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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부엉씨 May 24. 2022

그럼에도 간송은 간송이다

간송미술관 보화수보 전시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39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이다. 귀하고, 유명하고, 중요한 소장품이 엄청 많은 데에 비해 일 년에 한정적인 시간만 전시를 여는 까닭에 '은둔의 미술관'이라는 별명도 있다.


그런 간송미술관에서 7년 만에 전시가 열렸다. 그 사이 DDP에서 전시를 열기는 했기 때문에 간송의 소장품이 공개된 것으로 따지면 마지막 전시 이후 4년 정도 지났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2014년에 DDP에서 열린 전시를 본 적이 있고 놀랍게도 블로그에 포스팅이 남아있다. 8년 년 전인데 글 쓰는 게 지금이랑 비슷해서 놀랐다. 좀 더 오그라드는 느낌이긴 하네... 그땐 열정이 과했어...

아무튼, 이번 전시를 마치면 간송미술관의 보화각(건물 이름)이 보수, 보존 공사에 들어간다. 지금 예정상으로는 2023년 하반기 보수공사를 끝내고 2024년부터 다시 전시를 열기 시작할 것이라 하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2년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 셈이다.

전시는 6월 5일까지 진행되며 무료다. 다만, 간송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을 해야만 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관람객을 받고 있으며 한 타임에 100명 정도 받는 듯하다. 특히 오전 11시(2회차)에는 전시 사전 설명 세션을 위한 티켓을 따로 예약받고 있으니 노려볼만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실패... 예매 인원수가 20명 정도인가로 매우 적다.

과거에는 이 길을 따라 전시를 보려고 찾아온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다고 한다. 줄 서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내 입장에서는 온라인 예매가 좀 힘들긴 해도 나쁘지만은 않은 듯... 

다른 한편으로는 인터넷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거의 관람 기회를 박탈당하다시피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번이 좀 특별한 경우인 것으로 보이고 재개관 할 때는 이런 점도 고려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얘기한 대로 다른 관람객들이 많든지 적든지 일단 그냥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 있는 다른 박물관과는 달리 평소 찾기가 쉽지 않은 면도 있고, 우리 문화유산 보호에 있어서 간송 전형필 선생의 업적이 가히 신화적이라고 할만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뭔가 성지순례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 평소보다 더 설렜다.

입구 쪽에는 돌로 된 문화유산들이 서너 개 놓여 있다. 간송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것들이라 열심히 찍었다 ^^... 가장 오른쪽 사진의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의 마모가 심해서 표정을 잘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펑퍼짐하고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생김새에서 국중박 불교조각실의 석조 불두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주차장 옆쪽에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흉상과 비가 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아주 재산이 많았던 분인데, 그 재산을 우리 문화유산 수호를 위해 아낌없이 쓰신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당시 외세에 의한 우리 문화유산 수탈이 상당히 심했던 터라 간송의 활약은 일종의 독립운동으로 칭송받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그런 안목과 과단성을 가질 수 있는지가 가장 궁금하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고 하면 '혹시 가짜는 아닐까', '이 값 주고 사는 게 맞나'하는 의구심에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가치 있는 물건을 알아보고 팍팍 구입하실 수 있었을까...?

간송미술관의 본관이라고 할 수 있는 보화각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모더니즘 양식 건물로 건물 자체도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다만 낡아도 너무 낡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뭐 사정이 있고 간송미술관 쪽에 막 따지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은 이해를 하지만... 문화는 옛 것이 좋다고 해도 실용은 무조건 새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아무튼 뭐 이번 전시 끝나면 공사를 한다고 하니... 제발 공사가 잘 돼서 멋지게 탈바꿈했으면 좋겠다.

한 30분 정도 일찍 간 김에 여기저기 돌아봤다. 성북동이 역시 운치는 있더라.

나는 첫 회차(오전 10시)로 예매를 했다. 10시가 딱 되면 보화각 문이 열리고, 입구에서 예매 내역을 확인한 후 들어갈 수 있다. 1층 전시실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 사진을 정말 못 찍지만 블로거로서 전시 볼 때마다 사진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아예 촬영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니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입구까지는 찍을 수 있음. 이번 전시 제목(보화수보: 빛나는 보배를 수리하고 보존하다)의 뜻 등이 적혀 있다. 요약하자면, 간송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던 소장품 중 상태가 안 좋아서 수리 및 보존처리를 한 작품들을 내놓았다는 것.

1층 전시는 "매헌선생문집"으로 시작한다. 전시실에 딱 들어갔을 때 왼편에 있다. 좁은 전시실에 사람이 워낙 붐비다 보니 들어오자마자 오른쪽이나 가운데 쇼케이스로 향하는 등 관람 동선이 자유분방해지는 경우가 있으나 왼쪽부터 시대순으로 배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매헌선생문집"부터 보는 것이 정석이라고 한다.

이후에는 모두 그림이다. 장승업, 김홍도, 강희안, 안견, 심사정 등 하나같이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만한 대가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어차피 사진도 못 찍는 김에 전시품 하나하나를 짚어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고, 대신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몇 가지 꼽는다면 김홍도의 "낭원투도", 심사정의 "삼일포", 정선의 "송림한선"이었다.

기념으로 사 온 그림: 심사정 "삼일포"(왼쪽), 정선 "송림한선"(오른쪽)

"삼일포"는 이번 전시를 본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작은 구멍들이 사실은 벌레가 갉아먹은 자국인데, 모양이 동그랗고 하얗다 보니 이게 마치 눈 오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눈 내리는 삼일포"라고 부르기도 하며, 간송 측에서도 저 부분은 의도적으로 보수하지 않았다.

"송림한선"은 진짜 매미를 너무 잘 그려서 놀라운 게 가장 컸다. 보통 매미 하면 여름을 떠올리지만, 그림 제목을 보면 이 매미는 한선(寒蟬), 즉 가을 매미다. 그리고 그냥 '잘 따라 그린' 것 같다는 느낌을 넘어 나름 운치가 있고 생동감도 있어서 더 좋았다. 가느다란 가지에 매달린 모습이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의외로 여유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뭔가 내 모습이 투영되기도 했다. 매미는 뭐 좋은 뜻을 가진 곤충이라고 하니 사두면 나쁠 것 없겠지.

김홍도의 "낭원투도"는 그림을 못 샀다. 다른 것들이 1만 원에 이었던 것에 비해 장당 2만 원이라는 가격이 좀 부담스러웠고, 무엇보다 크기가 너무 컸다. 작품 자체는 가장 좋았던 것 중 하나다. 불교나 도교 관련 인물을 그린 도석화의 일종으로 삼천갑자 동방삭이 등장하기 때문에 선물용으로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 5만 원권 앞면 도안에 활용된 신사임당의 "포도"도 재밌는 작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거 그림 사 왔으면 뭔가 돈이 잘 들어왔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 아쉬운 결정이었다.

2층부터는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 보화각에 대한 설명과 계단 사진.

2층에는 특별히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지는 않고 비어 있는 쇼케이스만 있다.

박물관에 와서 이렇게 텅 빈 쇼케이스를 보는 모습이 어떻게 생각하면 좀 허무한 일일 수도 있지만 간송미술관, 보화각 자체가 하나의 전시품이자 우리나라 문화계의 보물이라는 점에서 접근하면 의미를 찾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쇼케이스도 1930년대에 중국 장인이 만든 것이라고 하니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 다만 보화각 외관을 봤을 때도 느낀 점이지만, 진작 좀 현대화를 해두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은 분명히 있다.

2층 안내하시던 분이 참 친절하시더라. 관람객의 질문에도 충실하게 대답해 주실 뿐만 아니라 혼자 오신 분들의 경우 사진도 찍어주셨다. 사실 어느 전시를 가든 스태프 한 분 한 분 지식과 열정을 갖추고 계시다는 느낌을 못 느낀 것은 아니지만 간송에 와서 이러니까 괜히 '근본 있는 곳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저 바닥은 나 학교 다닐 때 많이 보던 모양이다. 빨간 밀대로 왁스 칠해야 할 것처럼 생김.

다 보고 나왔다. 보화각 건너편에 그림을 살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위에서 말한 그림을 샀다.

솔직히 전시를 보기 전에는 간송미술관을 약간 못마땅하게 본 면도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 간송의 소장품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고 간송컬렉션의 형성이나 관리가 오롯이 간송 전형필 선생을 비롯한 간송가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전시를 볼 수 있다는 것도 그 덕이라는 점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유산의 공공성을 생각해 보면 간송미술관이 좀 더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운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소장품을 연달아 경매에 내놓는다거나 NFT를 활용하는 듯한 모습은 참 보기가 좀 그랬다. 그렇다고 아주 국가 지원을 안 받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이런 의구심에서 비롯된 삐딱한 시선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전시는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한 간송미술관의 해명이나 항변 같은 느낌도 든다. 문화재를 연구하고 보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어쩌면 그것을 구입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금 더 신뢰를 갖고 지켜봐 달라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

세상 일이 쉽지가 않다. 어느 한쪽이 무조건 맞다고 할 수도,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만큼 책임 있는 분들이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립되는 의견들 사이에서 절충안을 찾아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내년 하반기 개관을 앞두고 있다고 하는 대구 간송미술관이 그 첫 번째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고 보니 간송 입장에서는 내년이 되게 중요한 한 해가 되겠네.

모쪼록 간송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 이름이 지켜낸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 빛을 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러모로 볼거리도 생각할 거리도 많은 성북동 나들이. 다녀오고 나서 찾아보니 주변에 맛집이 많았는데 뭐가 그리 바쁜지 서둘러 빠져나왔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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