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호미, 커서는 재봉틀, 칠순에 펜 잡은 인생사
드르륵.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 왔어요.”
한림의 한 한복집. 문을 연 순간,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한 폭의 액자였다. 마치 카메라로 담은 듯 그린 한 장의 그림은 생동감이 넘실거려 내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나는 단번에 그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차조!
고개를 돌려 한복집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한복집인지 갤러리인지 모를 정도로 형형색색의 다양한 그림과 글이 걸려있었다. 그렇다. 내가 찾아온 곳은 70세 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12년차 예술가 신희자 어르신의 작업장이었다. 그림 수준이 너무 훌륭해서 나는 신희자 어르신이 일흔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1940년생인 어르신은 70세부터 한수풀도서관 프로그램을 통해 수채화를 접했다. 65년 동안 재봉틀을 잡았던 어르신의 외길인생에 “예술가”로서의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대림리에서 4남4녀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난 신희자 어르신은 부모님께서 방앳 공장(방앗간)과 솜 태우는 공장(솜틀집)을 운영하셨다. 덕분에 꼬마 신희자는 집에서 쌀 빻는 구수한 냄새를 포함해 온갖 곡식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방앗간에서 쌀을 빻는다고 하면 보통의 사람들은 ‘멥쌀’을 떠올리겠지만 어르신을 비롯한 제주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말하는 ‘쌀’의 의미는 육지의 ‘쌀’의 의미와는 달랐다.
“보리쌀을 물에 적신 후 바구니에 둬, 그 보리쌀을 기계에 올리고 다섯 번 쯤 내려야 곱고 예쁜 쌀이 나왔어. 산듸쌀(밭벼) 기계는 또 보리쌀을 가는 기계랑은 달라. 즉, 산듸쌀 기계가 따로 있었는데 산듸는 세네 번 쯤 올리면 곤쌀이 나오지. 조는 오히려 쉬워. 조는 두 번이면 쌀이 나와. 그 쌀 냄새가 어찌나 향긋한지, 매일 기계가 돌아가면 뭘 먹지 않아도 기분이 좋았던 옛날이 생각이 나.”
어르신은 방앳 공장뿐 아니라 솜 태우는 공장에 대한 기억도 뚜렷하셨다. 1652.8㎡(500평) 남짓한 공간에 방앳 공장과 솜 공장이 마주보고 자리 잡고 있었고 동네는 물론 서귀포에서 까지 사람들이 솜을 태우러 왔었다고 한다. 당시 어르신의 기억엔 어르신의 아버지가 제주에서는 최초로 일본에서 솜 태우는 기계를 가지고 오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버스도 없었을 시절이라 서귀포 사람들이 며칠 씩 걸어서 솜을 태우러 어르신 집으로 왔었다고 한다. 어르신은 그렇게 집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며칠 걸려 왔는지 물어봤는데 5일을 걸어서 왔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솜을 태우러 오면 자기 순서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몰려들 때면 최대 3일 정도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때문에 본인이 먹을 음식과 땔감을 싸 와서 숙식을 하며 기다렸다고 한다. 집 난간에도 자고 부엌에도 자고, 마당에서도 기다리고, 그렇게 온 집안이 솜을 태우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 사람들이 해 먹는 음식 냄새가 집 안팎에 가득 찼다고 한다. 그런 풍경을 보며 신희자 어르신은 자랐다.
82세인 신희자 어르신 세대는 집집마다 목화는 꼭 키웠단다. 목화를 키워 목화씨를 빼 이고 지고 솜 공장으로 가지고 왔다. 솜을 태우면 솜이 불어난다. 그 불어난 솜으로 이불도 만들고 방석도 만들었다. 태운 솜을 가지고 돌아가 집에서 물레를 이용해 실을 만들었다. 그 실은 제주 할망들이 말하는 미녕(무명), 즉 면을 만드는 데 이용하였다. 쌀과 미녕은 제주의 살림살이에 꼭 필요한 것 중 하나였기 때문에 어르신의 집에는 쌀을 갈러 오는 사람과 솜을 태우러 오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유복하고 형제자매들도 우애가 좋았던 집이었지만 4.3사건으로 인해 어르신은 아버지를 잃으셨다.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기 때문일까?
산사람들에게 곡식을 주며 도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돌았고 아버지는 바로 체포된 후 사살되었다고 한다. 어르신이 7살 때 일이었다. 그렇게 어르신의 어머니는 홀어머니가 되어 팔남매를 키우셔야 했다고 한다.
신희자 어르신은 유독 어머니 곁에서 일을 많이 도왔다. 식구가 많았기 때문에 장독이나 물항도 여러 개 였는데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어머니가 신희자 어르신을 깨웠다. 어머니가 살살 흔들어 깨우면 어르신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머니와 물허벅을 지고 달을 보며 용천수가 솟는 곳까지 한참을 걸어가 허벅에 물을 길어왔다. 그렇게 세 번 물허벅을 길어 오면 그제야 날이 밝아왔다. 매일매일 어두운 새벽, 어머니와 신희자 어르신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 밭일을 갈 때에도 꼭 어르신을 데리고 갔었다. 심지어 검질(김) 매러 가는 일도 신희자 어르신과 함께했다. 어느 순간에는 다른 자식들도 아닌 유독 본인만 데리고 가는 것이 불만스러워서 발을 쾅쾅거리며 가보기도 했단다. 그럴 때 마다 어머니는 신희자 어르신의 손을 꼭 잡아주며 나지막이 노래를 불러주셨다 한다. 그러면 금세 마음이 풀려 엄마 손을 잡고 같이 검질을 매러 갔다.
그렇게 홀어머니는 큰오빠를 서울대학교에 보냈고 큰언니는 곽지로 시집을 보냈다. 셋언니(둘째 언니)는 육지 방직공장으로, 셋오빠(둘째 오빠)는 오현고등학교를 나와 공장을 운영했다. 말젯오빠(셋째 오빠)는 농고(지금의 제주고등학교)까지 진학시키셨다. 다음 차례인 신희자 어르신은 내심 기대했다. 학교로 진학해서 조금 더 공부를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너는 내가 못 보내겠다. 내가 희자를 많이 의지해서 어디 보내지 못할 것 같다.”
그때가 큰오빠가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중 납북되면서 실종되었고 공장을 운영하던 셋오빠(둘째 오빠)도 폐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던 시기이었다. 그래서인지 하나둘 출가하는 아이들 중 유독 가장 많이 의지했던 어르신을 차마 보낼 수가 없었는지, 신희자 어르신만큼은 15살까지 곁에 두셨다고 한다.
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서 골목 저 끝에서 등교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쏙 보고 오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렇게 어머니 곁을 지켰던 신희자 어르신이 16살이 되던 해, 솜 공장을 하던 기억의 끈을 이어 제주시에서 양재를 배웠고 드디어 17세에 어르신에게도 첫 유학의 길이 열렸다. 1956년 한국 패션의 거장인 “노라노 양재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15년 동안 가족과 단 한 번도 떨어져있어 본 적 없는 어르신에게 낯선 서울행이 두렵지 않으시냐고 물어봤더니 어르신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이야기 하셨다.
“아니, 서울 가기 전날, 날개 돋았지 뭐.”
서울에 언니가 살고 있어서 엄마가 보내주는 좁쌀과 보리쌀을 몇 포대 씩 이고지고 배타고 기차타고 버스 타며 도착한 서울역의 풍경은 제주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서울역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모습에 놀랐고 남대문 시장은 제주의 시장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복잡했다. 마치 별천지 같았다. 언니 오빠들을 보며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유학길에 너무 행복한 10대 소녀 신희자는 부푼 마음으로 학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주에서 이미 배워 미싱·재단 다 할 줄 아는데 처음부터 바로 시켜주지 않고 실밥 다듬는 것으로 노라노 양재학원의 수업은 시작되었다. 처음 며칠은 마냥 신나고 행복하기만 했는데 점점 눈에 어머니가 방앗간으로 부리나케 뛰어가는 아른거려서 눈에 눈물이 자꾸 맺혀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야 했단다. 당장 내려가서 방앗간 일을 도와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곳이라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며 그리움을 달랬다.
당시 양재를 배우고 대구 삼호방직에 취직한 사람들이 많아 신희자 어르신은 곧바로 대구로 내려갔다. 삼호방직 앞 한 양장점에 취직하며 대구에서 바느질을 마스터 했다. 주위에서 양장점 차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서 다시 재단까지 배웠다. 치열하게 살면서도 대구에서 일을 하며 야간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솜 태우는 공장 딸은 그렇게 그 당시 패션계의 거장 노라노양재학원을 시작해 섬유의 지역인 대구에서 옷 만드는 기술과 노하우를 터득했다.
타지에서 공부하며 힘들게 일하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오빠가 고생하지 말고 제주에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온 시기가 22살, 5년 동안의 타지생활은 신희자 어르신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 준 원동력이 되었다.
22살에 한림으로 돌아온 어르신은 양장점을 차렸다. 당시 나이롱(나일론)으로 블라우스를 만들었을 때 제주 사람들은 어르신의 옷에 열광했다. 비단처럼 곱고 광택이 예쁘게 자리 잡은 어르신의 블라우스는 당시 제주 여성들의 눈에도 고왔다. 그래서 어르신에게 양재를 배우려고 찾아오는 분들도 많았다고 한다. 대구까지 가서 나이롱을 가지고 와야 했기 때문에 제주에서 배를 타고 목포까지 간 후 대구로 가야했다. 지금처럼 크고 쾌적한 배가 있을 때가 아니라서 멀미와 구토는 늘 고생스러웠지만 옷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가벼웠다고 하셨다.
그렇게 신희자의 “나이롱 블라우스”덕분에 양장점은 늘 바빴다.
하지만 양장이 늘 잘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간에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제품’, 즉 기성복들이 나와서 양장점은 잠시 주춤했었다. 결혼하고 4남1녀가 있었던 상황이라 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7년 동안 보험 회사에도 다녔었다. 남의 보리밭에서 일도 했었다. 10일째 밭에 가는 날 손을 보니 손이 자꾸 베여 피투성이였다. 내 밭이면 대충 할 텐데 성격상 남의 밭이라 대충할 수 없었다. 손이 금세 상하겠다 싶어 바로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때가 어르신이 49세, 막내딸이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일본에서는 호텔 청소도 했고 새우 까는 단순 작업도 했다. 그렇게 7달 겨우 일하다가 아들이 밖으로만 다닌다는 말에 다시 제주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들을 먹이고 살리려면 뭐든지 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돌아와서는 다시 옷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자석처럼 끌리듯이 여성회관에서 한복을 배웠다. 다행히도 당시에 한복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특히 결혼식 할 때는 신랑 신부, 가족들이 한복을 두 벌씩 맞추던 시대라 한복을 만들며 아이들을 키웠다. 여기에 교복까지 작업이 들어오게 되면서 어르신은 한림에서 옷을 만들며 고향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었다.
10대 청춘부터 60후반까지, 옷을 만드는 일은 행복한 일이었지만 몇 십 년 째 같은 작업실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일들은 세상과 단절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옷을 매만질 때 늘 틀어놓는 라디오는 어르신에게 위안을 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오후 2시, 어김없이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다 용기를 내어 청취자와 함께 하는 3행시 코너에 응모를 해 보았다. 그리고 1등상을 받게 되었다. 그때가 어르신 나이가 곧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아, 50년 넘게 옷만 만져온 나도, 지금 다른 무언가를 시작해도 하면 되겠구나.”
어르신의 심장은 다시 10대 후반, 노라노양재학원을 가기 전날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르신은 70에 재봉틀이 아닌 펜과 붓을 잡기 시작하였다. 신희자 어르신이 붓 끝에서 표현되는 그림들은 나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40대로 접어들며 용기는커녕 점점 안정적인 일에 안주하고 싶고 새로운 일을 맞닥뜨렸을 때 두려움에 망설일 때가 많았던 나에게, 70세에 펼쳐진 신희자 어르신의 인생 3막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1등을 거머쥔 삼행시는 70이 된 신희자 어르신의 인생3막이 펼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 무사 골프장은 몇 개씩이나 햄신고
수 수질오염이 지금도 되엄신디
천 천주님이 노할까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