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생 김임생어르신(서귀포시 신양리)의 물질인생 이야기
“나? 13살부터 해녀질하기 시작했으니까 게메. 몇 년 해샤?.”
1942년 김임생 어르신의 물질 인생을 머릿속으로 계산하기가 혼란스러웠다. 핸드폰을 꺼내 계산기를 두들기고 나서야 암산으로 계산한 그 숫자가 맞다는 사실에 놀라워 나는 외쳤다.
“62년이요?”
“아이고, 나 경 오래 해져시냐?”
바로 어제도 바다에 다녀오셨다는 어르신은 신양리에서 태어나 한 번도 신양리 밖으로 터전을 옮겨본 적이 없는 62년 차 현직 해녀다. 어르신의 기억으론 어렸을 때 본인이 살던 마을은 고성리라고 했고 ‘방뒤’라고도 불렸다 한다. 그런데 8살부터인가 신양리라고 이름이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신양리라고 하면 잘 모르고 고성리라고 해야 안다고 말씀하셨다. 언뜻 들은 어르신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내가 아는 고성리는 신양리 근처 마을인데 신양리도 고성리라고?
방뒤, 신양리, 고성리로 불리는 이 동네의 지명유래가 궁금증에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조선조 말엽인 1894년 어로행위를 생활의 근간으로 하던 이들이 고성리에서 내려와 움막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 신양리의 설촌유래였다. 이후 1909년 고성리에 둔 조합장이 이 지역의 행정을 관장했고 1915년에는 마을을 정의면 고성리라 했다. 그리고 1933년에는 지금의 고성리와 신양리를 각각 고성리 1구, 고성리2 구로 행정리로 나눴고 이후 1941년 4월 23일부터 신양리로 마을 이름이 개칭되었다. ‘방뒤’라는 이름은 마을 지형이 곡식의 양을 재는 단위인 말(斗)과 같이 우묵하게 생겼는데 머리 쪽은 막히고 밑은 터졌다고 방두포(房斗浦)라 했고 마을 사람들은 방뒤라고 한단다.
설촌유래 시기부터 마을의 역사를 계산했더니 이 마을은 생긴 지 128년째. 신양리의 81년 이야기를 가진 어르신의 인생이 너무도 궁금해졌다.
“5남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났지. 태어나보니 어머니네가 막 곤란 해나서. 우리 집은 돈벌이도 없고 그때는 존밧(좋은 밭) 없으면 서숙밧을 못 해나서. 지금처럼 비료가 막 있는 게 아니라. 곡식이 잘 안 돼서 어머니네는 존밧이 없었어. 많이 고생했어.”
아버지는 선원이셨고 어머니는 해녀셨던 집의 첫째로 태어난 김임생어르신은 형편이 넉넉한 집은 아니었다. 화산회토의 비율이 많은 뜬땅이 서쪽보다 훨씬 많았던 동쪽은 주식으로 먹었던 차조 농사가 아무 밭에서나 되는 건 아니었나 보다. 그나마 좋은 토질의 땅에서만 조 농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서숙은 ‘조’. 즉 차조가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해녀셨지만 어르신의 기억으로 어머니가 상군은 아니셨던 것 같았다. 옛 기억에 어머님이 가장 많이 해 오신 작업물은 미역이었고 아버지도 뱃일을 하며 받는 삯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셨다.
어르신 아래로 남동생이 셋 태어났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맏딸인 어르신은 국민학교에 다니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일을 하러 나가면 동생을 등에 업고 집안일을 하며 자랐다. 10살이 되는 해, 등에 허벅을 졌다. 새벽이 되면 우물을 길어 집에 커다란 물항에 물을 채우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고 밥을 짓는 것은 아침의 시작이었다. 그때는 서숙쌀도 많지 않아 쌀의 양을 불리려고 고구마를 크게 썰어 넣어 저녁까지 먹을 밥을 10살 소녀의 손으로 지었다. 낮에는 동생들을 보면서 땔감용 촐을 하러 들로 나갔다. 촐은 소도 먹고 불에 땔 용도로도 사용했고 작은 불을 낼 때는 소나무 솔잎이 필요했던 터라 동생들과 소나무 솔잎을 손으로 긁어다가 모아 오곤 했다. 동생들이 하나둘씩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어르신은 서운하지 않았다. 네 자녀를 키우기 위해 하루 종일 일만 하시는 부모님의 고생을 가장 가까이 봐왔던 소녀 김임생은 학교를 가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동생들을 돌보며 학교에 잘 다닐 수 있게 손을 보태는 것이 어르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셨다.
어머니를 따라 13살에는 바다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애기 해녀로 시작한 어르신이 해 온 물건은 미역. 미역으로 번 돈은 부모님을 드렸다. 그렇게 부모님과 함께 번 돈으로 큰 동생은 중학교까지, 아래 두 동생은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는 데에 보탰다.
“어머니가 해녀일을 잘 못했던 거 닮아. 어머니는 미역만 해 와났거든. 나도 엄마 따라 처음엔 미역을 했주게. 근데 어머니보다 난 물질일은 좀 잘하는 거 닮아. 그때는 전복만 돈이 좀 됐었던 시기여서. 물질을 하려니 글이랑 수를 알아야지. 15살 즈음 마을 사람한테 국어랑 암산법을 배운 거라. 낮에는 일해야 하난 밤에 배워서. 겅허난 해녀질을 해도 암산으로 계산해서 할 수 이신 거.”
다행히(?) 어머니보다 물질일이 훨씬 나았던 어르신은 18살에는 마을 언니들과 함께 출가물질도 다녀왔다. 18살에 간 곳은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 벗들과 같이 가서 풍선(風船 바람으로 움직이는 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타고 함께 노를 저으며 다니며 물건을 하러, 즉 미역을 캐러 다녔다고 한다. 노동의 힘듦은 ‘이어도사나’를 함께 부르며 흥으로 바꾸었고 미역을 가지고 돌산의 부락으로 들어오면 자꾸미(ザクミ, 作米 조선 시대에, 공물을 쌀로 환산하여 받던 일)하며 돈을 벌었다.
그다음 해에도 출가물질을 다녀오면서 돈을 조금씩 벌어왔다. 물허벅지고 밥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 출가물질을 하며 집안 살림을 보태고 결혼 준비 자금을 준비했던 어르신의 10대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1961년, 20살에는 동네 중매로 지금의 남편과 혼인을 했다. 남편은 혼인 직후 바로 군 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군생활을 하는 3년 동안 김임생어르신은 출가물질을 다녀오면서 돈을 벌었다.
“(시집 전)바다에 다니멍 돈 벌 땐 집에서 연탄으로 밥 행 먹었어. 보리농사는 어머니 때 좀 하고 서숙(조) 좀 하고. 그땐 거의 조팝(차조밥) 먹어서.. 그때 쌀밥은 너무 먹고 싶은 음식 이었주게. 냉중에(나중에) 곤로로 밥 할 시기돼서야 보리쌀에 동네점빵가서 쌀 사왕 쌀 조금 넣어서 먹어질 형편 되더라. 너흰 곤로 모를 나이지이? 우리 땐 다 겅행 밥 먹었져. 반찬은 뭐가 이서 나서? 콩 해 그네 된장 다섯 말 이만큼 담으민 그게 일 년 집반찬이라. 그자 밥에 된장만. 멜젓. 이렇게 밥에 먹는 게 반찬이었주. 아버지가 고깃배를 해나니까 생선을 그나마 자주 먹었던 것 닮아. 그게 끝이라.”
1961년 시집을 간 후 출가물질 3년 동안 번 돈으로 어르신은 드디어 내 이름의 밭 800평을 장만 할 수 있었다. 결혼 후 큰 아이를 낳고는 우리 아이들은 나처럼 절대 고생시키며 키우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시집가기 전 까지는 전복만 돈이 되는 물건이었고 그다음 값나가는 물건은 미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르신이 시집간 후에는 성게, 소라, 오분자기, 문어도 돈벌이가 많이 되었고 바다밭에 많기도 해서 물질일로 형편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셨다.
어르신이 출가물질을 다니며 번 돈으로 장만한 땅은 농사를 지었다. 바다일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바다에 나가지 않거나 밤에는 농사일을 하셨다. 낮에 시간이 없으면 밤에라도 가서 고구마를 들여다보고 검질을 매고 촐을 해 와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셨다.
큰 아들을 낳고 다음 해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막내아들도 태어났다. 책임져야 하는 식구들이 많을수록 어르신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해에 밭 하나씩을 사며 밤낮 가리지 않고 바다일 밭일을 했다.
“여기 사람들은 고구마영 유채 많이 해서. 고구마는 전분공장에 팔고, 빼때기 볼려서(바람에 말려서) 팔면 그게 전분공장에 가는 고구마보다 돈을 곱빼기로 줬지. 돈 벌려고 빼때기 할 때는 빼때기 돌리는 기계를 밭으로 가졍 가. 손으로 기계 돌리면 거기서 고구마가 잘리멍 나와. 그럼 바로 밭에 착착 널어쪄. 겅행 잘 말려야 돼. 바람에 잘 볼려야돼. 냉중에(나중에)는 기름 넣고 하는 자동식 빼때기 기계도 나왔지. 암튼 빼때기 만들민 공판하는 사람이 나왕 가맹이(가마)로 등급을 매겨. 1등급에서 3등급을 매기매. 잘 못 볼리거나 약간 썩은 빼때기는 3등급. 잘 말린 빼때기는 1등급. 밭이 빼때기 볼리는데 비라도 오면 식구들 다 나강 빼때기 지켜사 돼. 가을 겨울에 겅 빼때기 하멍 겨울 끝나가민 이제 유채 시작이라. 유채꽃 지고 씨앗 여물민 바싹 말령 발로 막 볿아. 겅행 남댕이(줄기) 털면 깨끗하게 유채 씨가 불려 나오매. 우리 경숙이랑 아들덜이랑 어렸을 때 그 유채 계속 털었다. 내가 유채 긁어오면 애들이 열심히 털어서. 우리 애들 비나 오면 막 좋아해서. 유채 안 털어도 되난.(웃음) 그럼 방에 선풍기 틀어 밤새 그 유채씨 잘 볼리는 거라. 유채도 잘 볼려야 값을 잘 쳐주니까. 그렇게 한 70~80 가맹이 하면 유채씨 공판하는 사람이 또 오매. 가맹이를 찔러서 유채씨 보고 등급을 매기는데 대부분 다 1등급 줘났지. 그땐 유채씨도 돈이 좀 되나 신디 언젠가부터 돈이 안되는 거라. 게난 유채 설러불고(서릊고) 그때부턴 당근을 했지.”
어르신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1960년대 이후 제주의 환금작물의 변화상을 알 수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제주에서는 1차 산업으로 얻어지는 작물을 단순 가공하는 제조업이 육성이 되었다. 농산물로는 고구마 전분공장과 주정공장이 주류였던 것 같다. 원물인 물고구마와 유채를 집중적으로 농사지었다. 즉 물고구마 원물은 고구마 전분공장으로, 고구마를 썰어 말린 빼때기, 즉 절간고구마는 주정공장으로 팔려나갔다. 농민들은 전분공장으로 가는 고구마보다 주정공장으로 가는 빼때기가 값을 쳐 주었기 때문에 빼때기를 하는 것을 더 선호했던 것 같다. 유채도 유채유를 얻기 위한 용도로 키웠다. 이 시기 제주가 고구마 전분과 유채유의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는 이야기는 이를 입증한다.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감귤산업이 성장했지만 어르신 집에서는 당근 재배를 하면서 농가소득을 올리셨다. 내가 인터뷰를 간 날, 신양리의 많은 밭들은 푸릇푸릇한 당근 잎이 절정이었다. 곧 당근 수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밤낮으로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밭을 조금씩 사셨다고 한다. 빚을 내서라도 밭을 사면 물질을 하며 빚을 갚고 농사를 지으며 살림을 보탰다. 그야말로 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둘째 딸 경숙이가 고등학교 갈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우리 아이들은 나처럼, 우리 부모님처럼 고생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서였다. 그리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 할수록 고생만 하고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이 사무쳤다.
김임생 어르신의 중년 이후는 또 다른 삶이 펼쳐졌다. 출가물질을 다니며 돈을 벌긴 했지만 어르신은 더 이상 출가물질을 가지 않으셨다. 잠시 물질을 멈춰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다시 물질을 시작했고 현재 62년째 이어오는 해녀 인생인 올해, 새로운 일도 시작하셨다.
“나? 한 85세까지는 물질하고 싶어.”
신양리의 선한 표정과 호탕한 웃음의 김임생어르신은 지금의 나보다 더 열정이 넘쳐 보였고 기운이 좋아 보였다. 오히려 내가 어르신에게 좋은 에너지를 받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사셨기에 이렇게 좋은 에너지가 가득할까? 난 어르신의 인생 후반부도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