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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May 15. 2023

깊은 밤에 읽는 시집 한 권

시적 은유의 세계와 만나다

빡빡머리 중학교 시절 교회 청년부에 숙대 국문과를 다니던 예쁜 누나가 있었습니다. 우리 또래 아이들의 마음을 훔쳐갔기에 누나의 웃음 한 번에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어느 날 누나가 꽃봉투 하나를 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시야, 너도 좋아할 것 같아” 

가슴이 콩닥거리며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노란 꽃봉투를 열었더니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이 적혀 있었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푸르른 날 중에서 -

이제 그 누나의 이름도 잊어버렸고, 얼굴도 희미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이 시는 제 가슴속에 곱게 남아있습니다. 왜?일까요? ‘푸르른 날’이라는 시가 누나를 좋아했던 제 감정을 대신해 준 까닭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감정은 식었지만 이 시는 아직도 제 가슴속에 소중히 남아있는데 저는 이것을 문학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시대가 천박해진 이유는 순간적인 쾌락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삶을 성공한 것으로 착각하는 삶의 가벼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가슴속에 시 한 편 정도는 암송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사랑 이야기가 있어야 삶의 품위가 유지되는데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신적인 가치가 사라진 가슴속에 돈이라는 유물적인 가치가 지배하고 있기에 삶은 지쳐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을 기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낭만을 생각하고, 오색으로 물든 단풍잎을 보며 예쁘게 물들 내 인생을 생각하기에 가을이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가 주는 감동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인 네루다의 권유로 시를 쓰게 되는 주인공 마리오 로뽈로(마 찌면 뜨로이지 분)는 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영혼에 눈을 뜨고 순수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의 내면이 변화되는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보면서 얻은 감동에 만족할 것입니다.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는 그로부터 19년 전인 1952년 정치적인 이유로 본국인 칠레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당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던 이탈리아 정부는 나폴리 근처의 작고 아름다운 섬 칼라 디소토에 네루다의 망명처를 제공해 줍니다. 네루다가 전 세계에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섬은 졸지에 유명해졌고 엄청난 물량의 우편물이 도착하게 됩니다. 무위도식하던 마리오 로뽈로(마찌모 뜨로이지 분)는 네루다의 우편물만 배달하는 집배원으로 취직하지만,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마리오는 우편배달보다는 네루다 시인으로부터 시를 배워 마을 여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노총각 마리오는 네루다와의 만남을 통해 시적 은유의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이때 마리오는 자신이 흠모하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 베아뜨리체(마리아 그라지아 꾸치노따 분)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은유(시)의 힘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재미 가운데 하나는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마리오가 네루다를 만나 그의 내면이 내적으로 성숙해 가는 모습입니다. 처음 마리오를 만났을 때 네루다는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묻지만 마리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인 "베아트리체 루소"라는 답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후에는 파블로와의 추억이 담긴 녹음기를 들고 섬의 아름다운 전경인 칼라 디 소토의 파도, 절벽과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올리는 소리, 신부님이 치는 교회 종소리,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파블로 시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사랑하는 아내 베아트리체 배 속에 있는 아들 파블리토의 심장 소리를 녹음하게 됩니다. 마리오의 영혼이 자란 것입니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게 되었고 자신이 사는 이 섬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게 됩니다. 이렇게 시는 우리의 인생을 바꾸고 순수한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 줍니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로 시작되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이 님이 누구를 말하는가?”이라는 의문 때문입니다. 그 당시 국어 선생님은 이 님이 조국, 부처, 민족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전 열심히 적었고요. 시험문제로 출제가 된다면 조국이라는 답이 가장 무난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님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 될까요?” 가령 연애편지에 이 시를 인용한다 할지라도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정재찬 교수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가 선풍을 일으키며 많은 독자에게 시 읽은 즐거움을 준 것은 자신의 마음대로 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독(誤讀)의 즐거움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죠?

문학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통해 느끼고, 아름다운 삶에 눈뜨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희 세대는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대로 적고 암송하고 시험문제에 출제되면 정답을 찾기에 바빴기에 시를 감상하는 즐거움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이 책의 부제처럼 공대생이라면 시와는 거의 담을 쌓고 지낸다고 할 수 있는데 정재찬 교수는 이성주의자인 공대생들에게 시 읽는 즐거움을 퓨전 음식처럼 만들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를 이성적인 판단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동원해 자신의 감성을 예쁘게 물들이는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한 편의 연애 시를 읽었다면 누군가에게 그 시를 인용해 편지를 쓰는 것이 올바로 시를 읽은 것입니다. 읽고 이야기를 만들어 자신의 감성을 글로 표현될 때 시가 주는 위대함이 있습니다. 시가 자신의 내면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일 포스티노의 마리오처럼 자신의 삶이 순수해지며 영혼의 세계가 주는 목마름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시의 힘입니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젊음의 한때 누구보다 종로를 좋아했습니다. 종로서적에서 시작해 교보문고에 이르는 길을 열심히 걸었는데 책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광화문 교보빌딩에 붙어있는 교보 글판을 보는 것은 이 산책에서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즐거움이었습니다. 이 글판은 1년에 4번 정도 바뀌는데 이 시를 기억하시는지요?




                                                       네이버에서 이미지 인용

시 ‘풀꽃’의 전문인데 이 작품은 지난 광화문 거리에서 대중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시의 필자는 풀꽃과 사람을 사랑하는 나태주 시인입니다. 시인은 항상 수첩을 들고 다니며 번개처럼 번뜻이는 영감을 메모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삽입해 매일 시를 쓰며 독자들을 위로합니다. ‘사람에게는 응원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며,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줘야 합니다.’ 이 생각 때문에 저자는 사는 것이 힘든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날 힘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를 골랐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집에 실려있는 시들을 찬찬히 읽으면 마음속에서 위로와 격려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이 시집이 가지고 있는 개념입니다.

“보고 있으면 마음에 와닿는
사랑과 위로와 휴식의 시”

제 나이쯤 된 독자라면 이발소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던 푸시킨의 그 유명한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삶이 자신을 속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잖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는 시의 한 구절도 가슴에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시를 읽으면서 코끝이 찡해질 때가 몇 번이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안 된다.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삶의 진리를 체험적으로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이 들수록 삶은 겸손해지기 마련입니다. 결국은 거창한 꿈보다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작은 행복을 찾아 만족하는 삶을 사랑하게 됩니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단어를 아시죠?



저는 이것이야말로 시가 주는 확실한 행복이란 생각을 합니다. 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 작은 사치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사 후 처음 맞은 봄이 좋았던 이유는 봄 햇살을 맞으며 저의 집 정원(?)에서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ㅋ
하나님이 주신 밝은 햇살이 제 어깨 위에 내리고,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을 느끼며 책장을 넘깁니다. 노안으로 인해 눈에 피로가 금방 오기에 가끔은 병아리처럼 하늘을 쳐다보며 코발트색 하늘이 주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원색의 텀블러 안에 담겨 있는 향내 좋은 원두커피 한 모금을 마실 때 소확행이 주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언제 우리는 사람이나 사물을 한참 들여다보았을까요? 아마 그 누구도 확실하게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삶이 피폐한 이유는 “한참, 자세히, 천천히”라는 단어와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쁜 것이 잘 사는 것이고, 편리한 것은 좋은 것이란 삶에 익숙한 우리에게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다시 연애편지를 쓸 수 있다면 이 시를 꼭 인용하고 싶군요. 

“너도 그렇다.”


배경음악은 영화 일 포스티노의 OST 입니다

https://youtu.be/hLU_sexiTQ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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