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휴먼 스테인' 리뷰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의 화신 백화점은 종로의 명물이었다.
그 백화점 꼭대기에 어울리지 않게 화신 극장이 있었다. 영화관에서는 지린내가 나기도 했지만 가끔 학교 가기 싫을 때 극장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안식처였다. 물론 이런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단속하는 생활지도 선생을 만나면 최대 정학까지 당할 수 있는 위험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때 진정한 영화광이라 할 수 있다. ‘동시상영’ 지금은 사라진 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비 내리는 화면은 가끔 필름이 끊기기에 관객들의 야유를 받기도 했지만 최소한의 돈으로 문화생활을 즐기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 당시는 개봉관에서 영화가 끝나면 준 개봉관에서 이어 상영을 했고 맨 마지막에 화신극장과 같은 곳에서 동시상영을 하고 영화는 수명을 다했다. 시대가 바뀌어 지금은 전국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동시에 상영을 하고, OTT를 통해 화질에 전혀 문제가 없는 영화를 볼 수도 있다. 더군다나 불법도 있지만 얼마든지 다운로드를 통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프로젝터 등을 통해 혼자만의 공간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를 가지고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이 방법의 장점은 무엇보다 다시 보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거나 음악이나 배경이 아름다운 장면이 있으면 얼마든지 마우스나 리모컨을 이용해 자신이 필요한 부분을 골라 볼 수 있기에 영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 하나의 장점은 흥행은 안 되었지만 마니아나 영화 평론가들이 인정한 영화를 발견하고 뒤늦게 그 영화에 감동하는 경우다. 휴먼 스테인(The Human Stain)이 그런 영화다. 한 때 문화와 담을 쌓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 당시의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 우연히 한 책에 소개된 이 영화를 발견했다. 그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이 있는 앤서니 홉킨스, 니콜 키드먼, 에드 해리스가 출연한 영화기에 더 호기심이 생겼다.
흰 눈으로 뒤덮인 산길을 헤드라이트 불빛만 의지한 채 차는 위태로운 모습으로 눈길을 달린다.
배경음악은 음울하고 기이한 느낌으로 흐르고 스릴러 영화답게 첫 장면의 긴장도는 최고도에 이른다.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차가 곡선 길로 접어들었을 때 한 대의 차가 시동을 걸며 갑자기 튀어나온다. 이 차를 피하려고 급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차는 전복되어 언덕 아래로 구른다. 이때 짧은 순간 놀란 남녀의 얼굴이 보인다.
영화는 장면이 바뀌어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로 떠들썩한 1998년 미국의 매사추세츠 아테나 대학을 보여준다. 이 대학의 학장이자 고전문학교수인 콜만 실크(앤서니 홉킨스)는 대학개혁을 통해 이 학교를 세칭 일류대학으로 만들었다. 강의도중 상습적으로 결석하는 학생을 향해 스푸크(spook)라고 했는데 이 한 단어가 그의 인생을 추락으로 이끌어 내렸다. 콜만 실크는 스푸크란 단어를 유령이란 의미로 사용했지만 학생이나 정적들은 흑인을 비하하는 단어인 검둥이로 이해했고 결국은 학교의 정적들에 의해 쫓겨나고 만다. 그 학생이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충격 때문에 아내마저 심장마비로 죽게 된다.
‘양들의 침묵 이미지’로 인해 앤서니 홉킨스는 언제나 강인해 보인다. 언제 반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분노를 감추며 그는 작가인 네이든(게리 시니즈)을 찾아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며 자신의 억울한 이야기를 글로 쓰라고 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네이든은 담담하게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그는 두 번이나 이혼했고 몇 년 전에는 암까지 걸려 투병생활을 했고 이런 일들은 그가 세상과 사람을 등지고 숲 속에 은둔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네이든의 삶에 회목을 가져왔고 콜만에게는 자신의 삶 깊숙이 숨겨 두었던 비밀을 말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 콜만 앞에 삶에 지쳐있는 여자 퍼니아(니콜 키드먼)가 나타난다.
가늘고 긴 왼손의 검지와 장지로 담배를 길게 빨아 들이키는 30대의 그녀는 퇴폐적이면서도 신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콜먼의 마음이 흔들린다. 비록 지금은 학장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는 지성적인 삶을 살았고 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사였다. 그런데 이제 인생을 정리할 단계에 들어설 콜먼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는 두 사람의 만남은 곧 마을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었지만 콜먼은 개의치 않는다. 사랑이기 때문이다.
14살에 의붓아버지로부터 강간을 당할 뻔한 퍼니아는 가출을 하고 이때부터 그녀의 삶은 잡초와 같았다. 담담히 자신의 지난 시절을 들려주는 퍼니아의 이야기는 후반으로 갈수록 “진실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 영화의 매력이다. 두 사람의 사랑을 영상미 있게 표현한 정사신은 추하지 않다. 이때만 해도 니콜 키드먼의 나신은 조각처럼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조금씩 두 사람의 상처는 치유가 되고 사랑은 깊어진다. 이때 이들의 관계를 방해하는 퍼니아의 전 남편 에드 헤리스가 등장한다. 영화는 진실게임을 하는 것처럼 전개가 되는데 퍼니아와 전 남편의 이야기가 정 반대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데 이 설정이 영화의 절정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서서히 퍼니아에게 콜만은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스쿠프로 살아온 삶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고통이었는가? 고백할 수 있다면 사랑이 아닐까?
비록 그 사랑이 경멸의 대상이 되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사랑에 빠져드는 것은 외로움 때문이다. 아무나에게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 삭막하고 어두운 세상에 나를 이해하고 포근히 감싸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기에 사람들은 사랑에 빠져든다. 때론 그 사랑이 비극적인 결말을 가지고 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과 함께라면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는 확신. 그것이 사랑이다.
영화가 결말을 맞을 때 비로소 눈이 덮인 산길에서 전복된 두 남녀가 콜먼과 퍼니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난 그 순간 두 사람의 사랑을 경건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문득 장필순의 노래 ‘너의 외로움이 나를 부를 때’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나지막이 따라 불렀다.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땐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 줘 ‘
가끔씩 외로움이 찾아오는 날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오는 한 사람. 그것이 사랑이다.
배경음악은
'The Human Stain' Original Soundtrack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