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의 젓가락(봄, 저봄 : 젓가락의 제주어)
“제주전통음식 코스인데, 젓가락이 당연한 거 아니에요?” 2017년 11월 9일 오후 4시 30분.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말이었다. 36살이었던 나는 제주전통음식을 기반으로 한 케이터링, 도시락, 교육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고작 3년 차 사업 초보였음에도 감사하게 꽤 굵직굵직한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왔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소위 ‘잘 나가는 젊은 여성 사업가’였다. 그 당시에는 30대 중반의 제주 토박이 중 제주 전통음식으로 사업하는 친구가 거의 없을 때라 많은 분들이 나를 찾아 주셨던 그런 시기였다. 2017년 11월 9일은, 이름만 들어도 다들 아는 곳에서 주관하는, 외국 바이어를 초청하여 진행하는 대규모 국제행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행사에서 나는 제주 전통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코스요리를 선보이는 연회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런 연회는 대부분 제주의 특급호텔에서 맡아 진행해왔고 소규모 업체가 진행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나는 외국인 손님들께 맛있고 아름다운 제주 전통음식을 드시면서 제주에 대한 좋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메뉴를 기획하고, 아쿠아플라넷 대형 수족관 앞에서 제주 가을의 분위기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이색적인 공간 기획에도 힘썼다. 메뉴 기획에 공간기획까지, 행사 몇 주 전부터 꼼꼼하게 신경을 쓰고 철저하게 준비했던 작업이었다. 제주 전통음식이지만 플레이트(담음새)는 양식 코스를 표방했던 연회라 커트러리(숟가락, 포크, 나이프 등)를 제공할지 한식 수저를 제공할 것인지에 대해 주최 측과 여러 번 회의를 거쳤다. 장기간의 논의 끝에 외국인 바이어들이 사용하기 편리한 커트러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결정했고, 이를 일정 마지막 날 다시 한번 체크하여 최종 확인까지 마쳤다.
당일 오후, 아쿠아플라넷 제주에 도착하여 연회 세팅을 하고 있었는데 테이블에 놓인 커트러리를 보신 한 남자분이 이 연회의 총책임자인 나를 찾았다.
“제주 음식으로 준비하는 거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젓가락이 아닌, 숟가락과 포크죠?”
“아, 그 부분은 주최 측과 이미 여러 번 협의해서 커트러리를 제공하는 걸로 결정이......”
“아니 당연히 제주 전통음식 코스인데, 외국인 연회여도 젓가락이 맞지 않겠어요?”
연회 시작이 한 시간 반 남짓 남은 그때, 커트러리에서 수저로 교체해달라는 요청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음식을 준비하는 주방팀도, 테이블 세팅을 담당하는 연회팀도 모두 흔들리게 된다. 저녁 행사 때문에 푸드 코트에 입점해 있던 업체들도 모두 퇴근 한 터라 건물 내에서 그만큼의 젓가락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주최 측에 급한 대로 일회용 젓가락이라도 괜찮겠느냐 물었더니 당연히 안된단다. 나는 우리 팀들에게 곧 젓가락을 가지고 올 거니 행사를 착오 없이 준비해 달라 부탁하고 무작정 아쿠아플라넷 밖으로 나왔다.
대책 없이 밖으로 나온 나는 성산의 큰 식당들이 보이면 무작정 들어가서 젓가락을 빌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이제 곧 저녁 영업을 시작하는 식당들이 나에게 젓가락을 빌려줄 리 만무했다. 시간이 늦어 마을회관도 문을 닫았고 성산에는 당장 150벌의 젓가락을 구입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클라이언트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역할 중 하나였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급해진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순간 스승님 중 한 분의 친정이 성산이라 하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급하게 스승님께 전화를 드려 급하게 젓가락이 좀 필요한데 친정어머님께 부탁드려보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드렸다. 그리고는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스승님께 연락이 왔다. “진경아, 우리 엄마한테 지금 전화드려보렴” 스승님의 친정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지금 바로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급하게 차를 몰아 댁으로 갔더니 어머님은 이미 대문 앞에 나와 계셨다. 인사를 제대로 나눌 겨를도 주시지 않고 급하게 앞 조수석에 타신 어머님은 “이디래”, “저디래” 하며 손목 스냅을 이용하여 방향을 알려주셨고 나는 무작정 알려주신 방향으로 운전했다. 그리고는 신양2리의 어느 골목에 차를 세웠는데 차를 세운 곳 바로 앞 쉼팡 아래 어르신 두 명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님의 친정어머님이 물으셨다. “거기가 어디꽈?(그곳이 어디에요?)” “따라옵써.(따라오세요)” 좁은 골목을 할머니들과 함께 들어간 가정집 마당에서 들어서자마자 나의 눈은 바로 하얀 김이 서린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아이고, 야이라?(이 아이야?) 동네에서 잔치하는 아이가? 잘도 어린 아인게. 나도 잘도 오랜만에 꺼내부난 한번 씻었져.
다 어디로 가신지 106벌 이서라(있더라).”
스승님의 친정어머니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이웃동네 친구에게 물어 젓가락을 가지고 있는 마을 주민을 찾아냈고 성산에서 당장 잔치 치르는 아이가 젓가락이 없어 손님을 치르지 못한다고 하니 빨리 와서 가져가라 하셨다 한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장 안에 간직하고 있던 오래된 젓가락을 꺼내 하나하나 깨끗하게 씻고 난 다음 또다시 하나하나 마른행주로 닦아 내고 계셨던 것이다.
“게난(그러니까) 우리 동네에서 잔치햄서? 이거면 되커냐(되겠니)? 더 필요한 건 어시냐(없고)?”
검은색 비닐봉지에 젓가락을 넣어 돌돌 말아 내 손에 쥐어주시며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보시는,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사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처음 만난 낯선 젊은이에게 젓가락을 주려고 모이신 성산 토박이 어르신 네 분. 그리고 그 젓가락이 없으면 오늘 큰 고초를 겪을 뻔한 제주시에서 온 젊은 제주 처자 한 명. 다른 공기, 다른 세월을 살았지만 어르신들에게 이 “야이”는 그 순간만큼은 같은 공기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그냥 동네의 아이였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검은색 비닐봉지를 떨리는 품에 안고 다시 연회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신양리 어르신들이 내어 주신 젓가락으로 그날의 연회를 무사히 치렀다.
이후 연회가 끝나고 젓가락을 돌려드리며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나에게 젓가락을 내어주신 어르신은 마을에서 행사나 마을제가 있을 때 전이나 적을 도맡아 만들었던 어르신인데, 이때 마을 사람들이 사용할 젓가락도 관리하고 계셨다고 한다. 이제는 마을단위의 행사를 치른 지 오래되어 몇 년 동안 젓가락을 장 속에 묵혀 뒀는데 오랜만에 꺼내니 순간 떠들썩했던 옛날 마을 모습이 생각나서 좋으셨다고 하셨다. 헐머니는 아주 최근에야 본인이 적을 만들었지만 사실 돼지고기 준비나 적을 만드는 건 예전에는 남자가 담당했던 일이었다고 하셨다. 집에 있는 대나무를 가늘게 깎아 적꽂이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돗궤기(돼지고기), 쉐고기(소고기), 상어고기, 모멀묵(메밀묵), 둠비(두부), 구젱기(뿔소라), 뭉게(문어), 오징어 등을 손질해 각각의 꽂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제례상에 올리는 제주의 적(제주에서는 적갈이라고도 부른다)은 바로 이렇게 한 꽂이에 한 종류만을 꿰는 점과 그 크기가 제법 크다는 점에서 육지의 적과는 다르기 때문에 외지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는 제주 음식문화 중 하나이다. 이 적꽂이는 행사의 종류나 먹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모양을 달리했는데 50년대~60년대 가문잔치의 상객상에는 하얀 곤밥 위에 돼지고기, 간전, 메밀전병, 닭다리 등을 꿰어 올린 반꽂이를 올리는 등 각각의 이유와 이야기가 있는 제주의 적 문화다.
그땐 먹고사는 게 아무리 힘들었어도 잔칫날만 되면 온 마을에서 떠들썩하고 즐거웠다고 한다. 잔칫날이 다가오면 두부를 제일 잘 만드는 어른은 마른둠비(마른두부)를 만들었다. 또 잔치에 쓸 돼지도 잡았는데, 그때면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들뜨고 신이나 온 마을이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마을제나 행사가 있을 때에도 마을 사람이 모두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고 행사 준비를 했었는데, 기쁜 날이나 슬픈 날이나, 마을의 중요한 행사를 일 년에 몇 번이고 함께 치러내느라 바빴던 기억이 이제는 까마득해지셨다고 했다. 기쁨도 같이 나누고 슬픔도 함께 나누며 마을을 지켜갔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떠났다. 또, 아이들과 젊은이들도 시내로 가고, 육지로 나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갔다. 마을에서 직접 준비했던 잔치는 점점 예식장이나 행사장으로 옮겨가고 이제 마을제는 어르신들만의 행사가 되어버렸다. 제사음식을 먹으러 가는 “식게밥(제사밥)”도 역시 어르신들만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어르신들의 기억에 남아있던 마을 사람들의 생생한 소리가 살아있는 신양리는 이제는 조용한 마을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젊은 “야이”가 우리 동네에서 손님을 치른다고 젓가락을 찾는데 젓가락을 씻으며 문득 옛날 정겹고 왁자지껄했던 옛날 마을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했다고 하셨다.
2017년 어느 가을날, 나는 그렇게 할머니가 50여 년 동안 소중히 간직하면서 마을의 잔치 때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용했던 그 소중한 “할망의 따뜻한 봄”으로 기적처럼 잔치를 치러냈다.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실 때마다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 존경하는 어느 학자가 했던 말을 자꾸 떠오르게 하는, 나에겐 보물같이 소중한 이야기. 이 어르신들 이야기와 그 속에 담긴 삶의 지혜가 오늘도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이 글은 <제주의 소리> "제주댁, 정지에書" 에 연재되는 글과 일러스트입니다.
@jeju_cookinglife
오늘도제주댁 : 제주 음식을 공부하는 제주 토박이 워킹맘
@iroiro.one
이로이로 : 제주도 작은 마을 작은 공방에서 그리고 쓰는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