이 있다고 소개를 받아 그해 12월 30일 결혼을 하게 되었다. 혼인 후에는 부인과 함께 진해, 포항, 서울, 김포 등을 다니며 군복무를 이어가셨고 중사로 제대하셨다. 그리고 37세에 제주로 다시 내려왔다. 15년 만이었다.
어르신은 제대 후 귀향하여 제주시 광양 쪽에서 점빵(상점)을 차리셨다. 워낙 깔끔하고 정갈한 성품이시라 어르신이 가지고 온 채소나 생선, 공산품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어르신이 맛있게 만든다고 하셨던 마농지도 그 당시에 찾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제 조금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겠다고 안심하던 찰나, 보성시장이 개장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72년 개장한 보성시장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거렸다. 그렇게 홍우중 어르신은 상점을 접으셔야 했다.
정신차리고 돌아보니 5살, 3살, 1살 된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 있었다. 당장 아이들이 먹을거리부터 신경써야 했다. 어르신은 지체하지 않고 육촌형이 있는 일본에 가기로 결심 하셨단다. 그렇게 식솔들을 제주에 남겨둔 채 밀항선에 몸을 실어 다시 홀로 제주땅을 떠나셨다. 도착한 곳은 바로 오사카였다.
어르신이 일본으로 가게 된 이유는 육촌형이 있기도 했지만 64년 도쿄올림픽 이후에 일본이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도 있었다. 제주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는 일본에 가서 돈을 버는 것이 훨씬 낫다는 판단에 지체없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당당하게 비자를 받아서 간 것이 아닌 밀항자 신분으로 일본에 갔기 때문에 늘 조심스러웠고 두려웠었다. 그래도 육촌형이 운영하는 플라스틱생산 공장에서 가족들을 생각하며 일을 하셨다고 한다.
“공장에서는 저녁 8시부터 아침 9시까지 일했습니다. 잠은 공장 2층에서 잤고요. 그렇게 밤에 일한 이유는 공장이 밤에 돌아가서가 아니고 새벽에 일해야 낮에 일한 것보다 돈을 훨씬 많이 줬기 때문이지요.”
오사카에서 24시간 동안 풀가동을 하고 있는 공장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한국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는 공장이라고 했다.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은 독하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고 했다. 일본에 사는 제주사람들은 어찌나 부지런한지 낮에도 밤에도 쉬지 않고 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이 쓸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홍우중 어르신도 같은 이유 때문에 쉴 수 없었다. 아침 작업이 끝나면 보통 10시에 밥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 잠을 청했고 4시 반에 일어나서 다시 일을 할 준비를 하셨다. 그런 일본생활이 고단하고 외로웠을텐데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바로 제주에 있는 가족들을 두고 나 혼자 일본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며, 앞서 말한 것처럼 야간작업이 주간작업보다 월급을 2배는 더 줬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쓰는 순간은 너무 슬퍼 눈물도 나고 그리움이 사무쳐 가슴이 아려왔지만 그런 감정이 편지에 묻어나면 아내 분이 속상해 할까봐 편지는 최대한 담백하게 쓰셨다고 한다.
“애들 잘 키우고 있고 내가 돌아갈 때까지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 달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꼭 돈 많이 벌고 들어갈 테니까 아버지가 돌아갈 때까지 엄마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으라는 내용의 편지를 많이 보냈습니다.”
어르신의 일본생활은 고단하다면 고단하고 외롭다면 외로운 생활이었지만 그나마 육촌형이 운영하는 공장이라 상황이 조금 나았다고 한다. 다행히 삼시세끼는 모두 공장에서 해결했고 쉬는 날이면 육촌형과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셨다. 당시 어르신의 한 달 월급이 약 10만엔 정도 되었는데 이 중에서 만엔을 제외한 금액을 모두 제주로 보냈다. 제주은행을 통해 제주로 보내거나 일본과 제주를 자주 왔다갔다 하는 지인을 통해 매월 그렇게 생활비를 보내셨다
일본에서 어르신이 만든 음식은 제주에서 먹은 음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육촌형 내외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함께 명절과 제사도 지냈다. 기억에 남는 제사음식은 생선을 요리하고 머리와 가시는 따로 발라내어 미역국을 끓인 것이라고 하셨다. 어르신이 만든 마농지와 김치는 조카들도 맛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농지와 김치 만드는 방법을 조카들에게 가르쳐주고 올 정도라고 하니 어르신이 담근 마농지는 과연 어떤 맛일지 궁금해졌다.
쉬는 날에는 쓰루하시 시장을 자주 갔었다고 한다. 일본이지만 한국의 정서를 많이 느낄 수 있어 향수병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었고 빙떡도 만나 볼 수 있어 마치 제주에 다녀온 느낌도 든다고 하셨다. 자주갔던 국밥집에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 줄 수 있는 따뜻한 국밥을 내어주었다.
“여기 왕 상갑서.”
쓰루하시 시장에서 곳곳에서 들리는 익숙하고 친근한 제주 사투리는 홍우중 어르신이 10년 동안 일본에서 홀로 생활할 수 있었던 큰 위안이 되었다.
비록 밀항자로 일본에 들어왔지만 평소 성격과 군복무로 다져진 체력으로 어르신은 일본에서도 허투루 생활하지 않으셨다. 공장에서 아침 작업까지 끝내고 퇴근을 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늘 마을 골목 청소를 깨끗하게 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라 평소 어르신의 생활습관이었다.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이 저 청년이 왜 저러냐 싶은 눈초리로 보았지만 10년 동안 한결같았던 어르신의 일본생활은 일본사람들의 마음도 변화시켰다. 비록 대판현만 다닐 수 있는 비자지만 어르신이 제주에 돌아올 때는 밀항이 아닌 당당하게 비자를 보여주고 들어올 수 있는 비자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어르신이 47세가 되던 해 8월, 어르신의 일본생활은 끝이났다.
어르신은 제주에 돌아와 광양초등학교 근처에 쌀집을 하나 여셨다. 20여 년 동안 쌀집을 하셨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물론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벌이는 되었지만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가 보면 집의 아이들이 굶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럼 어르신은 쌀집으로 돌아가 되려 쌀을 챙겨가 아이들 밥 좀 해주라고 주고 오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고 한다. 본인이 어렸을 때부터 먹을 것이 없어 그렇게 힘들고 고생했던 순간이 떠올라 밥을 못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쌀을 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르신이 내가 만난 제주의 80세 이상 남자 어르신 중에 가장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는 어르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마음 천천히 마음 잡고 가면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립니다. 내 마음의 심정을 알아주며 살아야 합니다. 정직하고 착하게 생을 살다보면 마지막 생이 다가오더라도 마음은 편안하고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어르신의 말씀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는 나의 마음과 심정을 얼마나 알아차리고 내 스스로에게 칭찬과 감사, 격려와 안부를 물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내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우중 어르신과 마주하고 들은 어르신의 87년 인생 이야기는 앞으로 살아갈 나의 삶에 묵직한 지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