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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제주댁 Jul 09. 2020

제주할망들이 여름 장마를 기다리는 이유

개역비가 내리는 날

날이 점점 더워지고 꿉꿉해지는 시기가 되면 이상하게 구미가 당기는(당기는) 제주 음식이 있다. 특히 6월의 장날이 열리는 날에는 ‘이것’ 한 봉지를 꼭 산다. 여름날의 제주댁 아침 풍경은 우유 한 컵에 ‘이것’ 세 큰 술, 꿀 반 큰 술을 믹서기에 넣고 작동 버튼을 눌러 휘리릭 만든 이 음료를 식탁 위로 들이민다.

유리잔 두 개는 집을 나서기 전 아빠와 딸의 아침 음료인데, 돌쟁이 때부터 ‘이것’을 마신 딸이 벌써 일곱 살이 되었다. 우유 대신 보리차에 ‘이것’을 걸쭉하게 개어서 담은 이유식 그릇은 두 살 된 아들의 몫인데 이유식 스푼으로 떠서 쫍쫍 빨아먹는 제주 아기의 아침 별미이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딸이 생뚱맞은 질문을 한다.

“엄마, ‘이거’ 죠리퐁 우유예요?”

"엥? 네가 늘 먹던 보리미숫가루야”


날이 더워지고 꿉꿉해지면 보리개역이 생각난다

이상하게도 나의 DNA는 더워지고 꿉꿉해지는 6월에 항상 ‘이것’,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보리 개역이라고 부르는 보리미숫가루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나의(어쩌면 제주 토박들이라면)  이 DNA는 유년기 시절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30여 년 전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보면 친정엄마는 항상 6월 즈음이 되면 시장에서 보리미숫가루를 장만해 오셨다. 6월부터 한여름까지 하교 후 집으로 들어오면 엄마는 스테인리스 국그릇에 시원하게 식혀둔 보리차를 따르고 보리 개역을 네다섯 큰 술 넉넉히 둘러 넣고, 설탕을 조금 더 넣어(그 당시에는 원당이나 사카린이 가루에 들어있었다고 한다.) 숟가락으로 잘 풀어준 후 얼음 몇 알 동동 띄워 내 책상 위로 내미셨다. 걸쭉하고 구수하며 시원한 이 보리 개역은 허기와 갈증을 동시에 해결해주는 나의 여름철 힐링 음식 중 하나였다. 또 친정엄마는 끓인 보리차에 보리 개역을 더 넉넉히 풀어 죽처럼 되직하게 만든 후 그 당시 돌이 갓 지난 막둥이 남동생의 이유식으로도 먹였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나는 30여 년 전 우리 엄마를 똑 빼닮아있었다.



왜 우리 모녀는 6월에 이토록 강하게 보리 개역을 찾는 걸까?

제주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봄비는 잠비고, 여름 비는 개역 비여.”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대정서 장이 열리는 날, 보리미숫가루 한 봉지를 사고 나와 마을 골목 어귀에 앉아 계신 동네 어르신 3분께 무작정 다가갔다.

“어르신, 이거 장에 강 사온 개역 인디, 무사 여름 비를 개역 비라고 하맨 마씸?”, “여름 비 오민 그날은 보리를 과라사(갈아야) 되니까 주게.”

어르신들의 말인즉, 보리를 수확하고 비 오는 날에 맞춰 보리나 콩을 볶아 개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맑은 날, 습도도 상대적으로 적은 날을 선택해 보리나 콩을 볶아야 바싹 볶을 수 있을 것이고, 바싹 볶아 수분을 거의 날린 보리가 더 고소하고 보관도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할망들은 왜 굳이 여름 비를 보며 개역을 만들었을까? 혹시 비 오는 날 만드는 개역이 좀 더 맛있어지는 특별한 비결이 할망들에게 있는 것일까?

“아이고 6월엔 막 바빠. 농사도 막 바쁜디 비 오면 밭일 못할 거 아니여. 비가 와사 그때 개역 만드는 거주.”


아하! 이제야 흩어졌던 퍼즐들이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통상 산기슭이나 들기슭에 보리탈(산딸기)이 빨갛게 익어 가면 보리 수확할 시기가 거의 다다랐다는 신호라고 말하신다. 아! 그래서 산딸기를 보리탈이라고 하는구나. 이야기를 알고 보니 보리탈이라는 이름이 더 귀엽게 들린다. 제주 사람들이 완두콩을 보리콩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것일 것이다. 완두콩도 보리가 수확할 시기와 비슷하게 맞물려 수확한다.

대체로 보리 수확은 보리탈이 빨갛게 익어 가는 망종을 전후에서 수확하고, 망종이 지나면 곧 6월 여름 장마가 시작된다. 장맛비를 맞은 보리는 잘 썩고 냄새나기가 쉬워 장기간 보관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가 오기 전에 수확을 끝내야 한단다. 그런데 또 농사일로 바닷일로 한창 바쁜 나날들을 보내는 시기가 6월이기 때문에 맑은 날 한가롭게 집에 앉아 개역이나 만들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공통된 말씀이시다.

그러다 비가 오는 날, 그러니까 하늘이 허락한 쉬는 날에야 비로소 보리와 콩을 가지고 개역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개역은 그 당시(1980~1990년대) 대부분 겉보리를 집에서 볶아 정미소에 가져가면 가루로 제분해 개역을 마련했다고 한다. 어르신들의 부모님들은 집에서 보리를 볶아 낸 후 고래(제주식 맷돌)로 갈아 체에 내려 개역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는 더 귀한 이야기들이다.

본인의 엄마는 쪼개진 보리쌀 껍질 부스러기도 버리지 않고 누룩으로 만들어 술이나 쉰다리(제주식 저알콜 곡류 발효음료)를 만드셨다는 한 어르신의 이야기는 제주 어멍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비오는 날 정성으로 만든 보리 개역은 시부모님께 가장 먼저 드렸고 이것이 며느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개역 한 줌도 안 주는 며느리”라는 말이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할망들은 겉보리로 주로 개역을 만들었다고는 하나 최근에는 쌀보리, 흑보리, 발아보리 등 다양한 보리 개역과 현미와 찹쌀, 다양한 곡류들을 섞은 후, 호화시켜 제분한 미숫가루들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주의 개역에는 보리가 주인공처럼 꼭 들어가 있는 것은 당시 제주인의 주곡이 무엇인지 추측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음식이다.



그렇다면 보리 개역, 즉 보리미숫가루는 제주에서만 만들어 먹었을까?

1936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미시만드는법’을 살펴보려 한다. “미시는 보리 볶은 가루라고 하기도 하며 냄새가 향기롭다고 하여 ‘구(糗)’라고 하기도 한다.” 제주의 보리 개역과 만드는 제법이 같다. 보리가 제주에서만 나는 작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 국민이 먹었던 음청류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제주의 보리 개역이 보다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1936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나온 미시만드는법. 미시는 ‘초(麨)’라 한다. 보리볶은 가루라고 하기도 하며, 볶아 만들기 때문에 볶을 초자와 같다고 한다/사진-한국전통지식포탈

이 보리 개역으로 만든 독특한 제주 음식에서 해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보리밥에 보리 개역을 솔솔 뿌려 비벼 먹었던 여름철 별미는 지금의 자극적인 간식만 쫓는 세대들에게 색다른 제주의 맛을 전해주는 우리 엄마들의 추억의 음식이고, 더운 여름 입맛을 잃기 쉬운 찰나 맹물이나 보리차에 타서 시원하게 들이켜거나 면기에 개역을 먼저 놓고 물을 조금씩 흘려내며 물에 비벼 먹듯이 먹는 개역은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제주 여성들의 가족을 위한 식사 겸 음료이다.


물에 걸쭉하게 개어 내어 아기들의 이유식으로 만들기도 했고, 우미(묵)에 세우리(부추) 쫑쫑 썰어 넣고 보리 개역이나 콩 개역 한 스푼 넣어 후루룩 마시듯 먹는 우미 냉국은 가히 지금, 제주의 여름철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제주 별미이다.



마을 할망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보리개역은 어떵 먹어야 제일 맛 조아 마씸?”

"에이 이제 무신 보리 개역이 뭐가 맛이 좋아~ 요즘 세상에 맛 조은 음식이 얼마나 많은디”

우미(묵)에 세우리(부추) 쫑쫑 썰어 넣고 보리개역이나 콩개역 한 스푼 넣어 후루룩 마시듯 먹는 우미냉국은 제주서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아이고, 어르신!
그래도 여전히 제주의 20~30대 젊은이들 중
보리 개역 안 먹고 큰 아이는 없을 정도로,
요즘 젊은 세대의 어멍들에게도 보리 개역은
아직도 강력하게 우리 가족을 잡아 끄는
구수하고 든든한 마력이 있는
6월의 힐링음식 이우다.
제주사람들의 몸속에는 보리 개역 DNA가 강하게 심어져 있댄 허난!





본 콘텐츠는 <제주의 소리> 제주댁, 정지에書에 연재됩니다.


@jeju_cookinglife

오늘도제주댁 : 제주에서 아이둘을 키우며 제주음식을 공부합니다.


일러스트

@iroiro.one
이로이로 : 제주도 작은마을 작은공방에서 그리고 쓰는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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