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로 이사 온 지 3년이 넘었다. 어느 곳이든지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처럼 조금씩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김포는 대한민국에서 인구가 가장 빨리 유입되는 도시 중 하나이기에 김포 지하철 골드라인은 악명 높은 지옥철이다. JTBC 뉴스는 김포 경전철이 이태원 핼러윈 사고처럼 압사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를 했다. 난 깔리는 것보다 성추행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에 불안해한다. 많은 사람이 승차하기에 내 몸통에 붙어 있는 양손은 의지와 상관없이 여성의 궁둥이에 붙을 수도 있고 덩치 좋은 남자의 등판에 끼어 고통을 호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 돈이 부족해 서울에 집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김포로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사우동은 몇 가지 살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내 방 창문에서 바라본 하늘
첫째는 내 집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기에 하늘만은 온전히 내 것이다. 책상에 앉아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박두진의 시처럼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하늘을 마시면 내 마음이 익는 것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 특히 가을은 마음이 익기에 좋은 계절이다.
두 번째는 집에서 10m만 나가면 둘레길이다 봄에 그 길을 걸으면 연두색으로 피어나는 새순을 볼 수 있고, 홀로 피어난 진달래의 분홍색 꽃을 보며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여름에는 활엽수들이 하늘을 덮는 푸르름 때문에 바람 소리를 들으며 벤치에 앉아 텀블러에 담긴 냉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가을은 활엽수들이기에 오색의 단풍은 아니라 할지라도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한 줄의 글로 남길 수 있다. 겨울은 추워 안 나가기에 모르겠는데 동계에는 방콕이 최고다. ㅎㅎ
장릉의 모습
3번째는 장릉이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장릉은 신축되는 아파트가 조망권을 훼손했다며 문화재청이 소송을 했지만, 재판에서 지고 말았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 구 씨가 안장된 2개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김포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릉이다. 여유가 있다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살고 싶은 것이 꿈이지만 현실을 알만한 나이이기에 김포에서의 삶으로 만족한다.
홀로 점심을 빵빵하게 먹고(거창한 메뉴가 아니라 비비고 만두 한 봉을 다 먹었으니 ㅠ) 갈등한다.
가을 햇살을 맞으며 장릉을 걸을까? 영화 한 편을 보며 방콕을 할까?
5분 정도 갈등하다가 결정했다. 카메라 챙겨서 장릉으로 가자. 집 밖을 나서는 순간 파란 하늘이 보이고 양편으로는 절정기에 오른 단풍들이 바람에 날리며 예쁨을 뽐내고 있다. 거기에 팽그르르 돌며 떨어지는 단풍잎(카메라에 담으려고 애를 썼지만 나보다 빠르네. 포기 ㅠ) 15분 걸어서 장릉에 도착했는데 평일인데도 주차장에 차가 가득하다. 역시 가을은 누구에게나 방구석을 나오도록 유혹하는 모양이다. 입장료가 1,000원이지만 늙음이 좋은 것은 민증만 보여주면 무료입장이다.
장릉의 단풍
장릉은 왕릉답게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사진 찍으며 천천히 걸으면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단풍으로 예쁘게 물들어 있다. 그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연신 셔터를 눌렀지만, 요즘은 핸드폰의 성능이 더 좋기에 DSLR 카메라가 별 도움이 안 된다. 숲길도 좋지만, 또 하나의 볼거리는 이곳에 있는 저수지다. 원앙새가 서식한다는 것을 작년 가을에 알았기에 이곳에 오면 항상 벤치에 앉아 그 새들의 날갯짓을 바라보며 마음이 쉼을 얻는다. 아쉬운 것은 줌으로 당겨도, 핸드폰으로 땅겨도 원앙새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없는 데 있다. 이때 탱크 포신처럼 길게 뽑힌 망원렌즈를 가지고 보란 듯이 셔터를 누르는 할아버지가 보이는데 멋지다. 분명 내 나이 또래다.
장릉의 원앙새
”100미리 렌즈로 애쓰고 있는 나를 보며 저 할아버지 무슨 생각 할까?“ 약간의 열등감이 밀려온다. ㅠ
올봄인가? 오원 작가의 ’걷는 생각들’을 읽으며 산책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알았다.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운동이고, 수련이며, 누군가에게는 영감의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사유하는 시간이었다. 자신만의 산책을 즐기자.‘
자신에게 산책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걷기로 운동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기에, 바람이 있다면 영감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연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것을 기록하고 싶다. 문제는 사고의 깊이가 쉽게 생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가오는 유혹이 있다.
”이 나이에 뭘 하겠다고, 편하게 살지?“
뭘 하겠다는 생각은 없고 단지 산책을 통해 내 삶이 편했으면 좋겠다. 뭘 바라지 않고 꾸준히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