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동네, 나리타 익스프레스

그저 도쿄, 그래도 도쿄

by kotobadesign

나는 탈 것에 대한 집착이 별로 없는 편이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는 편이기도 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탄다. 하지만 도쿄에 갈 때는 꼭 타는 게 있다. 나리타 익스프레스다. 한국으로 치자면 공항직통열차라고 하면 될까.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야 도쿄에 왔다는 생각에 가슴 설레고, 며칠 동안 머물던 도쿄에서 떠날 때는 마음을 정리하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 나리타 익스프레스는 돌아오는 곳이자 떠나는 곳, 시작하는 곳이자 끝내는 곳, 나의 도쿄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동네라고 할 수 있다.


나리타 익스프레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리타공항에서 타야 한다. 나리타공항이 도심에서 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짧은 도쿄 일정을 생각하면 시내와 가까운 하네다공항으로 가는 것이 시간상으로는 훨씬 낫다. 하지만 나리타공항에서 내려 짐을 찾고 공항에서 열차를 타러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안내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JR 여행자 센터에서 왕복 티켓을 구매해 개찰구를 통과한 다음, 플랫폼에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도쿄에서의 첫 지출로 좋아하는 음료를 구입해 열차에 올라 지내는 시간이, 마치 루틴처럼 정해져 있는 그 시간이 잠시 떨어져 있던 도쿄와의 거리를 쓰윽 가깝게 만든다. 일종의 전야제와 비슷하다고 할까. 이제부터 시작될 여정의 숨 고르는 시간이라도 해도 좋겠다.

드디어 열차가 움직이면 하늘을 날기 전에 보았던 도시와 비슷한 듯 다른, 산과 밭과 강이 펼쳐지는 풍경을 지나 점점 집이 보이고 상가가 보이고 빌딩이 보이고 스카이트리가 보이고 도쿄의 한가운데를 향해 달려가면 '아, 다시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과 '이번에는 어떤 도쿄의 모습과 만날까' 하는 설렘이 마음속에서 서로 밀치며 자리를 차지한다. 가끔은 안도감이 이길 때도 있고 가끔은 설렘이 이길 때도 있지만, 그동안 잠시 잊고 있던 감정들이 나리타 익스프레스 안에서는 자주 피어오른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흘러 다른 플랫폼보다 사람이 적은 나리타 익스프레스의 플랫폼에 서면 내가 서 있는 세계와 다른 이들이 서 있는 세계가 서로 맞닿을 수 없이 떨어져 있는 듯해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기다린다. 그리고 다시 열차에 올라 높은 사각형 빌딩들을 지나 스카이트리를 바라보고 커다란 강을 건너고 자연이 점점 많아지는 모습을 보며 올 때와는 반대의 기분으로 공항으로 향한다. 그리고 마지막 아쉬움으로 남겨둔 라멘을 공항에서 먹은 뒤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이용하게 된 것은 도쿄에 드나들면서부터이니 꽤 오래되었다. 나리타공항으로 가는 항공편이 쌌기도 했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왕복티켓과 교통 카드인 스이카를 세트로 묶어 저렴하게 판매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이 세트에 포함된 스이카 카드의 문양이 일본을 상징하는 이미지일 때가 많아 여행을 갈 때마다 스이카 카드가 있는데도 꼭 세트로 구립해 사모으곤 했다. 그렇게 모은 카드가 언젠가 보니 열 장이 훌쩍 넘어서 도쿄 여행을 갔을 때 일부 중복되는 카드는 보증금을 환급받았고 지금도 두세 장은 작은 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사실 몇 번은 열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아까워 비싸도 김포 하네다 구간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도쿄에 도착해도, 여행을 시작해도 무언가 허전했다. 시간은 분명 벌었지만, 뭔가 하나를 빼놓은 듯한, 여행이 잘 굴러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리타 익스프레스로 돌아왔다.


나리타 익스프레스 안에서 보는 세상은, 일본은, 도쿄는 참 다채롭다. 다양한 나라의 사람이 모두 저마다의 목적을 지니고 하나의 열차로 한 곳을 향해 달려가다 목적지의 역에 다다르면 저마다의 길로 흩어진다. 나를 포함해 그들을 볼 때마다 어떤 생활을 하다 잠시로 이곳에 온 것일까.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 다른 삶의 모양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쿄 사람들의 제각각 다른 모습에서도 모두 다 다름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냥 스쳐가는 무수히 많은 익명으로 존재했던 그들에게 수많은 얼굴이 있음을 목격한다. 나를 둘러싼 세상 안에서 복작복작 지내며 미시적으로 모든 일을 바라보다 보면 지금 나에게 당장 닥친 일, 눈앞에 있는 것밖에 보이지 않게 되는데 열차 안에서 한 발짝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나리타 익스프레스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세상이 제대로 분명하게 그곳에 존재한다고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내가 발 붙이고 있는 세상은 비슷한 기준과 잣대를 늘 들이대지만, 결국 그 안에 있는 우리는 각자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살아가도 된다고 말해 주는 듯하다. 내가 나이면서 잠시 나로부터 떨어져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도쿄에서 지내던 무렵의 나리타 익스프레스는 물리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집으로 향하게 하는 열차였다. 도쿄에서 생활하다 문득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우연히 발견하면 향수병이라는 게 별로 없었던 나도 저걸 타면 한국으로 갈 수 있지, 하는 생각에 아련해지곤 했다. 그리고 눈으로 열차를 보내고 뒤로 돌아서는 발걸음에서는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나라에서 조금 더 힘내보자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도쿄를 떠나오던 마지막 날에는 함께 살던 일본인 친구와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탔다. 나를 배웅하기 위해 회사를 쉰 친구와 나리타 익스프레스에 올라 한 시간 남짓 시간을 보내며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사실 잘 떠오르지 않지만, 울지 않으려고 애써 웃음을 보였던 두 사람의 모습이 아직도 그 열차 안에 둥둥 떠 있는 듯하다.


나리타 익스프레스는 넥스라는 이름으로 보통 불리지만, 나는 이상하게 넥스보다는 나리타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이 더 좋다. 짧게 스쳐가지 않고 길게 오래 입안에 머무는 이름. 너무 세련되지 않고 적당히 직관적인 이름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다. 늘 한산한 나리타 익스프레스의 플랫폼에서 다른 플랫폼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한다. 한산한 플랫폼에서 내려 복잡한 플랫폼으로 나아가며 시작하고, 복잡한 플랫폼에서 한산한 플랫폼으로 돌아와 끝을 맺는 그 시간에는 늘 이 열차가 있다.


'자기가 사는 집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일정한 공간.' 동네의 우리말 뜻이다. 나리타 익스프레스에서 보내는 시간을 내가 그곳에서 사는 시간, 공간이라고 한다면 이 열차도 나에게는 하나의 동네다. 비록 아주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나는 얼마나 많이 이 열차를 타게 될까. 되도록 자주 타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은 늘 있으니 매번 손꼽아 기다린다. 처음 나리타 익스프레스에 오르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쌓아온 횟수만큼 멀리 왔고 또 그만큼 나이도 들었지만, 그 열차 안에서 지내는 시간은 단순한 탈것의 수준을 넘어섰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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