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한 동네, 신주쿠

그저 도쿄, 그래도 도쿄

by kotobadesign

창밖에는 폭포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에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비를 피할 수 있는 큰 지붕, 작은 지붕 아래에 모였다. 내가 밖을 바라보던 창문 앞에도 비를 피하는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로 서 있어 북적북적해졌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사람들로 북적이던 거리는 텅 비어 버렸다.


막 비가 쏟아지려고 할 때 한 식당의 문을 열었다. 어쩌면 나는 비가 오지 않았다면 이 식당 앞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후드득 떨어지는 비가 망설일 틈도 없이 이 식당의 문 손잡이를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안내받은 1인석의 작은 테이블 옆 테이블에는 이미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처음에는 교수님과 학생인가 싶어 아무 말도 없이 테이블만 보고 있는 학생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귀에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이야기를 종합하니 세 사람은 그날 처음 만난 사이로, 혼자 열변을 토하는 사람은 택시 운전기사였고 두 사람은 승객이었다. 내심 놀랐지만, 뭔가 그런 낯선 조합(?)이 신주쿠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세게 내리는 비가 그칠 줄 몰랐다. 이미 작은 차양 아래에, 고가 다리 아래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사라진 뒤였다. 다들 이 비를 뚫고 어디로 갔을까. 내 옆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도 비를 뚫고 가기 위해 계산대로 향했다. 그때 들려온 여주인의 말. "우산 있어요? 우산 빌려줄 테니까 가져가세요. 그리고 우산은 돌려주지 않아도 돼요. 대신에 비 때문에 곤란해하는 손님이 있을 때 그 손님에게 전해 주세요."

여주인은 고기두부와 오야코돈을 말끔하게 다 먹은 나에게도 "물 더 줄까요? 그리고 비가 좀 그칠 때까지 편하게 있다가 가요."라고 말했다.

그곳은 그동안 줄곧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곳, 하지만 있다는 것은 알고 있던 식당. 110년 동안 신주쿠라는 동네에서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온 식당 나가노야다. 이 식당에 가보라고 등을 떠밀어 준 것은 얼마 전에 번역한 한 책이었다. 그 책의 저자도, 그리고 그 저자의 지인들도 모두 알고는 있는 곳, 하지만 선뜻 가지는 못했던 곳이 이 식당이었다. 화려하고 세련된 신주쿠 한복판에 오래되고 수수한 모습으로 서 있어서일 테지만, 일단 그 안에 한 발 들이면 벽 하나를 두고 시간도, 시대도, 장소도 초월한 전혀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곳이 신주쿠에는 아직 많다.


신주쿠에 갈 때는 늘 가는 곳이 정해져 있다. 기노쿠니아서점, 무인양품, 명곡킷사 란부루, 빔스 재팬, 가끔 영화관, 가끔 킷사텐 타임스, 가끔 마루이(화장실 갈 때), 북퍼스트서점. 오래된 하카타라멘집. 그리고 신주쿠교엔. 이렇게 열거한 장소들에 대해서는 각각의 이야기를 한 편씩 쓸 수 있을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 정도로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곳들은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모두 신주쿠 지역을 가로지르는 야스쿠니도리를 기준으로 왼쪽에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른쪽은 휘황찬란한 술집들이 빼곡히 자리해 온갖 인간군상이 모이고 수많은 욕망이 교차하며 호스트의 인상이 강하게 박혀 있는 가부키초 지역. 가부키초는 그 유명한 드라마 '심야 식당'의 첫 장면에서 음악과 함께 고가를 지나 도로를 따라 비추어지는 그곳이다.

도쿄에 있는 내내 신주쿠에 있는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신주쿠는 나에게 너무도 익숙한 동네다. 비 오는 날 JR 신주쿠역 동쪽 게이트에서 학교까지 어떻게 하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지하도로만 갈 수 있을지 매일 실험하며 다녔을 정도로 길은 빠삭하게 다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오른편으로는 거의 가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오른편 큰 길가에 있는 하나조노신사에 가 본 정도라고 할까. 유학생활은 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듯했고 자칫 발을 삐끗하면 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삐끗하는 순간이 신주쿠 오른쪽에 발을 들이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신주쿠는 나에게 익숙한 곳이자 낯선 곳. 훌쩍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자 선뜻 발을 들이기 어려운 곳이다.


이번에 나가노야에 간 뒤로 어쩌면 내가 찾는 작고 오래된 장소들은 오른편에 훨씬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가득한 길거리의 골목에 작게 자리한 오래된 가게들. 왠지 내가 모르는 그 오른편 세계에도 나가노야의 여주인처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와 온도를 유지하며 손님을 살뜰하게 챙기는 이가 있을 것만 같다.

나가노야의 문을 열었던 날처럼 비라도 내리면, 해라도 쨍쨍하게 내리쬐면, 지금 당장 피해야 할 무언가를 핑계로 성큼성큼 그 화려한 거리에 발을 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비록 지금도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쪽에 서서 저쪽을 상상한다. 그리고 저쪽으로 훌쩍 건너가게 될 날을 내심 꿈꾼다. 삶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에도 역시 늘 등 떠밀어 주는 작고 큰 무언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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