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학개론' 리뷰
교회 마당에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학생부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온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뭉치기 시작했고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던 소녀를 향해 눈이 날아갔다. 눈을 맞은 아이는 비명을 지르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다. 하얀 칼라에 군청색 교복을 입은 소녀는 왕사탕 같은 큰 눈과 짙은 쌍꺼풀을 가지고 있었기에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더군다나 교회의 반주자였기에 늘 그 계집아이 옆에는 뛰는 가슴을 주체 못 하는 남자아이들이 있었고 자신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눈을 던졌다. 가슴을 향해 정확히 날아든 눈 때문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며 소녀는 환하게 웃었다. 한 여가수의 노래처럼
"총 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얼굴은 빨개졌고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 아이가 쳐주는 ‘은파’와 ‘엘리제를 위하여’ 등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아이 옆에 서 있었다. 잘난 척하느라고 그 소녀에게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서양 문명사’를 선물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이는 알았을 것이다.
“너도 무슨 뜻인지 모르지?”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한 아이 앞에 서면 말을 더듬거리며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 아이가 많은 아이들 앞에서 활짝 웃을 때 마음이 아픈 것을 몰랐을까?
상대방의 마음을 모르기에 첫사랑은 아리다. 이해인 수녀는 아린 마음을 이렇게 노래한다.
두근거리는 가슴 들킬까 봐
애꿎은 손톱만 깨물다가
........
그때부터 조금씩
가슴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
- 이해인 님의 <첫사랑> 중에서
심증은 있는데 증거는 없는 것이 첫사랑의 특징이 아닐까?
“좋아한다!”
라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웠기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이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한 번쯤 만난다면 그때의 감정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고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남의 기회가 있다면 머리에 염색도 할 것이고 분위기 좋은 카페 하나 정도는 알아 놓고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첫사랑을 만난 대부분의 사람은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슴속에 숨겨놓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소녀의 모습도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졌을 것이다. 다만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이미지화되었기에 설렘으로 기억될 뿐이다. 눈이 큰 것은 건축학개론의 여주인공 한가인을 닮은 것 같고 몸매는 아직도 이효리와 비슷할 것이란 상상을 한다. 결국 첫사랑의 소녀는 박제된 미라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남아있다. 어쩜 그 아이는 베아트리체처럼 기억될지도 모른다. 은막을 떠난 그레타 가르보가 죽는 날까지 자신의 모습을 일반인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처럼 첫사랑의 아이도 17살의 나이로 가슴속에 살아있을 때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간직될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이런 공식을 깨트리고 15년 만의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스무 살 시절. 승민(엄태웅)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음대생 서연(수지)에게 반한다. 승민은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순진남이다. 그러기에 두 사람의 만남도 자연히 서연이 주도권을 잡는다. 말을 먼저 놓은 것도, 승민의 어깨에 기대어 잠드는 것도, 팔짱을 끼는 것도 서연으로부터 시작된다. 다만 잠깐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도둑 뽀뽀에 성공한 것은 승민이다. 첫 키스의 달콤함에 취한 순진남의 순수함을 보여준 이제훈의 매력이 예쁘다. 두 사람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승민은 서연의 아픔을 알게 된다. 제주도 학원 출신으로 음대에 들어온 그녀의 배경으로 음대생들과 어울리는 것은 태생적 차이로 인해 불가능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선배가 있다. 강남이라는 배경을 가졌고 외모 번듯하고 부티 나지만 속은 구정물로 가득 찬 속물이다. 그렇지만 그 선배는 서연의 배경이 되어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서연의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서연을 선배가 그녀의 방까지 바래다주는 모습을 본 승민의 첫사랑은 종말을 고한다.
15년의 세월이 흘러.
조그마한 건축 회사에서 매일 야근과 밤샘 작업으로 지쳐있는 승민 앞에 불쑥 서연이 나타난다. 그녀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였던 제주도 출신이라는 배경을 가려줄 의사와 결혼했고 그 보상으로 개포동에서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이혼이라는 상처로 찢겨 있다. 서연은 외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승민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고 받아줄 것이란 기대감 때문에 첫사랑의 남자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승민은 의외로 쿨하다.
“근데 누구신지요?”
이때부터 두 사람은 15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퍼즐게임처럼 마음을 맞추기 시작한다.
“너를 좋아했었어!”
“오래도 걸렸네?”
“알고 있었어?”
“내가 바보냐, 그걸 모를까 봐? 너 나에게 키스도 했었잖아?”
첫사랑의 아픔은 소중하고 깨끗하기에 혹시라도 그 순수함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할 때 찾아온다. 혹시 좋아한다는 한마디 때문에 그녀가 내 곁에서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
그러나 이제는 안다. 비록 15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사랑의 불꽃이 남아있다는 것을, 그래서 영화는 애잔하다. 왠지 자신에게도 이런 아픈 사랑이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해본다. 이 영화가 많은 관객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나의 첫사랑은 아직도 유효하고 나의 고백을 그녀가 받아줄 것이란 기대감이 있기에 관객은 미소를 짓는다. 영화 속의 승민이 자신이라는 착각을 하게 했다면 이 영화는 수작이란 이름으로 가슴에 남을 수 있다.
모든 첫사랑의 공식은 육체관계가 없는 것이다.
춘향전보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이 더 가슴에 남아있는 이유도 육체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사랑 때문이다. 연애학 박사처럼 보이는 재욱의(유연석)의 꼬임에 넘어가 승민이 짙은 키스라도 시도했다면 그 첫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20살의 젊음은 육체의 유혹이 강하지만 서연 앞에서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은 승민의 사랑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내 젊음의 한때 깨끗하고 맑았던 영혼의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너를 잘 알아야 너한테 맞는 집을 잘 지을 거 아냐?”
“그러니까 나를 잘 알고 싶으시다 이거네? “
여자는 아직도 남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다.
15년 아니, 30년, 40년이 흘러도 한 사람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은 것, 그것이 첫사랑이다. 승민과 서연이 마음으로 함께 지은 집은 완성되었지만, 같이 살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첫사랑은 아프다.
건축학개론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첫사랑에 대한 짧은 기억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은 작품이다. 아니 순수를 잃어버리고 적당히 오염된 삶에 찌들어 사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하는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할 말이 많다. 이제는 추억의 유물이 된 CD 재생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이어폰으로 나누어 듣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란 탄식이 일어난다.
누구나 추억이 필요한 이유는 삶에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나이 들수록 삭막한 가슴에 때로 촉촉이 내리는 짧은 사랑비를 맞으면 삶은 새롭게 피어나기 시작한다. 건축학개론은 짧게 내린 사랑비를 다시 맞고 싶게 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목마름을 채워줄 누군가를 기다리게 한다.
배경음악은
건축학개론 OST 중에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입니다.
https://youtu.be/ZHUQwXHjSQg?si=zGjdWZ3Dk33d_hdy