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건사고에도 얻는 것은 있다

매일의 글쓰기 25

by kotobadesign

한동안 마감에 전전긍긍하다가 오랜만에 맞는 편안한 일요일.

눈은 일찍 떴지만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 다른 때보다 조금 느지막이 일어났다.

3일 동안 집콕만 했더니 햇빛이 너무 고파 간단히 바나나로 배를 채우고 아침 산책을 하러 나갔다.

오랜만의 산책로라 얼마 전에 본 노랗고 빨간 가을의 나무들이 겨울의 나무들로 바뀐 것을 보며 세상은 어지러워도 시간과 계절은 제때제때 흐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불광천에는 청둥오리가 많이 보였고 유유자적 물살을 가르며 털을 고르는 모습이 다른 때보다 편안해 보여 내 기분도 덩달아 편안해졌다. 이후에 일어날 사건은 전혀 상상도 못한 채......




오랜만의 편안한 산책에서 돌아와 평소 때처럼 도어록의 번호를 눌렀다.

삐삐삐 별표, 띠릭띠릭 응? 문은 열리지 않고 오류가 났다는 소리만 복도에 청아하게 울렸다.

뭐지? 이상한데. 내가 번호를 잘못 눌렀나? 하지만 몇 번이나 번호를 눌러도 열리지 않았다.

내가 잠시 기억 상실로 번호 바꾼 걸 잊었나? 다른 번호도 눌러보았지만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최근에 번호를 바꾼 적이 없었으니 눌러도 열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너무 당황해 땀이 삐질삐질 나오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1층에 있는 관리실에 가봤지만 도어록에 있는 번호로 연락해보라는 말뿐 해결책은 없었다. 그러다 도어록 건전지가 방전되었을 때 9v 건전지를 대고 번호를 누르면 문이 열린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어 내려간 김에 편의점에서 건전지를 사서 다시 올라갔다. 건전지를 비상 전원 부분에 끼우고 다시 시도. 하지만 실패. 몇 번을 시도하다가 결국 문이 열리지 않아 도어록에 쓰여있는 A/S 번호로 연락했다. 상담원분이 하라는 대로 가스 검침으로 오신 분한테 볼펜을 빌려 리셋 버튼도 눌러보고 다 했는데 다 실패. 결국 A/S 센터에서 30분-1시간 안에 도착할 거라며 기사님을 연결해 줬다.


하아, 산책 잘 하고 와서 이게 무슨 일이지. 난생처음 겪는 일. 30분 정도 지났을까 기사님이 도착해 도어록에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국 문은 열리지 않아 새 도어록으로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기사님은 정확하지 않지만 회로 이상이 원인인 것 같다며 이 모델이 장점이 많은데 고장이 잦아 지금은 단종되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일단 교체를 부탁드리고 집주인에게 연락했다. 이러저러해서 도어록을 교체해야 할 것 같다고. 집주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부동산 사장님과 전화해보고 다시 연락주겠다며 일단 끊었다가 잠시 후에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교체하고 비용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조심조심 좀 쓰지 그랬냐며 한 소리를 덧붙였다. 장사하는 사람이라 요즘 힘들다면서. 내가 도어록을 함부로 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번호 누르고 들어오고 나가는 것밖에 더 있나. 그리고 요즘 안 힘든 사람이 있나. 삐죽삐죽. 그런데 뭐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20만 원이라는 거금이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집주인 마음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별말 없이 교체하고 비용 청구하라고 하는 게 어딘가. SNS에서 본 글에 등장하는 집주인들은 정말 못되기가 하늘을 찔렀는데.

집주인은 고맙게도 영수증과 계좌번호를 보내주니 바로 기사님에게 입금까지 해주었고 나중에 나에게는 고생했다는 메시지도 보내주었다.




도어록 교체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분 만에 문에는 비닐로 뒤덮인 새로운 도어록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집에서 나온 지 벌써 2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산책 시간 포함해)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했고 오늘 산책하며 떠올린 글감은 그 사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데다 아침 시간을 이렇게 버려 속상했다.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이런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런 별일은 과거에도 분명 많았을 것이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 분명한 그런 일들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

예전에 엄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 아니고 일단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대부분의 일은 큰일이 아니니 너무 속 끓이지 마.'

돈도 돈 나름일 것이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 이 말이 생각난다. 오늘 일은 그 몇 시간 동안 마음 졸이고 동동거리기는 했어도 어쨌든 돈과 시간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큰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잃어버린 글감 대신 이렇게 글로 쓰고 있으니 내 인생의 잊지 못할 오늘의 사건사고가 될 것은 분명하다.


그나저나 산책하면서 혼자 불광천을 유유히 헤엄치면서도 뭔가 불안해 보이던 아기 청둥오리를 발견했는데 그 아기는 가족을 만났을까. 아직도 괜히 눈에 밟힌다. 무사히 가족과 따뜻한 일요일을 보내고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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