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 리뷰
시간을 주제로 한 영화는 대부분 SF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머리가 굳은 사람이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기에 정신없고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이기에 공감대를 쉽게 이룰 수 없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도 그런 선입견 때문에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는데 넷플릭스에서 마음 편하게 즐긴 것은 ‘레이첼 맥 아담스’ 때문이다. 책도 한 작가를 우연히 만나면 그의 작품에 빠져들고 모든 작품을 독파하는 것처럼 영화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OTT가 보편화되었기에 좋아하는 배우의 작품을 시대 순으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다. 영화 ‘노트북’에서 레이첼 맥 아담스를 만난 후 그녀가 가지고 있는 깜찍함과 귀여움 때문에 간간히 출연한 영화를 봤다. ‘미드나잇 인 파리’ ‘서약’ ‘굿모닝 에브리 원’ 등에서 그녀의 매력이 잘 표현되어 있지만 ‘셜록 홈스’는 너무 졸다 보니까 그녀가 출연한 줄도 몰랐다…….ㅠㅠ
포스터가 예쁜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있다.
‘돌아갈게 당신이 있는 시간으로, 기다릴게 당신이 올 때까지’
원작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에 이 카피를 읽는 순간 애절한 사랑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당신이 올 때까지’란 구절. 한 번쯤은 간절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아픔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많다. 기다림이 없는 만남이라면 순조로운 항해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기다림은 한 사람의 변심으로 인해 기울기 시작한 사랑에 대한 미련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데도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그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아픈 사랑일까? 아니면 해피엔딩일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화면을 바라본다.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주인공 헨리(에릭 바나)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간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느 겨울날 엄마와 함께 캐럴 송을 부르며 눈 덮인 도로를 질주한다. 도입부에 가족 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의 대부분은 충격적인 장면을 통해 그 평화와 사랑을 단번에 깨트려 버린다. 이때 관객들은 충격을 받으며 “어떻게 하지?” 라며 안타까움에 손에 깍지를 끼거나 “어머!”란 탄성을 지를 것이다. 눈 덮인 도로를 질주하는 엄마의 차 앞으로 헤드라이트를 켠 덤프트럭이 다가올 때 관객들은 이미 이 영화의 다음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트럭과 정면충돌을 한 엄마의 죽음을 헨리는 보게 되고 자신은 어떤 힘에 의해 자동차 밖으로 튕겨 나와 죽음을 면한다. 알몸으로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헨리는 놀람과 공포로 울며 엄마에게 달려가려고 하는데 이때 한 남자가 나타나 헨리를 붙잡는다. 그리고 하는 말이
“지금의 네가 자라면 내가 되는 거야! “
라고 말한다. ”뭐야? “ 이때부터 늙다리 아저씨는 헷갈리기 시작한다.
아날로그적 감성에 익숙한 나이이기에 헨리처럼 시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행위는 굳은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관객과 공감이 없는 영화가 과연 감동이 있을까? “
란 의심이 들었지만 판타지 로맨스를 좋아한다면 인과관계를 더듬으며 보는 영화에 대한 즐거움이 있을 것 같다.
14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헨리(에릭 바나)는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하고 있는데 도서관을 찾은 클레오(레이첼 맥 아담스)가 헨리를 보는 순간 얼굴에 웃음을 띠고 다가온다.
“헨리 당신이군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당신이 말했어요?”
그녀는 헨리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헨리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날 밤 클레오는 헨리에게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를 설명한다. 가을의 정취가 아름다운 정원에 6살의 클레오가 담요를 피는 순간 자신은 ‘시간 여행자’라며 헨리가 나타난다.
“이제 너하고 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될 거야”
라는 말을 남기고 또 올 것을 약속하며, 그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 꼬마 아가씨의 마음속에 헨리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데 이미 사랑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넘나드는 사랑이야기는 별 관심이 없지만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감정은 완전히 아날로그적이다. 모든 연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감정, 특히 헨리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지만 언제나 훌쩍 떠났다가 아무 때나 돌아오기에 클레오의 기다림이 아프게 다가온다.
두 사람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지지만 피로연 때 춤을 추며 클레오가 헨리에게 한 호칭은 의미심장하다.
“안녕하세요? 낯선 분”
헨리는 그녀의 남편이지만 훌쩍 떠났다 아무 때나 돌아오기에 그는 클레오에게 낯선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현실에서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란 의심이 드는 것은 자신이 너무 세속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 유명한 신약성경의 고린도 전서 13장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헨리가 어느 한순간 시간 여행을 떠났을 때 남겨진 클레오는 그를 믿기게 성경의 말씀처럼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딜 수 있기에 기다린다. 마치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약혼자 페르귄트를 못 잊고 백발이 다 되도록 그를 기다린 솔베이지처럼 사랑의 아름다움은 믿고 기다리는 데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너무 쉽게 변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별 감동이 없을 것이다. 믿고 기다리는 사랑보다 쉽게 변하는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아니 양보보다 빼앗는 사랑에 더 익숙한 우리의 현실을 볼 때 이 영화가 추구하는 사랑의 가치는 매우 아름답다. 헨리와 클레오에게는 오직 한 여자 한 남자만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올 줄 알았으면 여기서 기다릴걸 그랬어?"
"기다릴까 봐 말을 하지 않았어."
헨리는 사랑하는 클레어가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 있을까 봐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란 생각이 든다.
‘기다림’ 오랜만에 듣는 단어다. 비단 사랑뿐 아니라 우리의 삶은 기다림이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문득 한 때 좋아했던 서정윤의 ‘홀로서기’가 자연스럽게 입술을 타고 흐른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어디엔가 있을 나의 반쪽을 만난 사랑이야기다.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면 이제 누구를 만나기 위해 가슴이 아프고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난 사람을 아낌과 배려를 통해 소중히 여기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지키는 것이 사명이란 교훈을 얻게 하는 영화다. 나아가 시인의 노래처럼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은' 그저 가슴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사랑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시간여행자의 아내 OST 중 'You won't let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