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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Apr 18. 2023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영화 '호우시절' 리뷰 

2000년에서 2010년 사이를 한국 멜로 영화의 전성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동감, 시월애, 파이란, 봄날은 간다. 연애소설, 클래식 등의 영화제목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는 만추의 느낌이 있다. 비바람을 동반한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면 나뭇잎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대지에 떨어지는 것처럼 허진호 감독이 만든 캐릭터들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조용히 소멸해 간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아프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는 사랑이 시작될 때 찾아온 죽음을 받아들이고,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는 믿었던 사랑이 떠남으로 아프고, '행복'의 윤희는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이 죽음을 재촉한다. 이렇게 그의 영화는 언제나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지만 자세히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겪는 아픔의 과정 속에는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아름다움이 허진호식 멜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다섯 번째 영화인데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 추천하고 싶다. 그 이유는 역시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이다. 허진호가 연출한 영화 속에는 당대의 톱스타들이 등장한다. 물론 그 당시에는 톱스타가 아니었지만 그의 영화에 출연함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은 그가 배우를 보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호우시절’ 이 영화의 매력도 남녀 주인공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우리나라의 남자 배우 가운데 외모로 가장 뛰어난 배우를 꼽으라면 정우성을 들고 싶을 정도로 이 영화 속에 그의 매력은 여자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부드러운 미소와 훤칠한 키 때문에 슈트가 잘 어울리고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잔잔하다. 개인적으론 외로움이 잔뜩 배어 있는 영상을 단독 컷으로 그를 보여 주었으면 여심을 더 홀리지 않았을까? 란 생각이 들 정도다.

여 주인공인 고원원은 정말 깨끗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꾸미지 않은 순수한 모습과 잘 어울리는 쇼트커트의 머리 그리고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쁜 그녀의 매력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전거를 탈 때 절정에 이른다. 멜로 영화는 반드시 남녀 주인공이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비주얼의 힘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마치 영화 속의 정우성이나 고원원이 되었다는 착각을 일으킬 때 영화 속의 사랑에 공감하며 감동하기 마련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호우시절‘(‘好雨時節)은 두보의 시 春夜喜雨 (춘야희우) 중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봄이오니 때맞춰 내리네! 에서 따온 것이다.


봄이 오면 때 맞춰 내리는 비는 농사에 큰 도움을 주기에 좋은 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도 때를 알고 찾아오기에 좋은 사랑 영원한 사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화는 이렇게 좋은 사랑이 찾아올 것이란 암시를 주며 시작이 된다. 우리나라의 대기업 두산인프라코어(노골적인 PPL 광고…….ㅎㅎ)의 건설 중장비 팀장인 동하(정우성)는 첫 중국 출장길에 오른다. 그는 중국 사천성에 있는 두보초당(시인 두보의 기념관)의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찍은 그림엽서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미국 유학시절 좋아했던 메이(고원원)가 보낸 것이다. 이 엽서를 아직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동하의 가슴속에는 좋은 봄에 내리는 좋은 비처럼 다시 찾아올 사랑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짧은 출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보초당을 찾아간다. 메이를 그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홀로 두보초당의 대나무 숲을 거닐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들은 목소리가 들린다. 메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관광가이드를 하고 있다. 우연한 만남, 아니 때가 되면 내리는 좋은 봄비처럼 가장 알맞은 시간에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다. 언제나 로맨스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사랑이 시작될 때 전개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은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사랑의 장면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서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동하는 메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마 네 머리는 기억 못 해도 네 입술은 기억할 걸” 


돌아서는 정우성의 표정이 너무 귀엽다^^


“좋아 키스해 봐, 네 말대로 입술이 기억하고 있다면 또 하는 건 어렵지 않잖아?” 


메이의 입술이 저돌적으로 다가온다. 메이의 표정이 깜찍하고 예쁘다. 순간 동하는 놀라 긴장하며 뒷걸음친다.



이렇게 두 사람의 가슴속에 좋은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너무 짧다. 이제 내일이면 동하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갑자기 내린 비로 인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두 사람. 내리는 비를 손으로 적시며 메이가 “호우시절이네, 두보의 시에 나오는 말이야,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뜻이야” 라며 웃는다. 정말 두 사람에게 이 비는 호우시절일까?

영화는 전개되는 과정에서 메이의 아픔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아픔을 받아줄 사람은 동하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애정신은 과장이 없고 슬픔도 극단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천천히, 잔잔히, 애잔하게 마치 봄비에 촉촉이 젖는 것처럼 그의 영화는 촉촉이 가슴속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랑, 어디선가 나도 해봤고 해 보고 싶은 사랑의 장면들이 영화 속에 가득 차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친근감이 있다. 미장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영화는 세밀하기 때문에 짜릿하거나 뭔가 극적인 사건을 기대하는 관객들에게는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언제나 보고 난 뒤 긴 여운이 남는다. 그만큼 그의 영화에 매료되었다는 증거다. 팔짱을 끼고 길거리를 지나는 연인들의 모습이 예뻐 보이고 자신에게 찾아왔던 사랑에 고마움을 느끼고 현재의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허진호 감독의 멜로가 관객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영화는 악한 사람이 없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인간의 사악함을 까발리는 영화도 필요하겠지만 왠지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한 한없는 긍정은 선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신뢰감에서 나온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중국지부장(김상호)의 눈치 없음과 착함,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두보초당의 부장 아저씨 그런 느낌을 충만히 갖게 해 준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참 깔끔하고 예쁜 영화, 좋은 영화라는 것이다.



순수한 로맨스 영화가 우리의 마음에 기여하는 것은 얼마나 큰 감정의 순화인가?
그들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는 것보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랑을 한다. 그러기에 허진호 감독의 로맨스는 삼각관계가 없다. 대부분의 영화는 극적인 전개를 하기 위해 3각 관계를 부각하지만 그는 언제나 두 사람의 사랑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 핵심은 과거의 상처다. 그러나 사랑은 그 상처를 싸매어 준다. 비록 그 사랑이 죽음이나 이별 같은 비극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그 사랑의 여운에 감동하는 것은 그들은 쟁취보다 양보, 희생, 헌신하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이다. 삶이 건조하고 아프다면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분노가 인다면 허진호 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예쁘고 착하고 선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 저렇게 예쁜 마음씨를 가진 사람도 있구나!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역시 예쁜 사랑을 하는구나! 이런 깨달음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채운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 때문에 내 가슴이 동화되는 것 이것이 허진호 멜로의 특징이다. 그러기에 그의 로맨스 영화를 좋아한다.


배경음악은

호우시절 중에서 조성빈의  "Falling Down"입니다. 

https://youtu.be/wI_9H-J-7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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