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춘빵집 기술자였어.”
조전호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20년 넘게 늘 지나다녔던 제주시 신설동 대 도로변에 언젠가부터 문을 연 한 빵집이 있다. 어림잡아도 문을 연 지는 5년이나 좀 넘었을까? 이 빵집 매장 외관을 보니 주력상품은 보리빵과 쑥찐빵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 눈에 더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상웨빵’. 여기에 더해 외관에 걸린 현수막은 ‘40년 전통’이란다. 유리문을 통해 매장 안 매대를 보자마자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이끌려 이 빵집에 들어갔다. 이 집의 이름은 신설동보리빵. 빵집 사장님으로 보이는 듯한 남자삼춘께서 나와 환대해 주셨다. 1955년생 조전호 사장님이셨다.
제주시에서는 이제 거의 볼 수 없는 길쭉한 빗상웨가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보리빵이나 쑥찐빵을 파는 제주의 빵집들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밀가루에 막걸리를 넣고 발효해서 쪄낸 앙금이 들어가지 않은 상웨빵(상웨떡)을 만나볼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일부 빗상웨를 하는 곳에 따로 주문을 넣지 않는다면 제주시에서는 보기 힘든 제주의 음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길을 지나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사장님과 상웨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내 소개를 하게 되었다.
“사장님, 전 지금 저 산지천 쪽 칠성통 아케이드 상가에서 매장을 운영하고 있어요.”
“광제교 그쪽? 지금 공영주차장 생기고 없어진 그 자리에서 내가 빵집 했었는데?”
“어? 그쪽에 영춘빵집이라고 어른들이 엄청 유명한 찐빵집 있었다고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혹시 영춘빵집이에요?”
“아니. 나는 다른 빵집인데, 내가 그 전에 영춘빵집 기술자였어.”
제주 음식, 특히 상외떡(상웨떡, 상왜떡, 상애떡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떡과 빵을 혼용하여 부른다)을 공부하면서 어른들께 정말 많이 들었던 빵집 중 하나가 산지천 영춘빵집이었다. 언젠가 영춘빵집에 대한 이야기를 꼭 들어보는 것이 항상 소원이었는데 정말 우연히 들어간 빵집 사장님의 입에서 이 빵집을 듣게 되니 나는 떨리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는지 요청했다.
“나는 서귀포시 강정동에서 태어났어. 1970년인가, 17살에 제주시로 왔어. 유학이냐고? 아니 빵집에 취직하러 왔어. 서귀포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두 달 남겨두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 옛날엔 나뿐만 아니고 여건상 모든 것을 하고 싶을 때도 아니었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 여건이 그렇게 되지 않았어. 일해서 돈 벌어야 먹어질 꺼 아니? 그냥 먹고살기 바빠서 시내 넘어왔어. 딱 두 달만 더 공부하면 되는데 지금 후회해봤자 뭐 없지. 거난 후회는 안 해.”
조전호 사장님은 어린 나이에 전파사로 취직했다. 그런데 막상 일해 보니 전파사에서는 너희가 오히려 기술 배워가는 것이 아니냐며 월급도 주지 않고 일 년에 옷도 한 벌이나 사줄까말까 했단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1960년대 후반엔 사회풍토가 그랬다. 그래서 전파사를 그만두기로 하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제주시 빵집에 취직하면 기술도 배우고 월급도 잘 준다고 해 제주시에 오기로 결심했다. 당시 빵집에서 근무하면 숙식 해결도 됐기 때문에 지체하며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17살에 빵집 취직하러 왔을 때가 71년도였잖아. 그때 제주 시내에 빵집이 10개 미만이었어. 칠성통에 네 다섯 곳 있었고, 과양(광양) 두 군데, 남문통 두 개였나? 암튼 10개 미만이었어. 우리가 그때 들어가서 고급기술들을 배운 거라. 빵집에서 먹고 자고 옛날에는 다 그랬어. 그때만 해도 제주시도 스레트집이랑 초가집만 있었지. 지금 시청 자리가 도청 이어났고. 시청이랑 법원이 관덕정 앞에 있었고. 그러다 도청이 넘어가면서 도청 자리가 시청으로 된 거야. 그러면서 시청 쪽이 발전하기 시작했지. 그때 빵집은 전부 찐빵, 곰보빵, 앙꼬빵. 식게집들이 가져가는 빵들이었어. 그때는 (손님들이) 빵들을 동이구덕이라고 있는데 그거 들렁 빵 사러 와. 동이구덕이 조근조근 빵 놓으멍 사 갔지. 그 동이구덕 참 좋은 건데, 나중에 되니까 동이구덕 안 들고 다니니까 종이박스 슈퍼에 주워다가 그 종이박스에 넣어줬어. 종이박스가 지금의 동이구덕이 된 거라.”
조전호 사장님이 갓 빵집에 입사했던 10대 시절 기억에 제주 사람들은 식게(제사)나 명절이 되면 빵집에 와서 빵을 사 갔다. 오히려 떡보다 빵을 더 많이 올렸다. 떡은 큰 영장때나 하는 경우가 많았고. 떡집이 많았던 때가 아니기 때문에 방앗간에서 쌀을 갈아다 집에서 만들었던 때라 떡 만드는 데 공이 많이 들어가 자주 만들지 못했던 것 같다 했다. 빵집은 상에 올릴 빵들을 한 아름 사러 오는 손님이 늘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매일 식게에 올릴 제물빵을 사러 오는 손님들로, 또 지금 커피숍의 기능을 과거 빵집이 했었기 때문에 제주 시내의 빵집들은 늘 문전성시였다.
“내가 빵집에 들어가서 받은 첫 월급이 삼천 원. 지금 돈으로 하면 이백만 원 정도지? 보통 그때는 초짜들이 이천오백 원 받았지. 기술자들은 월급이 팔천 원에서 만 이천 원이었어. 기술자들은 고급인력이니까 확실히 많이 받지. 나는 그래도 신입 월급을 삼천 원 받았지만, 그때 당시 우리 선배들은 첫 월급으로 칠백 원 받고 일 시작했다고 하더라고. 삼천 원 월급 받아도 생활이 전부 되었어. 옷도 사 입고 술도 먹고 밥도 먹고. 그렇게 17살에 배운 기술이 시작이었어.”
처음 근무한 빵집은 광양사거리 쪽 빵집이었다 그 후에는 쭉 칠성통으로 내려와 근무했다. 광제교 다리 바로 옆에 있던 칠성통 방가로라는 빵집에서 오래 일하다 옆 영춘빵집에 기술자로 스카우트되었다.
그 당시에 제주에서는 영춘빵집이 제일 유명한 곳 중 하나였다고 했다. 영춘빵집에서 만드는 찐빵 중 소다앙꼬빵이 그렇게 인기가 좋았다고. 그러다 서귀포 사는 선배가 빵집을 개업하는데 서귀포에는 기술자가 없다고 도와달라 부탁했단다. 그 계기로 서귀포에서 4년 정도 살며 근무했다. 1980년대였던 그 시기부터 제주시와 서귀포시에 본격적으로 빵집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시내로 넘어오고 싶어 칠성통 아리랑백화점 옆 칠성빵집으로 넘어왔다. 칠성통의 칠성빵집과 산지천 영춘빵집은 빵 맛이 좋아 제일 유명한 빵집들이었다
조전호 사장님은 당시 제주에서는 손꼽히는 기술자 중 한 명이었단다. 기술자 중에서 월급을 가장 많이 받기도 했다. 적어도 1980년대 초반 제주에서 빵 기술자 하면 다들 조전호 사장님을 떠올렸다. 당시 기술자 월급이 보통 5만 원인데 사장님은 6만 원에서, 많게는 8만 원까지 받기도 했단다. 이 빵 기술이라는 것이 사수에게 레시피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하며 어깨너머로 보며 배우는 것이라 했다. 기술자가 빵을 만들 때 어떤 재료를 얼마나 넣고 어떤 순서로 만드는지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깨너머로, 저울에 달린 재료의 무게도 다 외우면서 오로지 내 감각으로 배우는 것이라 하셨다. 어깨너머로 오랜 시간 동안 습득한 레시피는 근면함과 인내심이 같이 수반되어야 가능한 것이고 습득한 기술자의 레시피를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다시 본인 자신 것으로 만들어 본인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30여 가지가 넘는 빵들을 내 레시피로 만들어 낼 줄 알아야 진정한 기술자라 할 수 있단다.
“그렇게 11년 동안 제주의 큰 빵집들은 다 다니고. 겅하다가 나 장사 시작한 게 방가로 바로 앞에 거기 강 오픈을 했거든. 한아름제과. 근데 그때는 조금씩 칠성통이 죽어가기 시작했을 때라. 극장이 사라지는 바람에. 칼라티비 나오기 시작하고 코리아극장이랑 중앙극장, 아시아극장 싹 사라지니까 그때부터 칠성통이 죽어가는데 내가 그때 개업했어, 옛날 생각만 해서. 1983년인가 84년에 오픈했지.”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운영하는 빵집들이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고 그 흐름 속에서 조전호 사장님도 내 명의의 빵집을 개업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칠성통에서 오픈했지만 칠성통 상권이 쇠락하기 시작하던 시기라 곧 광양로터리 자리로 옮겨 조남제과라는 상호로 문을 열어 꽤 오래 장사했었다. 이후 터미널로 옮겨 하늬 베이커리, 인제에서는 별미베이커리. 그리고 6년 전 다시 자리를 옮겨 지금의 신설동보리빵으로 여전히 빵을 만들고 계셨다. 올해로 52년째 빵을 만들고 있는 가장 경력이 긴 제주의 현직 빵 기술자가 바로 조전호 사장님이셨다.
사장님은 이어 말씀하셨다.
“1990년대로 들어오니 제과점들이 경쟁이 붙기 시작한 거라. 서울 가서 일류기술자들을 스카웃 해 오는 거야. 서울 기술자들도 제주 오면 좋거든. 부인이시믄 집도 얻어주고 제주에서 살면서 돈도 벌고. 그렇게 신제품이 나오면서 그때 고도로 발전되는 빵들이 나와. 계속 공부해야 하는 거라. 이때까지가 빵집들 르네상스 시대였지. 그러다 요근래 와서는 파리바게뜨. 뚜레쥬르 나오면서 빵집들이 죽기 시작한 거지. 일반 빵집들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빵 종류가 엄청나게 나오니까. 상대가 안 되지. 80년대 제주에서 알아줬던 빵 기술자들은 지금 다 없어. 나까지 해서 한 4명? 그런데 아들들한테 물려준 두 군데는 빼면 두 곳밖에 없다. 00보리빵하고 우리. 00보리빵도 내가 빵집 했을 때 우리 집 와서 배워가서 오픈했어. 내가 많이 도와줬지. 어떤 시설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평생 내 귀로 직접 들을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영춘빵집과 제주의 빵집들의 시대 흐름에 따른 변화상을 듣는 것도 너무 흥미로웠는데 빗상웨 이야기도 꺼내주셨다.
“옛날 우리 상에 올렸던 이 상웨빵 제일 처음 빵집에서 만든 게 바로 나야. 옛날 빗상웨는 양가루(밀가루)가 원조 오니까 배급들이 집집마다 왔어. 집집마다 막걸리가 있으니까 이스트 나오기도 전에 집에서 막걸리로만 반죽해서 옛날엔 집에서 만들던 식으로만 했던 거지. 나 어렸을 때부터 빵집 다니기 전부터 제주에 있었던 거. 식게 때 올리려고. 지금 기준으로는 맛도 없었던 거 그때는 먹을 게 없어서 그것도 맛있다고 했지. 그러다 내가 빵 기술자 되니까 빗상웨는 옛날식 참고해서 만들어서 내가 처음 만들어 팔아본 거지. 그게 대박 난 거야.”
조전호 사장님은 전통 방식으로 빵을 해야 그 맛이 더 깊고 좋은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직접 제작한 사장님의 발효기를 보여주셨다. 다음 편에는 52년 내공으로 만드시는 사장님의 전통 방식의 제주 빵 이야기와 한평생 빵 기술자로서 살아온 삶의 철학과 기조를 들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