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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Apr 10. 2023

또 다른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이 찾아오기를

영화 '봄날은 간다' 리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아련함 때문에 마음은 아직도 깊은 슬픔에 허우적거린다. 관객들도 하나둘 자리를 일어설 때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면서 김윤아의 맑지만, 애조 띤 노래가 사랑의 아픔을 총정리한다. ‘봄날은 간다.’는 자우림의 1집 앨범 ‘Shadow of Your Smile’에 수록된 곡이지만 음악 감독 조성우는 이 노래를 영화의 엔딩 곡으로 사용해 관객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영화관을 나오는 관객들의 귓전에는 이 노래가 메아리로 퍼지며 영화의 여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본 영화지만 영화의 엔딩 장면은 아직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 중에서



아직도 눈을 감으면 마음이 저려오는 사랑의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행복하지 않을까?

비록 자신의 사랑이 무심히 떨어지는 꽃잎처럼 져버렸지만, 아직도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는 까닭은 상우의 고백처럼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 순수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 소리를 따기 위하여 녹음기사인 상우(유지태)와 지방 방송사의 심야 DJ인 은수(이영애)가 만난다. 남자는 순수하고 여자는 직설적이고 피곤함에 찌들어 있는 모습이다. 사랑은 언제나 두 사람이 만날 때 이루어진다.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기 위하여 대나무 숲과 풍경소리가 예쁜 산사, 순박함이 남아있는 시골의 어르신들을 만나며 두 사람은 함께 웃으며 마음을 열어간다. 밤늦은 시간 은수가 일하는 방송국의 창가로 겨울비가 내린다. 술과 비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은수도 상우에게 전화를 한다. 물론 일이란 핑계를 복선으로 깐다. 전화를 받은 상우는 잠들 수가 없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던진다. 사랑은 한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면 그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다.



산사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며 작업한 두 사람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은수의 집 앞에서 헤어진다. 아직 서로의 마음을 모르기에 이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지만 상우는 웃으며 은수에게 이별의 악수를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은수를 배웅하고 차가 출발하려 할 때 다시 문이 열리며 은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라면 먹을래요?”라며 자연스럽게 그를 집안으로 부른다. 여자의 집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리 정돈이 안 된 집에 상우가 들어온다.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는 건조하다. 은수는 상우에게 묻는다. “자고 갈래요?” 그녀는 어려운 이야기를 너무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는 매력이 있다. 상우가 웃는다. 갈증으로 잠이 깬 상우는 방에서 자는 은수를 발견하고 그녀의 옆에 눕는다. 자연스럽게 키스가 시작되고 두 사람의 사랑도 초콜릿처럼 달콤해진다.

허진호의 사랑은 꾸밈이나 과장이 없다. 주인공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사랑도 누구나 한 번쯤은 다 경험한 것들이기에 영화를 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을 추억할 수 있다. 주인공과 관객들이 쉽게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에 공감대가 있는 것이 허진호 감독의 영화가 주는 매력이다. “나도 저런 사랑을 해 봤는데…….ㅋㅋ“ 그중의 하나. 녹음실의 동료들은 상우가 연애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어느 날 회식 자리를 몰래 빠져나온 상우는 은수와 통화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술에 취할 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나도 보고 싶어요! 은수 씨? “ 

'보고 싶다는 것’ 사랑이 가지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기에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초창기의 사랑은 감정의 격랑이다. 이 격랑의 파도가 셀수록 사랑은 아름다운 추억들을 양산해 간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떠오르는 사랑의 모습은 다 이 시간대의 기억들이다. 이때가 봄날이다. 사랑도 살아있는 생명체이기에 시작과 소멸이 있다. 사랑은 아름답게 시작이 된다.



상우는 그리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간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은수는 집을 나와 상우를 기다린다. 그때 그녀 앞을 스쳐 가는 택시 한 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 앞에 상우가 서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이다. 서로를 끌어안으며 사랑이 확인된다. “좋다!” 상우의 이 한마디에 그들의 사랑이 들어있다. 이 장면에서 미소를 짓는다. 누구에게나 저런 사랑의 장면들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의 소리를 채집하기 위하여 두 사람은 어느 개울가에서 ‘사랑의 기쁨’을 연주하는 고등학생 브라스 밴드를 만난다. 두 손을 잡고 다정스럽게 징검다리를 건너는 두 사람에게 지금은 사랑의 기쁨만이 있다. 그러나 강물 소리를 채집하는 상우를 멀리한 채 먼 곳을 응시하며 ‘사랑의 기쁨’을 콧소리로 흥얼거리는 은수에게 어쩜 사랑의 기쁨보다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란 가사가 더 마음에 와닿는 것 같다. 그녀의 뒷모습은 쓸쓸하고 아픔이 배어 있다. 정말 은수는 자신이 이혼녀라는 사실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다. 벌써 두 사람에게도 사랑의 슬픔을 노래할 시간이 찾아왔다.

바닷가의 파도 소리를 채집하러 떠났을 때 상우는 아버지가 즐겨 부르는 ‘미워도 다시 한번’을 노래하며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고’ 상우에게 사랑은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생명을 다 바쳐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수는 그렇지 못하다. 어떤 사랑을 했는지 왜? 이혼했는지 모르는 그녀에게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슬픔만 영원할 뿐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상우의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러나 은수도 그 사랑 때문에 괴로워한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그녀가 상우 앞에서 운다. “힘들구나! 울지 마” 상우는 죽어도 우리의 사랑 때문에 힘들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한다. 왜? 사랑은 결단코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에게도 사랑의 기쁨은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아있는 시간이 찾아온다. 아마 이별을 경험한 관객들은 어쩜 나의 사랑을 100%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상우의 실연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성은 냉철한 판단을 요구하지만, 마음은 아직도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은 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모든 사람에게는 너무 친근한 장면이다. 특히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있는 은수가 사들인 새 차에 길게 스크래치를 내는 상우를 보며 공감대를 이루는 것은 “너도 한번 고통을 당해 보라”는 상우의 마음을 읽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한 두 사람이 헤어졌을 때 어떻게 일방적으로 한 사람만 상처를 입을까?

은수도 상우 못지않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단지 영화 속에서 적게 표현될 뿐이다. 상우의 상처가 아물 때 은수는 비로소 상우가 소중한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처음 만났을 때 상우는 손가락을 찔려 피를 흘리는 은수에게 심장보다 높게 손을 들고 흔들라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혼자 책상에 앉아 한 손을 들고 있는 자신을 보며 은수는 상우를 떠올린다. 벚꽃이 만발한 봄날의 아침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은수는 어색하게 웃고 상우는 “잘 지내지?”라며 형식적인 인사를 한다. 은수가 활짝 웃는다.



“하나도 안 변했네?”
“기억나?”
“뭐가?”
“그냥”


아마 은수는 두 사람이 공유했던 사랑의 기억에 관해서 물었을 것이다. 지나간 사랑은 더 아름답게 윤색되지 않는가? 그러기에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니 아름답지 못한 것이 더 많았지만,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사랑을 미화하고 싶다. 그래서 지나간 사랑은 신화처럼 영원히 남아있기 마련이다.

은수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 어쩜 그녀는 자신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했던 과거의 사랑에서 벗어난 것 같다. 다시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싶다. 그러나 상우에게는 아직도 사랑의 기쁨보다는 슬픔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타이밍이다. 돌아선 상우의 모습보다 그를 바라보는 은수의 표정이 더 아파 보이는 것은 이제 그녀가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사랑의 슬픔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때 ‘사랑의 기쁨’이 어쿠스틱 기타의 조용한 선율로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상우를 나무란다.
“바보같이 다시 시작하지?”
상우보다 은수를 더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그녀에게 찾아온 두 번째 사랑의 아픔을 알기 때문이다.

은수는 사랑으로 인해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 상우는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믿었다. 자연에 4계절이 있는 것처럼,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것처럼 사랑도 봄에 시작되고 겨울에 소멸이 된다. 봄날이 가는 것처럼 사랑도 가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봄이 가면 다음 해에 봄이 또 오듯이 사랑도 가면 또 오지 않을까?

또 다른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이…….



배경음악은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입니다. 


https://youtu.be/3QYZnTxja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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