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떠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내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느낌이 있거나 풀리지 않는 무엇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이 있을 때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한다. 요즘 뚜벅이 걸음으로 서울을 걷는 원인도 허전한 마음에 있다. 그렇다고 누구를 불러 내서
“나 요즘 사는 게 재미없고 허전해”
라고 말할 용기도 없기에 가벼운 백팩 속에 텀블러에 담아놓은 원두커피, 크래커 하나, 귤 몇 개와 이어폰, 태블릿PC를 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홀로 종로구 일대를 걷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창덕궁, 경복궁, 서촌, 북촌, 인왕산 등 서울은 걷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멋진 도시인데 오늘은 부암동을 걷기로 했다.
이 동네는 영화 ’슬로우비디오’에서 본 부암동의 가을 풍경이 너무 예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미리 유튜브에서 갈 곳을 검색했다.
1) 청운문학도서관 (구경하고 창가에 있는 책상에 앉아 우아하게 이북으로 책 읽어야지), 2) 석파정 서울미술관(입장료가 1만 5천 원이라 비싼 감은 있지만, 문화인이 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3) 윤동주 문학관(영화 동주에서 보았던 아프고 슬픈 동주의 모습을 상기하며 일본노무시키 욕도 해야지) 4) 수성동 계곡 (겸재 정선이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의 모습 속에 있던 수성동의 모습을 그리며 막걸리 한잔 ㅎㅎ)
“이 4곳을 꼭 들려 천천히 여유롭게 걸으며 가을을 즐기자”
란 야심 찬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나이키 모자까지 쓰고 9시에 출발했다. 경복궁에서 버스를 타면 편할 수 있지만, 뚜벅이 걸음이 좋아 경복궁에서 청와대를 거쳐 부암동으로 가는 걷는 코스를 정했다. 카카오 앱을 보니까 약 50분 정도 소요될 것 같다. 핸드폰 바탕화면에 오늘 날씨는 맑고 기온은 9C라고 표기되어있다. 쌀쌀한 바람이 불지만, 햇살이 좋아 춥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삼청동을 지나 청와대 앞까지 왔는데 오늘도 관광버스가 줄로 서 있다. 대통령이 청와대 나온 것에 대해 비판적이기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는 모습이 못마땅하다.
“청와대 구경이 아니라 사람 구경이네, 뭐가 좋다고”
드디어 자하문 터널 앞까지 왔고, 카카오 앱은 청문문학도서관이 근처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 왔구나!” 라며 자하문 터널을 지나는데 방향이 이상하다. “아닌데”란 생각에 뒤돌아서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 살펴보니까 우측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언덕길을 씩씩거리며 오르는데 스물스물 찾아오는 불길한 생각
“오늘 월요일인데 쉬는 날 아닌가?” “도서관은 주중에 쉬잖아”
라며 자신을 안심시켰는데 한참 꼭대기에 그림 같은 한옥이 보인다. “멋지네!!” 주변 환경이 책 읽기에 정말 좋다. 미니 폭포, 장미를 비롯한 몇 가지의 꽃들, 단풍나무, 파란 하늘, 선선한 바람 등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으나 너무 조용하다. 웬 아저씨 혼자 창살 보수하는 모습만 보인다. 급 불안 ㅠㅠ 아니나 다를까?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눈에 훤하게 들어오는 친절한 안내문 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하며 인왕산 둘레길로 들어서서 조용한 벤치에 앉아 텀블러를 꺼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눈앞에 아카시아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는데 아직 초록색이다. 바람이 불면 부는 쪽으로, 잠잠하면 조용히 햇살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여유로움은 이런 거야”라며 뽐내는 것 같다. 동행인이 있었으면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우리 모습 같아”라며 수작도 부렸을 테지만 혼자니까 미소만 짓는다. 크래커를 입에 넣을 때 떠오르는 생각
“그렇다면 나머지 다른 곳도 다 휴관?”
가장 가까이 있는 윤동주 문학관으로 향했는데 역시나 “오늘은 문 안 열어줍니다” ㅠㅠ
석파정은 가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수성동계곡으로 향했다. 통인시장까지 내려와 점심을 먹고 약간 언덕진 길을 올랐더니 반가운 버스가 보인다. 영화 ’슬로우비디오‘에 나왔던 9번 버스다. 아직도 버스가 그 모습 그대로 운행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
수성동계곡은 그전에도 그랬지만 철창으로 막아 놓았기에 들어갈 수 없다. 겸재의 나이 76세 때인 1751년(영조 27년)에 그렸다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중 수성동계곡은 비 온 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한여름 장마 때는 계곡물이 넘쳐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란 상상을 해본다. 비록 휴관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느낌이 있거나 풀리지 않는 무엇 때문에 마음에 근심이 있을 때‘ 찾고 싶은 곳이 인왕산이고 부암동이다.
꼭 꼬집어 “너하고 같이 걸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나는 친구는 없어도 누가 나에게 “다음엔 같이 걷자” 라는 친구 있으면 절대 환영이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외로움도 깊어진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